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8화 (8/194)

00008  1-2 불공평한 내기  =========================================================================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이전처럼 가슴이 떨리진 않는구나.’

하긴,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가족 간의 사랑과는 달랐다.

아무리 타오르는 열정이라도 잿더미 하나 안 남기 충분한 시간. 하물며 그런 파국을 맞은 상대라야!

뜻밖의 재회에 놀랐을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황제가 태자에게 말했다.

“늦었구나.”

“네.”

"어떤 일 때문에 늦었느냐?"

"재정부와 크림 원정에 대한 예산안을 논의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요한 문제지. 우리 제국민이 크림 반도인들에게 학살당한 시점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반드시 승리해야 해.

후작, 공화국의 동태는 어떤가?“

"공화국의 주력군이 검은 대륙에 묶여있는 터라, 아직 가시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검은 대륙의 전쟁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고, 저희가 크림반도를 장악 시, 흑해(黑海)의 재해권이 넘어오게 되므로,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셋은 잠시 곧 벌어질 전쟁에 대해 토의를 하였다.

“원정군은 로마노프 령(領)의 2군단으로 할 생각이네. 모자라진 않겠나?”

“2군단만 해도, 5만이 넘는 대병력이니 공화국의 개입만 없다면 충분하다 보입니다. 그 이상의 병력을 동원 시 재정에 부담이 갈 수 있습니다.”

엘리제는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역시 전쟁이 벌어지는구나.’

사실 그녀는 이전 삶에서 국제 정세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1차 크림 원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었다.

‘원정은 실패해. 그것도 철저하게.’

그녀는 치마 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1차 원정군인 2군단이 전멸하고, 2차 원정 때 작은 오빠가 참전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오빠, 크리스는 2차 원정 때 전사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황제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우리가 영애를 앞에 두고, 재미없는 이야기만 했구나.”

“아, 아닙니다.”

“어떤가? 영애는 혹시 이번 원정에 대해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

“제가 어찌 감히...”

“그냥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네. 부담가지지 말고, 혹시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줘 보게.”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편안한 목소리였다.

황제는 특별히 그녀의 조언을 구하고자,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조카처럼 아끼는, 그리고 곧 가족으로 받아들일 그녀가 어떤 식견을 가졌는지 궁금한 것이리라.

엘리제는 머뭇거렸다.

‘말해도 될까?’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전황에 획을 그었던 몇 가지 요인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아느냐, 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인 그녀다.

국제 정세에 전혀 관심도 없다가 혜안을 제시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어쩌면 사람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몰라.’

당시 1차 원정이 실패하며, 전쟁이 길어진 탓에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었다.

결국, 전쟁은 제국의 승리로 끝나겠지만, 그때의 상처는 무척 컸다.

‘의심 좀 받으면 어때? 가장 좋은 것은 전쟁을 막는 것이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최대한 희생자를 줄여야 해.’

의사인 그녀는 사람이 죽는 전쟁이 싫었다.

전쟁을 막을 수 없다면, 희생자라도 가능한 줄이고라도 싶었다.

“그러면 부족하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어서 말해보게.”

황제가 딸의 재롱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쟁은 2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호오, 2가지?”

구체적인 말에 황제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첫 번째는 대륙 동부의 몽셀 왕국입니다.”

“흠?”

황제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몽셀 왕국? 프랑소엔 공화국이 아니라?”

“네, 몽셀 왕국의 참전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후작이 가르치듯 말했다.

“엘리제, 몽셀 왕국은 크림 반도와 연관이 없단다. 비교적 거리가 가깝긴 하지만, 지금 크림 반도에서 벌어지는 민족 분쟁과도 상관이 없고, 내륙국이라 흑해(黑海)와도 연관이 없어.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상대는 프랑소엔 공화국이야.”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버지. 지정학적으로 보면 몽셀 왕국은 크림 반도의 전쟁에 참전할 이유가 전혀 없죠.”

“그런데 왜 그들의 참전을 고려해야 하지?”

“몽셀 왕국의 현 군주가 이그린트 백작이기 때문이에요.”

“이그린트 백작 때문이라고?”

반문하던 엘 후작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리고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둘 모두 제국을 경영하는 거인. 엘리제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영애, 설마 그 말은?”

“네, 이그린트 백작은 현재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불안전한 왕. 그가 왕위의 정통성을 얻으려면 종주국인 프랑소엔 국의 승인을 얻어야 합니다.”

“...!!!”

“몽셀 왕국은 프랑소엔 공화국의 전신인 프랑소엔 제국에서 독립한 나라니까요.”

황제와 후작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무심한 눈빛의 황태자도 그녀를 바라봤다.

“프랑소엔 공화국은 현재 군을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 이그린트 백작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대신, 우리 군의 뒤를 치는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

정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린 소녀의 의견이라 무시할 내용이 아니었다.

분명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허어, 몽셀 왕국이라. 생각지도 못했군. 그래, 가능성이 있어.”

“네, 그렇습니다. 공화국이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크림 반도와 가까운 몽셀 왕국을 움직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둘은 감탄한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제국을 경영하는 그들도 놓친 것을 어떻게 저 어린 소녀가?

그런데 그때,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몽셀 왕국이 반도에 투사할 수 있는 병력은 2만 남짓. 너는 겨우 그 정도의 병력이 우리 제국군을 위협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가?”

“...!”

황태자였다.

오랜만에, 30년 만에 나누는 남편과의 대화에 엘리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으나, 담담히 답했다.

“‘정면으로 싸우면’ 우리 제국군이 결단코 패하지 않을 거라 봅니다. 브리티아 제국군은 서 대륙, 아니, 전 세계 최고의 강병이니까요. 공화국과 프러시엔 공국군을 제외하면 정면으로 우리 제국군과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없습니다.”

“잘 아는군. 그러면?”

“정면으로 싸우면 말이지요.”

황태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되묻기 전, 그녀는 두 개의 단어를 말했다.

“도노브 강. 그리고 우크라 산맥.”

“...!!!”

“몽셀 왕국군이 만약 움직인다면 크림 반도로 오는 것이 아닌, 우크라 산맥 쪽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도노브 강을 타면 우크라 산맥으로 곧바로 향할 수 있으니까요.”

“영애, 그 말은...”

“네, 우크라 산맥은 제국에서 저희 서 대륙 본토의 로마노프 령(領)에서 크림 반도로 향하는 유일한 입구. 그 우크라 산맥을 내준다면 반도에 들어간 저희 제국군은 보급이 끊긴 채 고립될 수도 있습니다.”

“...!!!”

그렇게 되면 결과는 하나였다.

원정군의 전멸.

“허어...”

정원에 다시 한 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었다.

제국을 경영하는 거인인 그들도 놓친 점을 지적한 그녀를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바라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