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1-2 불공평한 내기 =========================================================================
엘 후작이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
‘그래, 분명 가능성이 있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원정군은 끝이야. 왜 이 생각을 지금까지 못 했지?’
황제와 황태자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너무나 무서운, 그러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참의 침묵 끝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재상.”
“네, 폐하.”
“내일 바로 군무대신과 함께 이 내용을 상의토록 하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몽셀 왕국이 실제 참전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영애가 말한 내용은 반드시 대비해야겠어. 태자, 너는 정보국에 이야기해 몽셀 왕국의 동태를 빠짐없이 살피라 이르고.”
“네, 폐하.”
황제는 급히 필요한 조처를 명했다.
그리고 그는 다소곳이 차를 마시고 있는 엘리제를 경악과 감탄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봤다.
‘정말 대단하구나. 어찌 이런 생각을?’
그저 인형같이 예쁘고, 어린 소녀가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국제 정세를 꿰뚫고, 크림 반도와 연관된 각국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희대의 군략가(軍略家) 정도 돼야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생각 아닌가?
‘짐이 저 아이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정말 대단하구나.’
“후작.”
“네, 폐하.”
“언제 이렇게 영애를 훌륭하게 교육한 것인가?”
“하하...”
후작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최근 딸이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책도 많이 읽는 것 같긴 했지만... 이런 식견이라니?
“영애.”
“네, 폐하.”
“그러면 아까 전, 2가지를 유의해야 한다지 않았는가?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가?”
“풍토병입니다.”
“풍토병?”
엘리제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사실 몽셀 왕국의 참전보다 훨씬 중요한 내용이었다.
‘원정군은 결국 전염병으로 전멸하게 돼.’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몽셀 왕국군 때문에 반도에 고립된 원정군은 보급이 끊긴 채 고군분투하다, 대규모 전염병이 유행해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무슨 전염병이 돈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대비를 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거야.’
“크림 반도는 제국과 환경, 기온이 다릅니다. 특히 전쟁이 벌어질 시기는 한창 고온다습할 시기. 전염병의 창궐에 유의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옳은 말이야. 크림 반도는 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환경. 분명 전염병이 돌 수 있어. 그러면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좋겠는가?”
“일단 의약품의 보급을 충분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위생?”
황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아, 하고 생각했다.
‘아직 위생의 중요성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지.’
물론 이 시기의 제국에도 위생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의사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일반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네, 그렇습니다. 여러 질병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전염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따라서 군내에서 위생을 조금만 더 신경 쓴다면 전염병의 대규모 전파 차단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는 다시 한 번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대단해. 그런 내용은 또 어디서 배운 건가?”
엘리제는 빈약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의학에 관심이 있어서 서적을 읽었습니다. 얕은 지식에 불과해 민망합니다.”
“얕은 지식이 아닌 것 같은데.”
엘리제는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너무 과하게 나섰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의심을 피하려고 희생자가 늘어나는 것을 못 본척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최선은 전쟁을 피하는 것이겠지만, 불가능한 상황이니 희생자라도 최소로 줄이고 싶었다.
‘이걸로 조금이라도 희생자를 줄일 수 있으면.’
황제가 말했다.
“오늘 영애가 한 이야기는 검토 후 적극적으로 반영하도록 하겠네. 만약 영애의 조언이 전황에 도움이 된다면 내 영애에게 브리티아 무공 훈장을 내리도록 하겠네.”
“...!!!”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브리티아 무공 훈장!
황실 십자 훈장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제국 최고의 권위를 가진 훈장이었다.
훈장을 받는 것만으로도 자동으로 명예 기사(knight) 작위가 수여된다. 즉, 브리티아 무공 훈장을 받는 것은 제국 귀족으로서 최고의 명예라 할 수 있었다.
“어리석은 의견이었을 뿐입니다. 너무 과하니, 거두어주십시오.”
“영애의 의견을 어리석다 하면, 그 누가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있을까? 그리고 절대 과하지 않아. 만약 영애의 이야기대로 대비해, 참사를 막을 수 있다면 고작 훈장 가지고는 오히려 모자라지.”
“... ... .”
엘리제는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황제가 약간 짓궂은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영애.”
“네?”
“옆에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짐한테 주려고 가져온 것은 아닌가?”
“아...!!”
다름 아닌 가문의 집사를 통해 수소문한 물건으로 황제께 드릴 선물이었다.
계속 바치려 하고 있었는데, 자꾸 길어진 대화 탓에 마땅히 드릴 타이밍을 못 찾고 있었다.
“동방 청(淸, Qing)나라에서 구한 향초입니다.”
“향초?”
“네, 청(淸)나라의 대인들이 사용한다는 향초로 향이 깊고, 맑아 몸의 피로를 풀어주며, 기운을 돋아주는 효과가 있다 하여 폐하께 드리고자 구해왔습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인 모를 지병 탓인지 계속 피로하고, 기운이 없었다.
향초의 향을 살짝 맡은 황제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살짝 맡는 것만으로 머리가 맑게 개는 느낌이군. 훌륭해. 어떻게 이렇게 짐에게 꼭 필요한 것을 구해왔는가, 영애?”
“기쁘다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계속 몸이 피곤하고, 기운이 없었는데. 고맙게 잘 쓰겠네.”
그 말에 엘리제는 황제의 눈을 바라봤다.
깊숙이 느껴지는 피로감.
그 순간이었다.
한가지 진단명이 퍼뜩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폐하, 혹시 최근 잠을 자도 계속 피로하십니까?”
“그렇네.”
“물을 자주 마시거나 하지는 않으시고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군.”
“물을 마셔도 계속 갈증이 일진 않으십니까?”
“그것도 그래. 물을 마셔도, 마셔도 계속 갈증이 일긴 한다네.”
"그러면 혹시 요의 때문에 밤에 일어난 적은 없으신지요?"
"그런 적도 있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황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속으로 손뼉을 쳤다.
당시 황제가 죽기 전, 산혈증(Acidemia)을 알칼리 호흡(Respiratory alkalosis)로 보상하기 위해 깊고, 빠른 숨을 쉬던 게 기억났다.
‘그래, 역시 그거였어! 폐하의 지병은.’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진단명이 떠올랐다.
‘계속 치료를 못 받았으니, 그때 그런 혼수가 왔던 거야!’
그러면서 그녀는 속으로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이런 병을 치료 못 해, 대(大) 브리티아 제국의 황제가 병사하다니.’
어려운 병도 아니었다.
흔한, 치료만 하면 살 수 있는 그런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