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18화 (18/194)

00018  1-4 도제2  =========================================================================

“내가 말한 질환이 아바마마의 증상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가?”

“네,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분명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께서 말씀해준 것입니까?

이 병은 이전까지는 실체도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야 프랑소엔 공화국에서 처음 발표된 것이라, 제국 내에서 이 질환의 존재를 아는 의사는 저를 포함해 스무 명도 되지 않을 텐데.”

“... ... .”

제국에서 스무 명도 모르는 어려운 질환이라고?

황태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명의가 아니다. 그 병을 말해준 사람이 누구냐면...”

그런데 그때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을 끊었다.

“누가 말해주었느냐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가서 열심히 연구해 짐의 병을 치료해주게.”

뭔가 숨기려는 듯한 말투에 밴 자작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러고 물러나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온 밴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숨기려는 것이지? 이 질환의 존재를 아는 분이면, 분명 제국의 의학뿐 아니라, 공화국의 최신 의학 지견까지 꿰뚫고 있는 대가(大家)일 터. 향후 폐하의 치료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는 공화국의 논문을 꺼내며 생각했다.

‘어차피 수도에 그 정도 수준의 의사는 몇 명 없으니. 내가 아는 의사 중 한 명일 거야.’

머릿속에 가능한 명단이 쭉 떠올랐다.

일단 자신이 병원장으로 있는 황실 십자 병원의 교수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들이 모여 있으니,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야. 폐하의 증상을 두고 몇 번이나 컨퍼런스를 열었지만, 이 질환을 언급한 의사는 한 명도 없었어. 그러면 로즈데일 병원의 의사인가?’

로즈데일 병원.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병원이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치들은 돈만 밝히지, 실제로 의학에 관심 있는 이들은 거의 없어.’

그의 머리에 마지막 후보가 떠올랐다.

‘차라리... 테레사 병원에 실력 있는 의사들이 몇몇 있지.’

테레사 병원은 클로랜스 가문이 구휼을 목적으로 만든 병원으로 전체적 의료진의 수준은 다른 병원들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워낙 많은 환자를 보기 때문일까? 간혹 뛰어난 의사들이 있었다.

‘고트 병원장도 이 질환을 알고 있을 거고. 그때 잠깐 만난 젊은 천재 그레이엄도 이 질환을 알고 있을 거야. 나중에 한번 넌지시 확인해봐야겠군.’

그는 본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당뇨는 아직 미지의 영역에 속한 질환으로, 그 혼자만으로 황제를 치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황제를 치료하기에 앞서, 증상만을 듣고 당뇨란 질환을 추측해낸 의사와 상의를 하고 싶었다.

‘분명 대단한 실력의 대가(大家)일 거야. 도대체 누굴까?’

***

“밴 경이 단서를 잡은 듯하군.”

“네,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엔 꼭 아바마마의 병이 완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황제와 황태자 부자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밴 자작의 반응을 보니 엘리제 그 아이가 한 이야기가 정말이었나 보구나.”

“네.”

“프랑소엔 공화국에서 최근에야 발표한 질병이라고? 그 아이는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황제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바마마.”

“왜 그러느냐?”

“밴 경에게 그 질환을 언급한 이가 클로랜스 영애란 사실을 어째서 숨기셨습니까?”

민체스터 황제는 말했다.

“어차피 황태자비가 될 아이. 의학계와 자꾸 엮일 필요는 없지 않으냐? 지금 병원에 나가 있는 것도 당장 돌아오라고 하고 싶거늘.”

황제는 엘리제가 황태자비가 되길 원하지 의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황태자비, 그리고 후에 황후가 될 아이에게 의사는 어울리지 않지.’

의사가 나쁜 직업은 아니다. 아니, 가치 있고 존중할 만한 직업인 것은 황제도 안다.

하지만 황태자비가 될 아이가 의사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너는 어떤 마음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엘리제와의 결혼 말이다.”

“저는 그저 아바마마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그래? 싫든지, 좋든지 너도 생각이 있을 것 아니냐? 어떻느냐?"

그러나 황태자는 무감정하게 답할 뿐이었다.

"저는 제국 황실의 일원. 제 개인적인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민체스터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저리 딱딱해서.'

그의 아들, 린덴 드 로마노프는 그 누구보다도 유능한 황태자지만, 마치 감정이 메마른 듯 너무 차가웠다.

‘안타깝구나.’

그는 자신의 아들이 가슴 속,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과연 저 메마름이 따뜻해질 날이 올까?

민체스터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크림 원정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

“2군단이 크림 반도로 진군 중입니다. 며칠 안에 반도에 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번 엘리제 그 아이가 말한, 몽셀 왕국의 동태는?”

황태자는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어냐?”

“프랑소엔 공화국의 비공식 사절이 최근 몽셀 왕국에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네, 첩보국에서 확인한 정확한 정보입니다.”

“허어. 그러면 그 아이가 추측한 대로 몽셀 왕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높겠구나.”

“네. 사절이 다녀간 후, 몽셀 왕국군이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저희 군의 뒤를 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허어...”

황제는 탄식을 터뜨렸다.

“이걸 모르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꼬. 내가... 아니, 우리 제국이 엘리제, 그 아이에게 큰 도움을 받았구나.”

그는 엘리제에게 거듭 감탄했다.

만약 그녀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반도로 진입한 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았을 것이다.

아니, 뒤통수 정도가 아니다. 허리가 끊기고 목이 날아갈 치명타였다.

‘참 대단해.’

황제는 지난번 엘리제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과거 철없는 모습을 완전히 버린, 정숙한 태도. 그리고 현명한 식견, 착한 마음까지.

이전에도 조카처럼 아끼는 아이였지만, 그날은 욕심이 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반드시 황태자비로 맞아야겠어. 병원에선 빨리 나오도록 하고.’

그 뒤로 황제와 황태자는 이런저런 정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가 의자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린덴.”

“네, 아바마마.”

“다음 암행은 언제 예정이느냐?”

“조만간 나가볼까 합니다.”

암행.

변장을 통해 신분을 숨긴 후 시민들의 생활을 살피는 것으로 제국을 다스리는 이들의 비밀스러운 전통이자 의무였다.

“이번엔 어디를 살필 것이냐?”

“헤란로를 가볼까 합니다.”

헤란로는 봉건제가 몰락 후,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제국의 새로운 주축으로 떠오른 신(新)-시민 계급, 부르주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헤란로 말고 피에르 구역을 가는 것은 어떠냐?”

“피에르 구역 말입니까?”

피에르 구역은 비교적 가난한 서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그곳에 테레사 병원이 있지 않으냐?”

황제가 빙긋 웃었다.

“영 소식이 없는데... 엘리제, 그 아이가 잘하고 있는지 네가 한번 직접 보고 오너라.”

***

엘리제는 정식 도제(徒弟)로 그레이엄 남작의 뒤를 따라다니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말이 교육이지, 그레이엄이 일일이 그녀에게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참관.

그녀는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며 그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바라봤다.

그레이엄은 그저 가끔 생각났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 환자의 병이 무엇인지 알겠나?”

엘리제는 스승에게 하듯,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세균성 폐렴입니다.”

“어째서지? 물이 찬 것은 아니고?”

“화농성 가래, 검사에서 보이는 경화 소견을 고려할 때 물이 찬 것보단 폐렴의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정확한 답변.

그렇게 짧은 문답이 끝나면, 그레이엄은 다시 그녀에게서 신경을 끄고 진료에 열중했다. 엘리제는 말없이 뒤에서 그 모습을 참관하고.

‘의대 시절 학생으로 돌아온 것 같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서울대 의대 재학시절, 병원 실습을 나갔을 때도 이렇게 교수님들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그때는 처음 마주하는 환자들에 긴장도 많이 하고, 놀라기도 많이 했는데...

당시 추억이 생각나서 슬쩍 미소가 나왔다.

‘빨리 의사 자격증을 취득해 나도 내 진료를 할 수 있으면.’

이렇게 보고 있는 것도 좋지만, 역시 직접 환자를 보고 싶었다. 수술도 하고 싶고.

‘기회가 있겠지.’

한편 그녀의 스승, 그레이엄은 말없이 경악하는 중이었다.

‘도대체 이 애는 뭐지?’

관심 없는 듯 보여도 그는 꼼꼼히 소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처음엔 의학 지식을 묻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쉬운 질문들은 아니었다.

해당 사항을 정확히 알아야 답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소녀는 모든 질문에 정답을 말했다. 마치 교과서를 보고 답하듯 정확하게.

‘그래서 난이도를 높여 환자의 진단을 묻는 질문을 했는데...’

결과는 더 가관이었다.

환자의 증상을 뒤에서 듣고 답을 하는데... 마치 노련한 의사처럼 정확했다.

그가 고민되는 질환도 척척 답을 했고, 심지어 둘의 의견이 엇갈릴 때도 있었는데, 후에 검사결과를 확인해보니 소녀의 진단이 맞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레이엄은 혼란에 빠졌다.

‘이전에 환자를 진료해본 적이 있는 건가?’

하지만 저 어린 소녀가 환자를 진료한 경험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면... 천재?’

세상엔 가끔 그런 존재가 나타난다.

나이와 경험을 뛰어넘는 희대의 천재가 말이다.

대 연금술사 프레밍이 그러했고, 80년 전 의학의 기초를 새롭게 다진 그라함 백작이 그러했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저 소녀가 그런 천재라고?’

그레이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가 아가씨가 흥미 삼아 병원에 나왔다는 편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상식을 뛰어넘는 소녀의 모습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저, 선생님.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진료가 끝나자 엘리제가 물었다.

“오늘은 더 특별한 일정은 없다. 집으로 돌아가도록.”

“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녀는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 로제."

"네?"

"... ... ."

그런데 그레이엄은 바로 이야기를 않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선생님?"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가 머쓱한 목소리로 말했다.

"... 미안했다."

"네?"

"지금까지 널 편견을 가지고 귀찮게만 생각했어."

"...!!"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사과에 그녀는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야. 겉모습만 보고 너를 오해한 것 같아. 미안하다."

처음의 인상과 다르게 소녀는 깍쟁이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녀가 부랑자 병실에서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테레사 병원에서조차도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던 부랑자들이다. 세상에 어떤 의사가 부랑자들을 위해 그녀처럼 할 수 있을까?

"하여튼 앞으로 잘해보자."

진심이 느껴지는 그 사과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앞으로 열심히 할 테니 더 잘 부탁합니다."

그레이엄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였다.

“내일은 이곳 진료실이 아닌, 구호소로 나와라.”

“...!”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구호소 말입니까?”

“그래.”

구호소는 현대 지구로 따지면 응급실(emergency room) 같은 곳으로 외상 환자나, 응급 환자를 진료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중환자들이 모이는 곳.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