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1-5 불가능한 수술 =========================================================================
“그나저나...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전하의 초상(超上)능력은 참으로 신묘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외모를 완전히 변화시키다니.”
“또.”
“아, 또. 죄송합니다, 공자.”
황태자의 얼굴이 변한 이유는 바로, 로마노프 황가에만 이어져 내려오는 초상능력 때문이었다.
브리티아 제국의 황족들은 세상에 마지막 남은 신비한 힘, 초상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시종, 란돌 준남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초상능력이야말로 로마노프 황가의 진정한 상징성.’
전 대륙에서 오로지 로마노프 황가의 인물들만이 초상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거기서 오는 상징성은 어마어마했다.
수많은 왕가가 무너지는 이 격변의 시대에도 로마노프 황실이 굳건한 이유를 초상능력 때문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었을 정도니까.
물론 로마노프 황가의 번영은 대대로 신민들을 생각하는 황제들의 선정 때문이지, 초상능력 때문은 아니었다.
산업의 발달로 총과 대포의 시대가 된 지금, 초상능력의 의미도 많이 퇴색되었고.
그래도 상징성만큼은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브리티아 제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황족들이 초상능력의 주인이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전... 아니, 공자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몸?”
“근래 계속 기력이 없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했지.”
"잠을 계속 못 주무시는 것 아니십니까?"
잠?
황태자는 그 물음에 피식 웃었다.
15년 전의 어린 시절, '그날', 이후 그는 잠을 편하게 자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반복되는 악몽.
그러니 최근 몸이 안 좋은 것은 잠을 못 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의의 진료는 받으셨습니까?”
“오래전에 받았다. 어의가 지어준 약을 먹고 있으니 곧 좋아지겠지.”
시종은 걱정스레 말했다.
“제가 보기엔 약을 먹어도 큰 효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계속 피로해하시고요. 환궁하신 후에 다시 한 번 진료를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확실히 단순한 과로라 하기엔 피로감이 오래가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뭐, 특별한 것 있겠나. 조금 더 기다려보지.”
“전하... 하지만...”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하겠네.”
어쩔 수 없이 시종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이만 돌아가기라도 하시죠. 몸이 더 안 좋아질까 걱정입니다.”
“... ... .”
“혹시 더 둘러볼 것이 있습니까?”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한 군데 가볼 곳이 있긴 했다.
바로 테레사 병원.
그의 약혼녀가 될 클로랜스 영애가 일하고 있는 곳.
-엘리제, 그 아이가 잘하고 있는지 네가 한번 직접 보고 오너라.
‘엘리제... .’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와 지난번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사람... 아니, ‘그녀’처럼 변해서 나타난 소녀.
그날의 소녀는 마치 ‘그녀’와도 같아 그는 몇 번이고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소녀가 그날 한 말을 떠올렸다.
-저 때문에 원치 않은 약혼 이야기도 나오고. 정말 죄송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사실 거슬릴 이유가 없는 말인데.
“전하?”
시종이 또 전하란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참, 말 안 듣는 시종이란 생각을 하며 황태자는 말했다.
“돌아가자, 황궁으로.”
부황의 명을 받았으니 가보긴 해야겠지만,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약혼이라.'
그는 그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기의 승패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녀는 분명 자신의 약혼녀가 될 것이다.
그녀가 그 말도 안 되는 내기에 승리할 가능성도 없었고, 무엇보다 황제가 그녀를 원하고 있으니까.
온화한 인상을 지녔다고, 유할 것이라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다. 황제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제국을 지배하는 철혈의 거인.
그가 원하는 순간, 이미 약혼은 결정된 것이다. 다만 조카 같은 그녀를 배려하는 마음에 시간적 유예를 둔 것이지.
'뭐, 상관없지. 약혼녀가 누가 되든.'
'그날' 이후, 그에게는 단 한 가지의 '염원(念願)'만이 남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어차피 약혼녀 따위. 누가 되든 중요하지 않았다.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차를 대기해두었습니다. 거리가 있어 조금 걸어야 합니다.”
시종이 그를 안내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으스스한 골목에 들어가게 되었다.
“꼭 이런 길로 가야 하는가?”
“이 길을 통하지 않으면 한참 돌아가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혹 강도가 나타나도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하하.”
지금은 실없는 중년으로 보이는 시종이지만, 왕년에는 로열 나이츠에 속해있던 뛰어난 기사였다.
이런 골목에 나오는 강도 따위는 한 손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상능력자이자 2년 전, 앙젤리의 전쟁 영웅이신 전하께서는 나 같은 것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강자이시고. 군대라도 오지 않는 한, 전하를 해할 수 없지.’
그런데 말이 씨가 된 것일까?
골목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거... 거기 서라.”
“...!!”
“가, 가진 것 다 내, 내놔...”
덥수룩한 수염의 강도가 녹슨 칼을 들고 그들을 위협했다.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편 중독자군.”
“그런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눈빛도 흐릿한 게 아편 중독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국법으로 아편을 다스린 지 오래되었거늘, 수도에서 버젓이 아편이라니.”
“치안총감 하슬 경에게 조사를 명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저 중독자 먼저 치안대에 넘겨야겠군.”
칼을 든 강도를 만났건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저런 강도 따위 10명이고 상대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한 시종은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 강도에게 겨누었다.
차앙!
“다치기 싫으면 칼을 내려놓아라.”
“다, 다가오지 마!!”
심상치 않은 시종의 기세에 강도는 뒷걸음질쳤다.
시종은 단숨에 제압할 생각으로 천천히 강도에게 다가갔다.
한편 황태자는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무료하군.’
생명을 위협하는 강도를 만난 상황에 어울리는 감정은 아니지만, 무료했다.
‘그래, 무료해.’
그는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든 감정은 아니었다.
‘그날’의 일 다음부터일까?
이 나라를 물려받을, 가장 존귀한 그였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무료하고 삭막했다.
‘쓸데없는 생각.’
그는 고개를 저었다.
“히엑! 저리 가!!”
결국, 아편 중독자는 칼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거기 서라!”
"쫓아오지 마! 죽일 거야!!"
시종이 단숨에 뒤를 따랐고, 그의 손이 강도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시종, 란돌 준남작은 잡았다는 생각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요놈! 가만히 있어라!”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가 울렸다.
탕!!!
"어?"
란돌은 신음을 내뱉었다.
메케한 화약 냄새와 더불어 왼쪽 배가 타오르듯이 쓰라렸고, 급작스레 시야가 어두워졌다.
'무, 무슨...?'
"란돌!!"
흐릿한 의식 속 황태자의 외침이 들렸고, 눈앞에 권총을 들고 있는 아편 중독자가 보였다.
귀족들이 호신용으로 사용하는 2연발의 데린저 권총이었다.
‘어떻게... 권총을?’
"히익, 힉!! 내, 내가 죽인다고 했잖아! 히익!"
아편 중독자가 이성을 잃고 횡설수설하더니 달려오는 황태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너, 너도 죽인다!"
시종, 란돌은 꺼지려는 의식을 붙들려 이를 악물었다.
'전하...!'
저런 총알 따위로 초상능력의 소유자인 전하를 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강도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푹!
"컥!"
검극이 목을 정확히 파고들었고, 아편 중독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즉사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황태자가 시종에게 도착했다.
"란돌!!"
"저, 전하... 죄, 죄송합니다. 설마 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바보같이 방심하여..."
시종은 울컥 피를 토했다.
"그만! 그만 이야기하여라!!"
"저, 전하..."
시종의 눈에 빛이 사라져갔다.
'이런...!'
황태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왼쪽 상복부. 하필 급소에 정확히 맞았어!'
작은 충격에도 위험할 수 있는 부위가 급소다. 하필 그런 곳에 총을 맞다니!
"저, 전하..."
시종이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껏... 감사했습니다... 강녕하시길..."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종은 고개를 떨구었다.
"란돌!! 정신 차리지 못할까!"
황태자는 급히 시종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아직 맥이 있었다!
의식을 잃었을 뿐 아직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약해.'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죽게 놔둘까 보냐.'
특별히 개인적인 정을 쌓은 시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내 사람’이다.
절대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가장 가까운 병원이?'
최고의 시설을 갖춘 황실 십자 병원은 너무 멀었다.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로즈데일 병원도 안 돼. 멀어.'
그런 그에게 한 병원이 떠올랐다.
테레사 병원!
시설은 열악하지만 바로 옆에 위치한, 론도(Londo) 최대 규모의 병원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일까?
하필 그날 저녁 당직은 그레이엄 남작과 그의 제자 엘리제였다.
***
늦은 밤임에도 테레사 병원의 구호소는 환자들로 북적북적했다.
피 흘리는 중년 남자, 고통에 신음을 삼키는 여성... 그 복잡한 아비규환 속에서 한 소녀가 의사에게 다가갔다.
"어깨 탈구 환자 처치했습니다, 선생님."
젊은 교수, 그레이엄은 고개를 돌렸다.
작고 여린, 그러면서도 기품 있는.
이 어지러운 구호소와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외모를 지닌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처치했지?"
"탈구의 방향에 따라, 손을 들어 올린 후 외측으로 회전시키며(external rotation) 정복(reduction)했습니다."
그 말에 그레이엄은 다시 말없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놀람이다.
'이제 병원에 나온 지 한 달도 안 된 소녀가 Kocher's methods로 어깨 탈구를 교정해내다니. 누가 이 사실을 믿을까?'
혹시나 해서 환자의 상태를 살폈지만, 역시나였다.
그레이엄 본인이 한 것보다 더 완벽한 교정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그는 몇 번째일지 모를 질문을 하였다.
소녀는 천재였다.
자신 같은 어설픈 천재가 아닌, 세상의 흐름을 바꿀지도 모르는 진정한 천재.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도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이럴 수 있을까?
단지 재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의술은 이미 완성돼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의술을 몸에 새기고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
그레이엄은 고개를 저었다.
의술의 요정도 아닌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어이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녀는 대단했다.
'솔직히 지금도 가르쳐준다기보단, 동료 의사와 같이 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니까.'
오늘 특별히 환자가 많았는데, 이 소녀와 같이 일하니 거뜬했다. 소녀가 웬만한 의사 못지않은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로제."
"네, 선생님."
"피곤하지는 않으냐?"
그 말에 엘리제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까칠한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래, 피곤하면 잠깐 들어가 눈이라도 붙이거라. 환자들도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말에 엘리제는 미소를 지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미소를 본 그레이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너무 예쁜 미소였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렐 정도로.
그레이엄은 속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정신 차려, 그레이엄. 제자에게 가슴 설레 하다니.'
소녀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미소가 너무 예뻐, 잠시 가슴이 설렜을 뿐이다.
그래, 그랬을 뿐이다. 그랬던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