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도제 =========================================================================
그런데 부랑자 병실에 도착한 그는 병실의 변한 모습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지, 이게? 내가 병실을 잘못 온 건가?’
그는 문의 명패를 살폈다.
분명 제대로 온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모습은?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지?’
일단 병실이 깨끗해졌다.
이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제국 최고의 의료기관이라는 황실 십자 병원의 병실의 위생 상태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환자들의 상태!
단순히 깔끔해진 것만이 아니다.
분명 일주일 전에 봤을 때만 해도, 다들 희망없이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씩 눈가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로제.
형식상 그의 제자로 들어온 그 어린 소녀가 병실 구석의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용케 여태까지 안 도망갔었군. 그런데 왜 여기서 졸고 있지?’
그는 왜 병실이 변한 건지 그녀에게 물어보려 했다.
“너...”
그런데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딱딱한 소리가 말을 가로막았다.
“이봐, 의사 양반. 뭐하려고?”
“...?!”
병실의 부랑자 중 한 명이었다.
“저 소녀를 깨우려고? 관두시지.”
“뭐...?”
“어제 저 소녀는 우리를 돌보느라 한잠도 못 잤어. 이제 겨우 잠시 눈을 붙인 것이니, 나중에 다시 와.”
“...!!”
그레이엄은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이 무슨?
하지만 다른 부랑자도 나서서 말했다.
“그래, 무슨 중요한 용무인지는 몰라도 다음에 와. 저 아가씨는 좀 쉬어야 해.”
그레이엄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원래 부랑자들은 예의가 없고 의료진에게 적대적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것이야 당연하다 해도, 왜 저 소녀를 감싸는 거지?
어쩔 수 없이 나온 그레이엄은 병실을 담당하는 보조원들을 찾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보조원들에게 병실의 변화를 물어봤다.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모두 저 소녀가 한 일이라고?”
“네, 선생님. 레이디 로제는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보조원들은 소녀가 한 일들을 빠짐없이 말했다.
저 조그만 몸으로 더러운 병실을 정리하고, 환자들의 위생을 개선하고, 욕창을 소독하고...
“죽은 조직도 메스로 수술했다고?”
“네, 그뿐 아니라 어제는 안 좋은 환자까지 치료하셨어요. 한숨도 안 자고 옆에서 밤새도록요.”
보조원들의 목소리에는 심지어 존경마저 담겨있었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엘리제의 헌신과 노력에 깊이 감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조원들만이 아니었다.
병실의 부랑자들은 자신들을 위해주는 그녀를 거의 성녀 바라보듯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내가 너무 내버려뒀구나.’
그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환자를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책만 보고 조직 절제술을 혼자서 했다고? 겁도 없이. 그러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는 보조원들의 말을 다 믿지 않았다.
믿기에는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처음 교육 나온 소녀가 조직 절제술을 멋지게 시행하고, 상태가 안 좋은 환자를 치료해냈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분명 어설프게 잘못 건드려놨겠지. 안 건드니만 못하게. 잘못 치료하면 오히려 환자의 상태가 악화하는데.’
그는 소녀를 방치한 것을 후회했다.
학을 떼고 도망갈 줄 알았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사고를 쳐놨을 줄은 몰랐다.
‘다시는 겁 없이 이런 짓을 못 저지르게 단단히 혼내야겠군.’
환자는 실험 대상이 아니다.
어설픈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할 일이다.
‘한번 어떻게 해놨는지 가서 정확히 보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녀가 해놓은 어설픈 처치들을 확인 후, 조목조목 따지며 혼내기로 마음먹었다.
***
엘리제는 누군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깜빡 졸았나? 피곤해.’
머리가 무거웠다.
그녀는 흐릿한 시선을 고정하려 애쓰며 생각했다.
‘확실히 엘리제의 몸이 체력이 약하구나.’
이전 삶 외과의사 송지현으로 살 때는 체구가 작아도, 체력은 강했다. 몇 날을 밤새며 수술을 해도 거뜬했으니까.
하지만 이 엘리제의 몸은 원체 잔병치레가 많아서 그런지 체력이 형편없었다.
조금 무리했다고 이렇게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다니. 한숨이 나왔다.
‘정신 차리자.’
그런데 그때였다.
“환자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불쾌함이 가득한 목소리.
명목상 그녀의 선생, 그레이엄 남작이었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거리며 답했다.
“... 환자들의 불편한 점을 돌봤습니다.”
“그러니까 환자를 진료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변연절제술까지 하면서? 그러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엘리제는 그레이엄이 왜 화를 내는지 깨달았다.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견습생이 하기엔 자신의 처치들은 위험한 감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죄송함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도제로 들어온 견습생을 이렇게 팽개쳐둔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상처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 급하게 처치를 했습니다."
그레이엄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번 어떻게 해놨는지 보자.”
그러고 그녀가 변연절제술을 시행한 두 번째 침상 환자의 욕창을 확인했다.
그런데...
“...!!”
그레이엄은 흠칫 놀랐다.
‘뭐지? 왜 이렇게 상처가 좋아졌지?’
원체 욕창 감염이 심한 환자라 이전 상태를 알고 있었다.
‘거의 손도 못 댈 정도였는데? 어떻게?’
진물이나 농은 말끔히 없어지고, 심지어 깨끗한 새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바롯 경께서 왔다 가셨나?”
바롯 준남작은 테레사 병원에서 손꼽히는 수술 실력의 의사였다.
바롯 준남작 정도의 실력이면 이렇게 깔끔히 변연절제술을 해낼 수 있다.
하지만 보조원이 옆에서 말했다.
“레이디 로제께서 하신 거예요.”
“...!!!”
그레이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 저 소녀가?
그럴 리가?!
하지만 놀람은 끝이 아니었다.
“이 상처는 왜 이렇게 드레싱한 거지?”
깊은 욕창 상처 안에 소독약이 흠뻑 젖은 거즈가 들어가 있었다.
“중등도의 감염 상처라 소독약을 적시는 소킹 드레싱(soaking dressing)을 적용해보았습니다.”
거즈를 빼내 보니, 확연히 호전된 상처가 나타났다.
“...!! 그러면 이 환자의 수액은?”
“최근 설사가 심했습니다. 탈수를 막기 위해 수액을 주었습니다.”
다른 환자들도 모두 확인해보았지만, 전부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레이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 어린 소녀가 한 처치는 모두 한치의 틀림도 없었다.
아니, 틀림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했다.
각각의 환자들에게 필요한 치료가 빠짐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지?”
“네?”
“너 혼자 이렇게 해낼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분명 누군가 가르침을 주었을 터. 병원의 어떤 선생님이 도와주신 거냐?”
그래, 이 소녀가 혼자 한 것이 아닐 거다.
분명 누군가 와서 도움을...
“레이디 로제께서 전부 하신 거예요. 지난 일주일간, 이 병실에는 레이디 로제 말고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보조원이 말했다.
“...!!”
그레이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네가... 이런 치료들을 혼자 했다고? 어떻게?”
“... ... .”
엘리제는 주저했다.
환자들이 안 좋아 이리저리 치료하긴 했으나, 확실히 병원에 처음 나온 견습생이 해내기엔 과한 처치들이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하지만 딱히 설명할 말이 없어 조악한 거짓말을 했다.
“책에서 공부하고 했습니다.”
“이걸... 책에서 보고 했다고?”
믿지 못하겠단 얼굴.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뻔뻔해지기로 했다.
“네.”
그레이엄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아무리 열심히 책을 봤다고 해서... 이런 치료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의술은 경험이 중요하다.
책으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봤자, 실제 임상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제국 의사 시험 응시 자격을 병원에서 수련 후, 실력을 인정받은 이로 한정하는 것이다.
죽은 지식이 아닌, 임상 경험을 통해 진정한 의술을 갖춘 자만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소녀를 바라봤다.
다과회에서 우아하게 차 마시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저 소녀가 이런 치료를 해냈다고?
“혹시 잘못 치료한 점이 있을까요, 선생님?”
“어, 없다.”
“그러면 오늘 오신 것은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러 오신 건가요?”
그 말에 그레이엄은 첫 용건을 떠올렸다.
‘케이트 자작께서 추천한 영애니 잘 챙기라고 해서 온 거였지.’
병원장의 당부가 생각났다.
“로.. 제라고 했나?”
“네, 선생님.”
“그래, 로제. 이 병실을 담당하는 것은 오늘까지로 됐다.”
“그러면?”
“내일부터는 나를 따라다녀라.”
그레이엄은 설명을 덧붙였다.
“내일부터는 같이 다니며 직접 너를 가르치마.”
“...!”
둘의 관계는 스승과 도제(徒弟).
이제 그녀를 제자로 인정하고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한편 그레이엄은 복잡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한번 옆에서 잘 살펴봐야겠군. 같이 다녀보면 알겠지. 진짜인지, 아닌지.’
하지만 그때 그레이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아직 진정한 놀람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1-3 도제 fin>
<1-4 도제2 start>
며칠 뒤 브리티아 황실의 황궁.
황제가 머무는 대궁에서 2명의 남자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현 황제 민체스터와 그의 주치의 밴 자작이었다.
“폐하, 피로는 조금 어떠십니까?”
“아직 크게 좋아지는지 모르겠군. 깊게 자도 계속 피로해.”
그 말에 황궁 어의인 밴 자작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신이 부족하여.”
“아니네. 내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이지, 어찌 자네가 부족한 탓이겠나. 자네가 부족하면 이 제국의 모든 의사는 청진기를 내려놓아야겠지.”
황제는 부드럽게 말했다.
황궁 어의이자 황실 십자 병원의 병원장인 밴 자작은 명실상부한 제국 최고의 의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모르면, 제국의 그 어떤 의사도 모를 것이다.
‘의사라도 모든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민체스터는 생각했다.
‘아무리 요즘 의학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해도 말이야.’
근래의 의학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전한 상태지만, 한계는 있었다.
너그러운 군주인 그는 의학의 한계를 주치의의 무능으로 돌리고 싶진 않았다.
‘그저 지난 잘못에 대한 내 업보겠지.’
황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난치병에 걸린 게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인영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정말 모르겠나?”
“죄송합니다, 전하.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문득 지난번 엘리제와의 대화가 떠올라 물었다.
“그러면 혹시 이런 병은 들어본 적 있나?”
“어떤 질환 말씀이십니까?”
“지난번 누군가 아바마마의 증상을 듣고 혈액 속에 당이란 물질의 농도가 올라가면 비슷한 증상이 생길 수 있다고 했는데, 혹시 들은 바 있나?”
“...!!!”
밴 자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혈액 속의 당의 농도? 탄수화물(carbohydrate)의 대사체(metabolite)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 같더군. 그대는 잘 모르는 질환인가?”
“...!!!”
어의는 마치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어의의 반응에 황제와 황태자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러나?”
하지만 밴은 황태자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프랑소엔 공화국의 의학계에서 태자 전하가 말한 것과 같은 질환을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었어. 증상도 폐하와 유사한...! 맙소사!’
그는 황제의 증상을 주르륵 떠올려봤다.
피로감, 다음, 다뇨(polyuria), 다갈!
논문에 나온 증상과 일치했다!
‘내가 어째서 이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
아마 지나가다 힐끗 읽은, 그것도 타국의 논문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의 입에서 논문에 명시된 진단명이 흘러나왔다.
“당뇨(diabetes mellitus)."
황제와 황태자는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밴?”
밴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폐하! 지금 당장 태자 전하가 말한 질환을 검토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당장 방을 뛰쳐나가려다가 태자에게 물었다.
“태자 전하! 혹시 전하께 방금 언급한 질환을 말해준 의사가 도대체 누구옵니까? 분명 이름난 명의(名醫)일 터! 그분과도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 .”
황제와 황태자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명의(名醫)?
그 아이가?
<내일(수요일)은 쉽니다. 모레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