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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2화 (12/194)

00012  1-2 불공평한 내기  =========================================================================

“시간을 줄 테니, 증명해보게. 의사로서의 가치를. 정확히 말하면 황태자비, 후에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내면, 그러면 내 영애를 군말 없이 놔주겠네.”

“...!!”

엘리제는 놀라 황제를 바라봤다.

민체스터 황제는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못해낸다면, 그땐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거야. 어떤가?”

“기한은 어떠합니까?”

“영애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 이상은 예법상 더 기다려줄 수 없네.”

"...!"

그녀는 황제의 속뜻을 깨달았다.

성년이면, 내년 성인식. 즉, 6개월 정도밖에 안 남았다.

‘6개월 안에 의사로서의 가치를 증명해보라니.’

불가능한 조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내기였다.

'내가 지레 포기하거나 내기에 져서 황태자비가 되길 바라시는구나.'

이 정도면 사실 내기라기보단 그냥 의학의 길에 잠시 발만 담가보고 마음 정리한 후 다시 돌아오란 뜻이었다.

더구나 황제는 '의사로서의 가치', 라고 말했다. 가능성을 뜻하는 '자질'이 아니라.

정치가인 황제답게 굉장히 여러 의미가 담긴 표현이었는데, '의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일단 의사가 먼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6개월 안에 의사가 되어 뜻있는 일을 해내라니.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이건 내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무조건 그녀가 지는 내기였다. 아니, 너무 말도 안 되게 불공정해 내기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를 반드시 황태자비로 맞아들이겠다는, 대충 체험 학습만 해보고 돌아오라는 황제의 강한 의중이 느껴진다랄까?

“역시 힘들겠지?”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무조건 그녀가 지는 내기였지만.

엘리제는 선선히 답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폐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

그 주저없는 답에 황제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는 엘리제가 의사가 되는 과정을 잘 몰라, 내기에 순순히 응했다 생각했다.

현 제국에서 의사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다.

병원에 도제로 들어가 험한 과정을 통해 일을 배우며, 교수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후, 국가 공인 시험을 통과하는 것.

하나,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의술은 책에서 보는 것처럼 고상한 일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온갖 질병도 마주해야 한다.

과연 곱게만 자란 영애가 그 험한 길을 견딜 수 있을까?

‘남자도 버티기 힘든 과정이니까. 금방 포기하겠지.’

그는 엘리제의 인형 같은 얼굴을 바라봤다.

피는커녕, 손가에 물 한번 묻히지 않았을 것 같은 외모.

그 험한 일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6개월이란 기한을 두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을 살리고 싶다, 라. 참 기특한 마음이지 않은가?’

황제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 엘리제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안주인이 될 황태자비는 저런 마음을 가진 이가 되어야 했다.

‘만약 태자와의 결혼만 아니었다면 오히려 응원해주었겠지만.’

이미 황제는 그녀를 황태자비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는 엘리제가 병원 생활을 경험한 후 마음을 정리하는 걸 느긋이 기다리기로 했다.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험한 일들은 곱게 자란 귀족가의 여식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황제와 엘리제의 내기가 성립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무조건 엘리제가 패할 수밖에 없는 내기였다.

겉으로 보기엔 말이다.

***

약혼에 대한 길고 긴 대화가 끝난 후, 일상적인 대화로 돌아갔다.

약혼 이야기를 하느라 많은 심력을 소모한 엘리제는 다소곳이 앉아 묻는 말에만 대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황제가 이렇게 말했다.

"이런, 그러고 보니 둘이 만난 지도 오랜만일 텐데. 늙은이들이 눈치 없이 잡고만 있었군."

"네?"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를 못 한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곧 태자와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라곤 깨닫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폐하. 괜찮..."

하지만 황제는 태자에게 입을 열었다.

"태자, 영애와 정원이라도 한 바퀴 걷고 오너라. 그렇지 않아도 후작과 따로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엘리제는 곤란한 마음이 들었으나, 태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원치 않게 황태자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쪽으로 오도록."

"네, 전하."

황태자의 무뚝뚝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불편해.'

이전 삶,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것도 열렬히. 세상 그 무엇보다도.

조각 같은 외모부터 무뚝뚝한 성격까지, 그의 털끝 하나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의 모든 것을 열망했다.

세상에서 오로지 그밖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다 옛날 일이지.'

엘리제는 그의 옆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이전 삶에선 그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신기할 정도로 덤덤했다.

그저 이혼한 전 남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하긴 지난 세월이 몇 년인데. 좋게 헤어졌던 것도 아니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자신을 경멸하듯 내려보고 있었고, 곧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졌었다.

두 번의 삶이 지났음에도 잊히지 않는 그 섬뜩함에 엘리제는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아... 아닙니다."

그가 힐끗 바라보자, 엘리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불편해.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빨리 저택으로 돌아갔으면.'

자신을 사형시킨 그에게 특별한 유감은 없다.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도 일종의 희생자이지. 원하지 않는 나와 결혼해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불편하면서도, 미안한?

'어차피 이제 개인적으로 다시 만날 일은 거의 없겠지.'

그녀는 황제와 내기를 떠올렸다.

반년 안에 의사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조건.

'폐하는 내가 지레 포기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조건을 걸었겠지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로.

아니, 포기는커녕...

'이 내기는 내가 이길 거야. 무조건.'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다.

물론 그녀에게도 6개월 만에 의사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것은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현대 지구가 아니니까.

여린 귀족 여식의 몸으로 의사가 되는 것에 제약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상관없어.'

그녀는 자신의 지식과 실력을 믿었다.

어떤 난관이 나타난다 해도, 뚫고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때, 황태자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엘리제."

"네?"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나?"

"아, 아닙니다."

엘리제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나 보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옛날 생각을 조금 했습니다."

"옛날 생각?"

"네."

엘리제는 그렇게만 답했다.

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린 후,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익숙한 그 무뚝뚝한 모습에 그녀는 문득 한가지 충동이 들었다.

이전부터... 그가 가끔 생각날 때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해도 괜찮을까?'

그녀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오래 고민하진 않았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다시 이렇게 개인적으로 마주할 기회도 없을 테니까.

"저... 전하."

"왜 그러지?"

"제가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도 좋다."

그 답에 엘리제는 걸음을 멈추어섰다.

"죄송했습니다."

"...??"

“정말 죄송했습니다. 정말로.”

지구에서 살며 가끔... 정말 가끔 그가 떠오른 적이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죽음을 내린 그를 떠올릴 때마다 수없이 많은 감정이 들었지만, 가장 큰 감정은 이것.

미안함이었다.

‘나 때문에 그도 불행했을 테니까.’

그래, 그를 사랑해서 자신도 불행했지만, 그도 불행했을 것이다. 원치 않은 여인과 살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했다면. 그도 다르지 않았을까.’

그에게 냉대를 받았지만,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그도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번쯤 진심으로 그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하지?”

“지금까지 모두 다요.”

“... ... .”

그는 알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급히 둘러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전하를 매우 귀찮게 했었잖아요. 제 철없는 고집 때문에 원치 않은 약혼 이야기도 나오고.”

‘약혼’이란 단어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가 그랬지?”

“네?”

“누가 원치 않는 약혼이라고 너한테 그랬지?”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전하께서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 ... .”

“어쨌든 이 약혼은 제가 책임지고 전하께 피해가 되지 않게 처리하겠습니다. 전하의 마음도 헤아리지 않고, 철없이 고집 피운 점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왠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엘리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를 쫓으며 엘리제는 생각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도 더 좋은 여인과 결혼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거야.’

그녀는 그의 등을 향해 축복을 빌어주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를 거예요. 우리 이번 삶에는 서로 각자 행복하게 살아요.’

같은 하늘 아래지만, 이제 그와 자신은 겹치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가 걸을 곳엔 자신이 없을 것이고, 자신의 옆엔 그가 없을 것이다.

‘축복받길. 과거 내가 정말 많이 사랑했던 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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