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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1화 (11/194)

00011  1-2 불공평한 내기  =========================================================================

“그래, 영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짐이 영애를 아끼면서도 마음 한구석 염려를 한 이유니까. 영애가 과연 황태자비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짐도 했었지.”

의외로 노여움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마뜩함이 느껴지는?

엘리제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황태자비가 되기에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황제는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하지만 오늘 영애의 모습을 보고 그 걱정을 많이 덜었어.”

“...네?”

“지금 영애의 모습을 보면, 아주 훌륭히 황태자비의 역할을 해낼 것 같거든.”

“...!!”

그가 흡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영애에게 정말 많이 감탄하게 되네. 그토록 바라던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다니.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참으로 기특하고 또 기특해!”

“... ... .”

엘리제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황태자비가 되기에 한없이 부족합니다. 자신밖에 모르고, 성격도 모나고...!”

그녀는 자신의 흠집을 최대한 떠올려 말했다.

하지만 황제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만. 영애의 말은 충분히 잘 알겠네.”

“폐하...”

“영애가 올해 몇 살이지?”

“...16살입니다.”

황제는 시선을 돌려 정원을 바라봤다. 여러 색상의 장미들이 기화 만발하고 있었다.

“16살. 참으로 아름답고 어린 나이이지. 이 꽃처럼 말이야.”

그는 그중에서도 이제 막 봉우리가 열리고 있는 장미를 바라봤다. 그 장미는 봉우리 속으로 짙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는데, 만개하면 무척 아름다울 것이 분명했다.

“영애의 불안감이 무엇인지는 알겠네. 막상 황태자비가 되려니, 그 책임감에 부담되는 거겠지. 하지만 부족한 면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나?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 나야.

난 영애가 오늘 같은 모습만 간직한다면, 앞으로 훌륭한 황태자비, 황후로 커 나갈 것으로 생각하네.”

“...!!”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녀는 속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무슨 콩깍지라도 쓰였는지, 황제는 그녀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오늘 반드시 약혼을 취소시켜야 하는데.’

오늘 물러가면, 언제 황제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이대로 약혼이 공표되면, 그때는 무르고 싶어도 무를 수가 없다.

‘뭐라고 해야지? 황태자가 싫어졌다고 이야기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이 난국을 타개코자 그녀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그러던 그 순간이었다.

이 약혼을 취소할 수 있는 한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폐하. 제가 약혼을 물러달라 한 것에는 한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뭔가?”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고 반응할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단번에 내뱉었다.

“사실... 저는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의사(醫師)가 되고 싶습니다.”

***

“... ... .”

장내에 다시 침묵이 내렸다. 오늘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침묵이다.

지금까지의 침묵이 놀람과 경악 때문이라면, 이번은 황당함 때문이었다.

“... 엘리제, 네가 의사라고?”

아버지가 떠듬떠듬 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이냐는 듯한 목소리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전 의사가 되고 싶어요.”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엘 후작은 자꾸만 거듭되는 딸의 돌발 행동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최근 얌전해진다 싶었더니, 폐하 앞에서 이런 대박 사고라니!!

“영애, 그 말이 정말인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말이?”

“네, 정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영애를 아낀다 해도 거짓말은 용납지 않아.”

황제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마치 주시자와 같은,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시선.

엘리제는 그 시선을 흔들림 없이 받았다.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난 정말 의사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

지구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철혈(鐵血)의 메스.

맥동하는 동맥.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낼 때의 그 행복.

두근두근.

외과의사로서의 순간들을 떠올리자, 그녀의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부드럽고 여린 외모를 지녔고,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외과의사였다.

그 긴장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에서 생명을 살리는, 그때의 감각과 보람을 이번 삶에서도 다시금 느끼고 싶었다.

“허허. 난데없이 의사라니.”

그녀가 진심이란 것을 깨달은 황제는 헛웃음을 지었다.

“후작, 그대는 영애가 이런 꿈을 가지고 있단 것을 알고 있었나?”

“... 전혀 몰랐습니다.”

“의사. 그래, 좋지. 뜻있는 일이야. 하지만 영애. 영애는 의사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보다 의사란 직업을 잘 아는 사람이 이 제국에 존재할까?

“영애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고 힘든 직업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황제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농담이 아닌 것 같군. 그래서 의사가 되고 싶어 여러 의학 서적들을 봤던 건가?”

황제는 아까 전 대화할 때 그녀가 의학 지식을 알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후작가의 금지옥엽인 영애가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송구스럽지만... 제국법에 여성이 의사가 되면 안 된다는 법률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전 라온 자작가의 영애가 의사가 된 사례가 있었고요.”

“그건 그렇긴 하지. 그러면 영애. 이렇게 묻겠네. 영애는 본인이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

엘리제는 황제의 물음의 뜻을 깨달았다.

의사(醫師)는 연금술사(alchemist), 법률가(lawyer), 행정가(administrator)와 더불어 제국 최고의 전문직종 중 하나였다.

즉, 제국의 의사는 현대 지구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대우받는 계층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될 수 있었다.

‘원래는 그렇게 대우받는 직업이 아니었지만, 100년 전부터 선진 의학의 개념이 도입되고, 대륙 전체적으로 보건을 중요하게 여기며 위상이 많이 바뀌었지. 제국에서도 의학자들을 많이 대우해주었고.’

그래서 귀족 중에 의사가 되는 사람도 많았고, 최소 신(新)-시민, 부르주아 계층은 되어야 의사가 될 수 있었다.

‘내가 그들 사이의 경쟁을 뚫고 진짜 의사가 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것이겠지.’

황제가 재차 말했다.

“이 제국에서 의사로 인정받으려면, 의학 연구원의 시험을 통과해야 해. 아무리 고위 귀족이라도 그 시험에서는 아무런 특혜도 받을 수 없어.”

과연 네가 할 수 있겠냐? 란 물음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수 있습니다.”

“...!”

황제는 잠시 말없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무언가 고민이 있을 때 나타나는 그의 버릇이었다.

“이거 곤란하군. 짐은 오늘 영애를 꼭 태자의 비로 받아들이고 싶어졌는데. 갑자기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니. 그렇다고 농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곤란해.”

엘리제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고개만 숙였다.

“영애는 왜 갑자기 의사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한 건가?”

그 말에 그녀는 먼 과거를 떠올렸다.

지구에서 의사가 되기로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첫 번째 삶 때 못난 삶을 살았던 그녀는 지구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의사가 된 후, 그 일에 푹 빠져버렸다. 중독돼 버렸다.

“허허, 사람을 살리고 싶다, 라.”

황제는 그녀의 답에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뭐가 죄송하나. 가치 있고, 숭고한 일인데. 허허.”

황제는 연신 헛웃음만 흘렸다.

만약 다른 귀족 가문의 여식이 이런 말을 했다면 분명 기특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태자와 결혼을 생각하던 클로랜스 영애가 이러다니.

결국,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영애.”

“네, 폐하.”

“짐이 만약 태자와의 약혼을 명하면, 싫더라도 따라야 하는 것은 알고 있겠지?”

“...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짐은 영애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고 싶진 않아. 왜인지 아나?”

“... ... .”

엘리제는 답을 짐작하면서도 답하지 못했다.

“내가 영애를 정말 조카처럼 아끼기 때문이야. 영애를 진심으로 아끼기 때문에, 가족으로 맞으려 했었고, 또 원하지 않는 바를 억지로 시키고 싶지도 않아.”

“...!”

그 말에, 그 목소리에 담긴 따스함에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지난 삶 때도 저랬다.

민체스터 황제는 못난 자신을 한결같은 애정으로 바라봐주었다. 마치 조카... 아니, 친딸을 대하듯.

“그러니 이렇게 하지.”

“??”

“우리 내기를 하도록 하게.”

내기?

“어쩌면 영애에게 조금은 불리한 내기일지도 모르겠네.”

엘리제의 의아한 시선에 황제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 전혀 뜻밖의 말을 하였다.

들어보니 ‘조금’ 불리한 내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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