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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5화 (1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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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노크 소리에 그레이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끼익.

낡은 소음과 함께 그녀가 들어왔다.

“...!”

그리고.

그레이엄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상의 소녀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제라고 합니다.”

작고 여렸다.

그러면서도 마치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수수한 생활복을 입고 있었지만, 연회장의 수많은 보석 중에서도 가장 반짝이는 듯한 외모.

그녀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방의 분위기가 변한 듯했다.

“네가... 케이트 자작께서 추천한 로제라고?”

“네, 그레이엄 선생님이신가요?”

차분하면서도 호감 가는 음색.

그레이엄은 얼른 정신을 차려 그녀의 미색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내가 그레이엄이다. 의사가 되려고 한다고?”

“네, 많은 지도 부탁합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레이엄은 인상을 찌푸렸다.

‘예쁘게 생기긴 했다만. 전형적인 귀족 집 아가씨잖아.’

몰락하기 전, 한때 귀족 사회에 일원이었던 그는 저런 유의 영애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험한 일은 전혀 안 해본 듯한 인상. 하얀 손은 물집 하나 없이 깨끗하다.

치장 후 연회장에 나서면 무수히 많은 남자가 따르겠지만, 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몸으로 의사가 되겠다고?

그레이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기가 차는군.’

확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 그리 우스워 보이나?’

각고의 노력 끝에 의사가 된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의업에 깊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곱게 자란 아가씨가 흥미로 병원에 나왔다고 생각하니, 짜증을 참기 어려웠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나이는 아닌데, 아카데미는 다녔나?”

“아카데미는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무슨 공부를 했지? 설마 아무런 공부도 안 하고 무턱대고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병원에 들어오기 전, 보통은 아카데미 등에서 기초를 쌓는다.

기초를 쌓은 후, 유력자의 추천을 통해 병원에 제자로 들어오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다.

“독학으로 의학 서적을 공부했습니다.”

“독학? 하.”

그레이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의술이 우스워 보여도 그렇지, 16살짜리 소녀가 독학으로 깨작 책을 본 후, 병원에 들어와?

‘아무리 제국 제일의 명문 클로랜스 후작가의 봉신인 케이트 자작이라도 그렇지. 너무 하는군.’

그는 당장 병원에서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케이트 자작께서 추천한 것만 아니면, 당장 쫓아낼 텐데. 제길.’

케이트 자작은 제국의 유력자로 척을 지면 곤란하다. 자신 같은 힘없는 의사는 당장 쫓겨날지도 몰랐다.

“의술이 뭔지는 아나?”

“네, 압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묻지.”

그레이엄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있나?”

“... ... .”

그런데 그 질문을 들은 다음이었다.

소녀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16살 소녀와 어울리지 않는, 깊은 무거움이 담긴 눈빛.

소녀는 가만히 답했다.

“네, 본 적 있습니다.”

그레이엄은 소녀의 그 알 수 없는 눈빛에 흠칫 놀랐다.

뭐야, 저 눈빛은?

“의술을 배우다 보면, 많은 상황을 만난다. 만약 치료하던 중, 환자가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지?”

소녀는 고민 없이 담담히 답했다.

“가슴에 묻을 것입니다.”

“...!!!”

그레이엄은 입을 다물었다.

‘가슴에 묻는다고? 무슨 뜻인지 알고는 하는 이야기인가?’

의사들 사이에서 ‘환자를 가슴에 묻는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불의의 일로 환자를 잃었을 때, 다시 그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환자를 가슴 속에 묻는 것이다.

‘설마.’

그는 이 소녀가 그 의미를 알고 그렇게 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슷한 아픔을 경험하지 않은 의사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의 뜻을 알 리가 없으니까.

‘일단 케이트 자작께서 추천했으니, 일거리를 주긴 줘야겠는데.’

그는 고민했다.

원래는 일일이 데리고 다니며, 제자처럼 가르쳐야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진짜 키울만한 제자도 아니고.

‘어차피 못 버티고 금방 나갈 테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쓸데없는 심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는 곧 한 가지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그래, 그곳이면 되겠군.’

저 여린 소녀에게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만둘 거면 빨리 그만두게 하는 것이 저 아이를 위한 것일 테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와라. 할 일을 알려주마.”

***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테레사 병원 3층 깊숙한 곳, 메케한 냄새가 나는 병실이었다.

“여기가 이제부터 네가 일할 곳이다.”

병실 문을 열자 드러난 장면은 가관이었다.

“...!!”

삐쩍 마른, 관리 안 된 환자들.

지독한 악취, 더러운 몰골.

모두 부랑자 같은 행색들이었는데, 하나같이 거동이 불가능한 중환자들이었다.

“이 환자들은?”

그레이엄이 답했다.

“유리걸식하는 부랑자들이다. 부랑자 중 중한 질환에 걸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자들을 이곳에서 치료하고 있다.”

“... ... .”

“사실 저런 자들을 치료할 필요는 없지만, 클로랜스 가문의 전(前) 후작 부인, 테레사 여사의 유언에 따라 돌보고 있지. 치료비는 모두 클로랜스 후작가의 후원으로 감당하고 있고.”

그레이엄은 클로랜스 후작가에 대해 존경이 담긴 말투로 설명했다.

“이 테레사 병원의 운영은 대부분 클로랜스 후작가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너도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클로랜스 가문에 대한 존경을 담고 일하도록.”

그 존경 받는 클로랜스 가문의 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쨌든 네가 이제부터 할 일은 이 환자들을 돌보는 거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가 부랑자들의 몰골을 보고 질색인 얼굴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확히 어떤 부분을 케어(care)해야 하는 것인가요?”

소녀의 안색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흐릿한 안쓰러움이 담긴?

그레이엄이 놀라는데, 소녀가 물었다.

“환자들의 기저 질환을 모두 치료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저 환자가 편할 수 있도록 보존적 치료(conservative management)를 하면 되는 건가요?”

"...!!!"

마치 동료 의사가 묻듯, 핵심을 꿰뚫는 질문.

그레이엄은 흠칫했다.

“...보존적 치료만 하면 된다. 기저 질환을 치료하는 게 의미가 없는 환자들이니까. 그러니까... 욕창(pressure sore) 같은 것들을 관리해주면 된다.”

그는 그녀가 욕창이란 단어를 알아들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답변은 더 가관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욕창의 정도가 심하거나 괴사 징후(necrotic change)를 보이면 제가 관리를 해도 될까요?”

“...!”

그레이엄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관리? 설마 변연절제술(debridemnt)을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상처가 죽었을 때의 치료 원칙은 간단한 수술로 조직을 잘라내는 것(debridement)이다. 잘라내지 않으면 감염이 악화해 패혈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설마. 아니겠지.’

속으로 고개를 저은 그는 답했다.

"할 수 있는 만큼 관리를 해도 좋다. 하지만 잘 모르는데 섣불리 건들진 말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는 몇 가지 더 지시사항을 알려주었다.

그러고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기 전 말했다.

“로제, 라고 했나?”

“네, 선생님.”

“만약 중간에라도 힘들면 곧바로 이야기해라. 억지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그녀는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힘들면 바로 그만두라는 뜻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그레이엄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버틸까?’

이곳에 오고 나서 그녀가 보인 태도는 의외긴 했다.

환자들의 몰골을 보고 하얗게 질려 당장 그만둔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제법 의연했으니까.

그래도 오래 버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병실은 남자인 그도 처음에 왔을 때 적응 못 하고 도망칠 뻔했던 곳이니까.

‘며칠 안 걸리겠지.’

그는 그렇게 짐작했다.

***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환자들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다소곳이 아무 말 안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레이엄의 속마음을 다 눈치채고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내가 귀찮겠지.’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두 번의 죽음을 경험했고, 두 번 다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그레이엄의 속마음은 훤히 드러나 보였다.

‘이런 곳에 방치해서 제풀에 내가 포기하도록 하려는 걸 거야.’

하지만 그녀는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아니, 고작 이런 걸로 왜 포기한단 말인가?

‘이런 부랑 환자들은 익숙한걸.’

태연히 환자들을 살폈다.

물론 그녀도 나름 여자인 만큼 악취와 더러운 모습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환자가 아닌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지구에서도 이런 부랑 환자들을 많이 돌봤었다.

모교인 서울대 의대가 국립대학교인지라 부랑 환자를 돌보는 시립 병원에서도 순환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자를 보다 보면, 별의별 험한 모습을 다 봐야 하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처음엔 피만 봐도 벌벌 떨다가, 나중엔 두 조각 난 내장을 수술하고도 태연히 순대를 먹으러 간다.

‘최대한 열심히 해서 일단 빨리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자.’

그녀의 첫 번째 목적은 정식 의사가 되는 것!

그리고 제국에서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의학 연구원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시험을 응시하려면 먼저 병원에서 추천을 받아야 한다.

보통은 수년씩 병원에서 도제로 일하며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황제 폐하와의 내기에 이기려면, 빠른 시간 안에 의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필수였다.

그녀는 최대한 단기간에 의사 자격증을 따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시작하자.’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

엘리제는 먼저 주변 위생을 개선했다.

‘이런 환경에선 없는 질병도 생길 거야.’

수북한 먼지들을 쓸고, 오물들을 정리하고, 환자의 몸을 씻겼다.

후작가의 금지옥엽이 하기엔 너무나 궂은 일.

아니, 비단 후작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들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소녀가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일했다.

‘더 힘든 일도 많이 해봤는걸.’

처음 해부학 실습을 할 때를 떠올렸다.

포르말린에 딱딱히 굳은 수십 구의 시체들.

첫날. 그 시체들의 피부를 메스로 벗겨 내고, 노란 지방을 긁은 후, 근육을 박리했다.

얼마나 끔찍하던지.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의대에 온 것을 그때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날의 일뿐이 아니었다.

의사가 될 때까지, 그리고 의사가 되고 나서도 험한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때의 일들에 비하면... 이런 일은 차라리 나은 편이니까.’

물론 그 일들을 혼자 하지는 않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으니까. 굳이 혼자서 할 필요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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