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10화 (10/194)

00010  1-2 불공평한 내기  =========================================================================

Diabetes mellitus.

한국어로 당뇨병.

황제의 지병은 이 당뇨병이 분명했다!

‘계속 치료를 못 받으니 혈당 수치가 계속 올라갔을 거고, 혈당 수치가 1000이 넘어가며 결국 산혈증이 왔겠지.’

당뇨성 혼수, 의학 용어로 당뇨성 케톤 혈증(DKA)!

현대에서도 응급 상황이다.

응급 치료를 하면 살릴 수 있지만, 지금 브리티아 제국의 의학 수준으론 어려웠을 것이다.

‘당뇨를 완치시킬 수는 없지만, 조금만 관리하면 혼수 상태가 오는 것은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지?’

그녀는 머뭇거렸다.

현대 지구라면 당뇨 검사를 받아보시는 것이 좋으시겠다고 말하면 끝이지만, 이곳은 다르다.

‘당뇨란 질환의 개념은 있지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때고, 무엇보다 의사도 아닌 내 말을 믿어줄까?’

다른 것보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의사도 아닌 그녀의 말을 믿어줄까, 라는 점!

그때 황제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왜 물어보나, 영애?”

“그게...”

“편히 말해도 괜찮아.”

결국, 그녀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황제의 병이 지속 악화하는 것을 모른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당뇨가 맞는다면 간단한 식이 조절만으로도 큰 호전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제가 최근에 본 서적 중에 폐하와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는 질환을 본 적이 있습니다.”

“흐음, 영애가 의학 전공 서적을 봤다고?”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학 전공 서적은 일반 서적과는 달랐다.

원체 전문적이라 관련 지식이 없으면, 아예 내용에 접근할 수조차 없는데, 그걸 읽었다고?

“네, 폐하.”

“그래, 그 서적에 무슨 질환이 나와 있었는가?”

“정확한 진단명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혈액 내에 당의 농도가 지나치게 올라가면 폐하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 설탕 같은 것에 들어가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인가?”

“네,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성분이나, 여러 이유로 체내에 농도가 올라가면 폐하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서적에 적혀 있었습니다.”

“흠....”

황제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말을 바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일단 당뇨란 질환 자체가 당시 널리 알려진 질환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황제의 지병은 황궁 어의도 감을 못 잡는 질환이었다.

그런 어려운 병을 의학의 문외한인 소녀가 단번에 진단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번 밴 자작과 이야기해보겠네.”

그래도 없는 병을 지어낸 것은 아닌 것 같아, 황제는 그렇게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폐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밴 자작은 다름 아닌 황궁 어의였다.

‘밴 경은 뛰어난 의사니, 분명 이 정도의 단서면 당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아직 생소한 개념이어서, 밴 자작은 황제의 증상을 당뇨와 연결해 생각 못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당대 제국 의학계의 거두인 그가 당뇨란 질환을 아예 모르지는 않을 터. 이 정도 단서면 분명 당뇨를 진단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진단을 내려, 생활 습관만 어느 정도 고친다면 혼수 같은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그녀는 판단했다.

하지만 엘리제가 한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번 일로 자신이 어떤 주목을 받게 될지.

"그나저나 오늘 영애가 짐을 많이 놀라게 하는구나. 일반인은 해석하기도 어려운 의학 서적까지 읽어보다니. 정말 대단해."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오늘 영애의 모습은 참으로 훌륭해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구나."

황제는 흐뭇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 내가 영애를 왜 부른지 아는가?"

"... 잘 모르겠습니다."

"영애를 태자의 비로 정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살피기 위해서였어. 마음속으로는 영애를 태자의 비로 결정하긴 했지만, 한구석 염려되는 점이 없잖아 있었거든. 그런데 오늘 그 근심을 다 덜어버리는 듯하군. 이 정도면 태자의 비로 한점의 부족함도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후작?"

"...!!"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안 돼!'

전혀 그런 의도로 한 행동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혼을 파기하러 온 것이었는데, 오히려 황제는 백점 만점의 평가를 내린 듯하다.

한편 딸의 마음도 모르고, 후작이 기쁘게 웃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아, 아버지..."

엘리제는 곤란한 얼굴로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벌써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그녀는 조심히 황태자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태자의 얼굴은 속마음을 알 수 없게 무표정했다. 이전 삶과 마찬가지로.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 그리고 저 태자를 위해서라도.

'많이 분노하시겠지만.'

그녀는 입을 열었다.

"폐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언가? 무엇이든 말해도 좋아."

황제는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씀드리기 정말 송구스럽지만..."

그리고... 마치 환자의 복부를 메스로 가르는 마음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와 태자 전하와의 약혼을 다시 한 번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

장내가 조용해졌다.

모두 엘리제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냐, 엘리제?"

엘 후작이 물었다.

놀라기보단, 의아한 목소리. 너무 뜻밖의 말이라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래, 짐도 영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 태자와의 약혼을 다시 생각해달라니?"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저와 태자 전하와의 약혼을 없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

그 뜻밖의 말에 장내 모두가 굳었다.

엘 후작이 파들파들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 엘리제!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

경악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

그럴 만도 했다.

간절히 청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약혼을 물러달라니!

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더구나 상대가 무려 황태자다.

"잠깐 후작. 내가 물어보지. 클로랜스 영애,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황제가 말했다.

여전히 부드러운 음색이었으나, 엘리제는 큰 죄를 고하듯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황실의 위엄을 훼손한 죄,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허허."

황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째서인가? 태자와의 약혼을 간절히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영애가 아니었던가? 그 사이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건가?"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태자를 향한 마음이 변한 것은 맞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 이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제가 황태자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응?"

그녀는 더욱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최근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같이 어리석고 부족한 소녀가 이 제국의 어머니가 될 황태자비의 자리에 과연 어울릴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보았지만, '결론은 아니다.', 였습니다."

"허어..."

"물론 황태자비가 된다면 제 개인에게는 무한한 영광이고, 행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황태자비는 제국의 퍼스트레이디(first lady)가 될 존귀한 이.

저같이 부족한 소녀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단순히 어울리지 않는 것을 떠나 위대한 제국의 존엄에 대한 먹칠이고, 모독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리석은 제가 황태자비, 나아가 황후가 되면 맡은 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오히려 제국의 우환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단숨에 말을 내뱉은 엘리제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자격이 되지 않은 자신이 황태자비가 됨으로써 수많은 비극이 탄생했다.

황태자비는 자신 같은 이가 아니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존귀한 여인이 올라야 했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수술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 어울려.'

머리를 땅에 닿을 듯 조아리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녀가 감히 바라보면 안 될 것을 잠시 꿈꿨습니다. 소녀의 어리석음을 벌해주십시오.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황태자비란 과욕을 부린 죄. 그리고 그로 인해 황실과 지고한 폐하의 위엄을 훼손시킨 죄.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받겠습니다."

그녀의 백금발이 스르르 흘러내려 흙바닥에 흩어졌다.

‘이걸로 됐어. 끝났어.’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으니, 황제는 약혼을 거둘 것이다.

‘크게 분노하시겠지만.’

그녀는 황제의 분노를 기다렸다.

얼마나 노여워하실지 두려웠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어떤 벌을 내리더라도 자신이 감당할 몫이었다.

“... ... .”

정원에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제는 죄인이 용서를 구하듯, 흙바닥에 엎드린 채 황제의 벌을 기다렸고, 엘 후작은 사색이 되어 연신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한편 이 약혼의 또 다른 당사자인 황태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약간은 기이한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살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영애.”

“네, 폐하.”

“고개를 들라.”

엘리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황제를 바라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

황제가 빙긋 웃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철든 딸을 보는 아버지 마냥 기특한 표정으로.

“폐...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