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도제 =========================================================================
브리티아 제국 행정부.
“뭐? 엘리제가?”
재상인 엘 후작의 작은 아들이자, 고위 관료인 크리스는 깜짝 놀라 물었다.
“아직도 도서관에 있다고?”
“네.”
도서관 사서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아침에 오셔서는 미동도 않고 책을 읽고 계십니다. 식사도 한 끼도 안 하셨는데... 저희가 불러도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안 하셔서...”
“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크리스는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자정에 가까웠다.
‘밥도 한 끼도 안 먹었다고? 그 아이가? 정말로?’
얼마 전 변한 뒤부터 밥은 꼭 잘 챙겨 먹는 엘리제였다. 그런데 밥도 안 먹고 이 시간까지 공부라니?
급히 일어나 옆 건물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향했다.
커다란 도서관은 텅텅 비어있었는데, 구석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인형 같은 얼굴.
조그만, 한 손에 안으면 으스러질 듯 여린 몸.
엘리제였다.
“리제!”
불렀으나 골똘히 책에 집중할 뿐 반응이 없었다.
결국, 어깨를 짚으며 크게 불렀다.
“엘리제!!!”
“꺄악!!!”
화들짝 놀란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오, 오라버니? 무, 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얼마나 놀랐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무슨 일이라니. 지금 몇 시인지 아니?"
"아... 벌써..."
그녀는 시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그는 엘리제 앞에 놓인 산더미 같은 책들을 바라보았다.
-의약학 각론(Medicine and Pharmacy).
-생리학(Physiology).
-가우톤 해부학(Gauton anatomy).
-그라함 질병 총론(General disease of Graham)
-...
'저 책들을 공부했다고? 정말로?'
딱 봐도 어려워 보이는, 의학 전공 서적들이다.
책이라곤 로맨스 소설도 잘 안 읽던 동생이 저 서적들을 공부했다고?
"리제."
"네?"
"이 책들... 잘 이해되니?"
"아..."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깨달은 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친 오해를 피하려고 둘러대듯 답했다.
"어렵긴 한데, 그냥 열심히 봤어요."
'그냥 봤다고?'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녀가 노트에 한 필기를 힐끗 바라봤다.
'그냥 대충 본 수준의 필기가 아닌데?'
의학 지식이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알아볼 수 없지만, 꼼꼼히 그리고 핵심을 꿰뚫는 필기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해놓은 필기인가?’
하지만 저 삐뚤삐뚤 못난 글씨는 엘리제의 필체가 분명했다.
예쁜 외모와 다르게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 글씨는 어릴 적부터 엘리제의 전매특허였으니까.
'이전부터 남몰래 의학을 공부했던 건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 아니면 내 동생이 알고 보니 천재?'
크리스는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원래 클로랜스 가문은 우수한 혈통으로 유명했다.
자신만 해도 아카데미 문과부 수석 졸업자에, 아버지는 제국의 명재상, 큰형은 총기사단(Rifle Knightage)의 부단장이자, 제국의 수위를 다투는 오러 나이츠(aura knight)였으니까.
그러니 엘리제에게도 숨겨진 재능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건 너무 급작스럽지 않은가?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엘리제.”
크리스는 당황을 감추며 장난스레 말했다.
“여전히 글씨를 잘 못 쓰는구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청못난 여자가 쓴 줄 알겠는걸?”
“오, 오라버니!”
엘리제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첫 번째 삶도, 두 번째 삶도,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항상 지독한 악필이었다.
“어쨌든 리제, 이제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자."
"아..."
그런데 그녀가 의외의 답을 하였다.
"저... 오라버니. 조금만 더 공부하다가 가면 안 될까요?"
"조금 더? 지금 자정인데?"
"그렇긴 한데... 어차피 24시간 개방 도서관이고... 더 보고 싶은 내용이 남아 있어서."
엘리제가 우물쭈물 부탁했다.
마치 '좀 더 놀다 가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
"안 돼."
"안 돼요?"
"안 돼. 너무 늦었어."
"응? 응? 정말 안 돼요? 응? 오라버니."
엘리제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렸다.
'귀, 귀엽잖아!'
간만에 보는 동생의 애교에 크리스는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안 돼. 밥도 안 먹고. 이러다 몸 상한단다."
"괜찮은데..."
엘리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도 심히 귀여워, 크리스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트렸다.
"안 되는 것은 안돼. 내일 다시 같이 오자."
***
그렇게 엘리제는 공부에 매진했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가 자정까지 책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도 대출한 서적을 공부했다.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집중하는 모습에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리제, 좀 쉬엄쉬엄 하렴. 그러다 몸 상한다니까."
가족들이 걱정했으나,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병원에 나가기 전, 필요한 지식은 다 정리해야 해.'
그녀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환자를 보는 일이다.
한치의 소홀함도 있어선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벼락치기 공부는 지구에서 질리도록 했었으니. 익숙해.'
서울대 의대 재학 시절엔 매일이 시험 전쟁이었다.
하루 밤샘은 예사였고, 심할 때는 72시간 동안 딱 2시간만 자고 공부한 적도 있었으니, 이 정도야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기준이었고, 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크흠, 엘리제.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
엘 후작이 헛기침하며 그녀를 찾아왔다.
"괜찮아요, 아버지."
"뭐가 괜찮아. 몸도 약한 편이면서."
특별히 앓는 병은 없었지만, 여린 체구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었다.
엘 후작은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
"네, 아버지."
"정말 할 수 있겠느냐?"
그는 걱정스레 물었다.
이제 그도 딸이 의사가 되려는 게 한순간의 변덕이 아닌 진심인 것을 알았다.
진심이 아니라면, 이렇게 열심히 할 리가 없을 테니까.
'의사라. 좋은 직업이지. 가치 있는 일이고. 하지만...'
의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장한 남자들도 못 버티는데, 손에 물 한번 안 묻혀본 그녀가 견딜 수 있을까?
더구나 여자라서 일어나는 차별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황실 십자 병원도 아닌, 테레사 병원이라니.'
솔직히 후작은 딸을 테레사 병원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환경이 열악해 고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잘할 수 있어요, 아버지. 최선을 다해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후작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엘리제, 혹시 태자 전하와 약혼을 피하려고 무리하는 것은 아니지? 만약 그런 거면 이야기하렴. 네가 정말로 전하와 결혼을 피하고 싶다면, 이번 일과 상관없이 내가 폐하께 잘 이야기해보마."
"...!"
그녀는 흠칫 놀라 후작을 바라봤다.
아버지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아버지... .'
자신을 향한 걱정과 사랑에 그녀의 가슴이 일렁였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전 정말로 이 일이 하고 싶어요."
딸의 의지가 확고함을 다시 확인한 후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폐하의 생각처럼 엘리제가 빨리 포기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겠군.'
딸을 사랑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것일 뿐.
그저 후작은 그녀가 너무 고생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일단 병원 측에 네가 이틀 후부터 나간다고 이야기해두었다."
"제 부탁대로 해주신 거죠?"
"그래,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겠니?"
"네, 제가 클로랜스 가문인 것은 안 알려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부탁.
그것은 자신의 신분을 숨겨달라는 것이었다.
"일단 그렇게 하긴 했다만,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냐? 훨씬 힘들고 불편할 텐데."
"제가 아버지의 딸인 것을 알면, 제대로 교육이 안 될 테니까요."
엘리제는 이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교수로 일할 때를 떠올렸다.
VIP의 자식이 학생으로 오면 어찌나 눈치가 보이며 짜증이 나던지.
'더구나 아버지는 그냥 VIP 정도가 아니잖아.'
황제에게 신임받는 재상에, 명실상부한 제국의 이인자.
또한, 최고 명문가 클로랜스 가문의 가주이며, 테레사 병원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지구의 한국으로 따지면 재벌가 총수에 국무총리 겸업, 병원의 이사장인 거잖아.’
그런 정체를 알면, 병원의 의사들이 과연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편히 말이나 붙일 수 있을까?
"일단 너는 케이트 자작의 후원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말해두었다."
케이트 자작은 클로랜스 후작가의 가신(家臣)이었다.
"네, 감사해요."
"엘리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말아라."
그 깊은 걱정에 엘리제는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이틀이 지나 엘리제가 처음 병원에 가는 날이 되었다.
제국력 283년 5월 28일.
훗날, 세계 의학사(醫學史)에 기념비적으로 남을 날짜였다.
***
테레사 병원은 기다란 사각형 형태의 4층 건물로 무려 300명의 환자를 수용 가능한 제국 최대 규모의 의료 기관이었다.
물론 제국 최대란 것은 규모적 측면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여러 환경에서 열악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 그 병원 4층 구석의 교수실.
‘젠장.’
이십 대 중반의 젊은 남자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나 그레이엄에게 16살 철부지 꼬맹이를 맡으라고?’
남자의 이름은 그레이엄.
몰락한 팰론 남작가의 장자이자, 테레사 병원의 최연소 정식 교수인 천재 의사였다.
그가 불쾌해하는 이유는 하나.
며칠 전 떨어진 병원장의 명령 때문이었다.
‘케이트 자작이 후견하는 영애를 맡으라니. 영애는 무슨 놈의 영애야. 병원이 무슨 무도회장 놀이터인 줄 아나?’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연구로 바쁜데. 쓸데없는 짐까지 떠맡으라니.’
몰락 가문 출신인 그는 의학에 자신의 모든 삶을 걸었다. 의학의 기초를 다진 그라함 백작을 능가하는 의사가 되고 싶건만,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게 다 내 배경이 보잘것없어서 그래.’
아무리 능력이 있으면 뭐하는가?
좋은 자리와 일거리는 배경 좋은 놈들이 다 가져가고, 자신에게는 쓰레기 같은 부스러기밖에 안 떨어지는데.
‘이제 곧 온다고?’
그는 시계를 바라봤다.
오전 10시에 오기로 했는데, 9시 57분이었다.
‘1분이라도 늦기만 해봐라. 바로 쫓아내 주마.’
그리곤 그는 시계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자신의 새로운 ‘제자’가 제발 늦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불행히도, 침이 10시를 가리킬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치 밖에서 회중시계를 보며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정확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