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도제 =========================================================================
그녀는 이 병실을 담당하는 보조원들을 찾았다.
“청소와 환자 목욕을 도와달라고요?”
“네.”
“하지만... 어째서?”
“병실 위생이 너무 안 좋아 환자들에게 안 좋을 것 같아서요.”
보조원들은 병원이 고용한 중년 여성 2명이었다.
그녀들은 엘리제의 요청에 머뭇거렸다.
분명 청소와 환자 목욕은 보조원들의 몫이긴 했으나, 아무도 이 부랑자들을 신경 쓰지 않아 대충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가씨는?”
“로제입니다. 그레이엄 선생님의 도제로 들어왔습니다.”
제국의 병원에서 도제면 보통 견습생의 대우를 받았으니 보조원들보다는 확실히 윗사람이다.
보조원들은 엘리제를 살폈다.
수수한 옷을 입고 있지만, 한눈에 보아도 있는 집안의 영애 같아 보였다.
그녀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엘리제는 그녀들과 남은 일을 처리했다.
더러운 걸 치우고, 열심히 쓸고, 닦고, 환자들을 목욕시키고.
병실이 깨끗해지면 깨끗해질수록, 엘리제의 몸은 반비례해서 더럽혀졌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야 끝나고 씻으면 되니까.’
지구의 지식이 있는 그녀는 위생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지구의 위인 나이팅게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위생을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한다.
‘어쩌면 약물치료나, 수술보다도 훨씬 손쉽게 사망률을 낮출 수 있는 게 위생 관리야.’
청소만으로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니! 어찌 공을 안 들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한참 일에 열심일 때였다.
소극적으로 뭉그적거리던 보조원이 말했다.
“저... 아가씨. 그건 저희가 할게요.”
“네?”
“이건 원래 저희 일이니까...”
그녀들은 민망한 표정이었다.
처음엔 억지로 따라온 그녀들이었지만, 엘리제의 열심을 보며 가책을 느낀 것이다.
저렇게 어리고, 가냘파 보이는 소녀가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부랑자들을 위해 궂은일을 하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엘리제는 기쁘게 웃으며 답했다.
“네, 감사해요. 같이해요.”
그렇게 3명이 함께 일하니,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일도 끝이 났다.
부랑자들의 병실이 이전의 모습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깨끗해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랑자들이 엘리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병원이지만, 회복되기 어려운 중한 질환을 앓는 부랑자들이다 보니 거의 방치되고 있었다.
그런데 한눈에 봐도 귀한 집안의 아가씨로 보이는 그녀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자신들을 위해 이런 일들을 해주다니! 다들 크게 감동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친절히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위생 관리는 기초적인 조처일 뿐이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환자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환자분 어떤 것이 불편하세요?”
“나는 허리가...”
그녀는 병실을 돌아다니며 모든 부랑자의 상태를 한 명, 한 명씩 꼼꼼히 체크했다.
‘이 환자는 추락 사고로 인한 허리 골절 환자. 골절은 이미 치료할 수 없어. 그러면 지금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인은... 영양 상태 개선. 욕창 소독.’
그녀는 개선이 가능한 요인과 불가능한 요인을 구분하여 체크했다.
그리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은 최선을 다해 조처했다.
“욕창 소독을 해야 하니 약제부에서 소독약을 가져와 주세요.”
“네, 아가씨.”
“상태가 안 좋은 분들이 많아 넉넉히 가져와 주세요. 마취약과 소독된 칼도 가져와 주시고요.”
“칼은 왜요?”
작은 소녀가 칼을 가져와 달라 하자, 보조원이 놀라 물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태연히 말했다.
“죽은 조직을 쳐내려고요. 피가 많이 날 수도 있으니 거즈도 넉넉히 가져와 주세요.”
“아, 아가씨가 하시게요? 직접? 칼로요?”
칼로 살을 잘라낸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보조원이 핼쑥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 할 거예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삶에서 이식 수술도 집도하던 그녀다.
그녀 기준에 죽은 조직을 제거하는 것은 너무 간단해 수술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보조원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소독약과 마취약, 소독된 칼을 가져왔다.
“여, 여기요.”
“환자 자세 좀 잡아주세요.”
“지, 지금 여기서 하시게요?”
“네, 상처가 너무 안 좋아 지금 바로 해야 해요.”
엘리제는 허리가 마비된 부랑자의 욕창 상처를 살피며 말했다.
그녀는 장갑을 끼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처치를 했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외과의사 송지현’의 기준에선 간단한 수술이지만, 자신은 오늘 처음 병원에 들어온 견습생이다. 주제넘은 처치를 했다고 문책을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위험한 수술도 아니고. 그리고 이대로 두면 상태가 너무 나빠질 거야.’
관리받지 못해 감염의 정도가 심했다. 상처 안으로 누런 염증이 차오른 것이, 이대로 며칠 두면 패혈증(sepsis)이 올지도 몰랐다. 빨리 손을 써야 했다.
“환자분, 여기 안 좋은 상처를 소독하고 곪은 부분을 쨀 거예요. 마취하고 할 테니 아프진 않을 거예요.”
“네, 네.”
그녀는 먼저 환자를 부드러운 말로 안심시켰다.
그리고 엎드리게 자세를 잡은 후 ‘변연절제술(debridement)'을 시작했다.
“마취약 먼저 주세요.”
그런데 소독 장갑을 낀 손으로 마취하는 그녀의 머리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대 연금술사 프레밍은 어떻게 이런 약들을 다 개발했을까?’
지금 그녀가 사용하는 마취약도, 소독약도 모두 프레밍이 발명해낸 것이다.
그것 외에도 그가 개발한 약은 무수히 많았다.
‘아무리 천재라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리고 마취약, 소독약만 개발한 것이 아니잖아. 혹시 프레밍도 나처럼 지구의 삶을 경험한 이는 아니겠지?’
그런 의심까지 들었다.
그만큼 프레밍의 업적은 대단했다.
물론 지구의 현대 약들에 비하면 그가 발명한 약품들은 매우 조악했다.
그래도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기초적인 약들을 다 발명해냈으니.
아무리 연금술의 힘을 빌렸다지만, 한 사람의 업적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한번 만나보고 싶지만... 이미 사망한 지 5년이나 됐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환자분, 혹시 아프세요?”
“아... 아, 안 아픕니다.”
그녀는 완전히 마취된 것을 확인 후 절제술을 척척 진행했다.
“소독약 주세요.”
먼저 진물이 흐르는 상처를 약으로 철저히 소독했다.
그냥 단순히 소독약을 묻히는 수준이 아닌, 상처 사이사이로 약이 스며들 수 있도록 꼼꼼히 처리했다.
그리고.
“칼 주세요.”
“지, 진짜 직접 하시게요?”
보조원이 그녀에게 물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짧지만 단호한 대답.
보조원은 하얗게 변한 얼굴로 소독 칼을 건넸다.
“... ... .”
엘리제는 잠시 말없이 소독 칼을 바라봤다.
‘메스.’
두근.
원시적 형태의 메스(수술칼)이었다.
오랜만에 잡는 그 메스에 가슴이 진동했다.
‘외과의사가 된 후, 이 메스를 놓았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녀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그리웠었나 보다. 이 메스의 감촉이.
이렇게나 가슴이 떨리는 것을 보니.
‘황태자비 따위 절대 되지 않아. 이게 내 운명이야. 평생 의사의 삶을 살겠어.’
그녀는 수술칼을 쭉 내리그었다.
죽은 살들이 정확한 경계를 이루며 떨어져 나가며 피가 울컥 새어나왔다.
“앗!”
지켜보던 보조원들이 비명을 삼켰다.
하지만 엘리제는 털끝 하나의 동요도 없이 손을 움직였다. 피가 나오는 혈관을 거즈로 지혈하며, 감염된 부분을 칼로 쳐냈다.
그런 그녀의 눈은 ‘후작가의 공녀 엘리제’가 아닌, ‘외과의사’의 것이었다.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철혈의 눈빛!
여리디여린, 인형 같은 얼굴에 깃든 그 철혈의 눈빛은 지극히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모순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어떻게 저렇게...?”
보조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의료인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오래 일한 덕에 수술 장면을 여러 번 본 적 있는 그녀들은 지금 엘리제의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봤다.
‘정식 의사 선생님들도 저렇게 수술칼을 잘 다루진 못하던데?’
그녀들은 테레사 병원의 어떤 의사도 저 소녀처럼 수술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장인과도 같은 솜씨였다.
뚝!
마지막 죽은 조직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수술이 끝난 상처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해진 상태였다.
“다 끝났어요, 환자분.”
거즈로 마무리하며 엘리제는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이전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환자는 감격해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친절히 답했다.
“앞으로도 잘 관리해야 해요. 불편한 것 있으며 말씀 주세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 그녀는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보조원들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다음 환자 상처 처치도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 네, 네!!”
그녀들은 화들짝 엘리제의 말에 따랐다.
그렇게 엘리제는 부랑자 병실의 환자들을 한 명, 한 명 치료해나갔다.
***
그렇게 일주일간의 시간이 지났다.
테레사 병원의 젊은 교수 그레이엄 남작은 한창 자신의 연구에 몰두 중에 병원장의 호출을 받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케이트 자작이 추천하신 영애는 어떻게, 잘하고 있나?”
“... ... .”
그레이엄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 어떻게 하고 있지?’
부랑자 병실에 배치한 후, 신경 안 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까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왜 아무런 이야기가 없지? 그냥 말없이 그만둔 건가?’
당연히 하루, 이틀 안에 자신을 찾아와 그만둔다고 할 줄 알았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부랑자들에게 놀라 인사도 못 하고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왜 대답이 없나? 자네를 안 찾아왔나?”
병원장, 고트 자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아닙니다. 그...”
그레이엄은 말을 더듬었다.
“... 자율학습 중입니다.”
“자율학습?”
“...네. 분위기도 익힐 겸 병원에서 자율학습하도록 했습니다.”
그의 어설픈 둘러댐에 대충 상황을 눈치챈 병원장은 언성을 높였다.
“그레이엄! 자네 그런 식으로 할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케이트 자작이 추천한 영애야!”
“죄, 죄송합니다.”
케이트 자작.
이 병원의 소유자이자 재상인 클로랜스 후작의 봉신으로 상당한 위세의 귀족이었다.
“가서 똑바로 해!”
“네, 죄송합니다.”
그레이엄은 한참을 머리를 조아린 후에 병원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그 아가씨까지 데리고 다니며 교육해야 한다고? 그렇게 중요한 아가씨면 본인이 직접 가르치던가!’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몰락 가문 출신의 힘없는 말단 의사일 뿐이다. 시키면 해야 한다.
‘아직 있을지나 모르겠네. 벌써 도망갔을 것 같은데.’
그는 부랑자 병실로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