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1-5 불가능한 수술 =========================================================================
"선생님? 왜 그러세요?"
소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엄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네? 혹시 무슨 불편하신 점이라도?”
엘리제가 재차 물었으나, 그레이엄은 굳게 입을 다물 뿐이었다.
제자를 보며 가슴이 설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젊은 천재’인 그는 굉장히 빠른 나이에 교수가 되어 이제 고작 이십 대 중후반일 뿐이니, 그녀와 나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신경 쓰지 마라. 아무것도 아니니.”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레이엄 선생님!! 빨리 이쪽으로 와주세요!! 환자 왔어요!!!”
“...!!”
다급한 외침!
무언가 심상치 않은 환자인 것 같았다.
“가자.”
“네, 선생님.”
급히 이동해 환자를 본 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
총상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는데, 상태가 심각했다.
이미 시체와도 같은 안색. 의식은 전혀 없었고 동공도 열리기 직전이었다.
아직 살아있긴 했지만, 지금 당장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중환.
“하필 총알의 위치가...”
그레이엄은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그 마음은 엘리제도 동감이었다.
‘좌상복부. 정확히 비장(spleen)이 있을 위치야.’
그런데 그때, 딱딱히 굳은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상태가 어떤가? 반드시 살려야 한다.”
금발에 푸른 눈.
차가운 인상의 대단한 미남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주로 입는 평범한 정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강렬한 위엄이 느껴졌다.
“...!!”
그런데 그를 본 엘리제의 몸이 굳었다.
‘뭐지? 이 느낌은...?’
처음 보는 남자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가 고민했으나, 확실히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렬히 느껴지는 익숙함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제?’
한편 남자,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도 그녀를 보고 놀랐다. 병원에 오자마자 그녀를 만날 줄은 몰랐다.
‘조금 말랐군.’
그녀는 늘 입던 드레스가 아닌, 의사들이 입는 수술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와 수술복은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묘하게 어울렸다.
황제의 의도대로 테레사 병원에서 제대로 고생했는지 수척해진 모습이지만, 얼굴은 밝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저런 얼굴도 하는 아이였나?’
어린 시절부터 엘리제를 봐온 황태자였지만, 그녀의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란돌의 상태는 어떤가? 살릴 수 있겠는가?”
생각은 거기까지.
지금 중요한 것은 충성스러운 시종의 생사지, 엘리제가 아니었다.
황태자는 엘리제가 아닌, 의사로 보이는 그레이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갓 병원에 나온 그녀가 뭘 알겠는가? 그런 마음이었다.
그레이엄은 잠시 가만히 있다 입을 열었다.
“... 어렵습니다.”
“...!!!”
황태자, 린덴의 안색이 굳었다.
그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똑바로 말해라, 의사.”
“총알이 비장을 관통했습니다. 비장은 혈관이 무수히 많은 장기(hyper vascular organ). 지혈하는 게 불가능해, 안타깝지만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는다고? 어쩔 수 없다고?
“확실한가? 정말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건가?”
“네, 죄송하지만... 부위가 너무 안 좋습니다. 이런 상처는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그 말에 린덴은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본 순간, 그레이엄과 엘리제는 경악해 눈을 부릅떴다.
십자가.
뒷발로 선 두 마리의 동물.
그리고 쓰여있는 문구들.
Honi soit qui mal y pense(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치욕 있어라.).
Dieu et mon droit(신과 나의 권리).
그건 바로 로마노프 황가의 문장이었다!
“아, 아니...?”
그레이엄이 당황해 말을 다듬었다.
엘리제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누구지? 황족은 아닌데? 어떻게 된 거지?’
로마노프 황가의 인물들은 모두 초상능력이 담긴 특징적인 금안(金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푸른 눈의 저 남자는 황족은 아닐 것이다.
황가의 인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웬만한 고위 귀족의 얼굴을 전부 아는 엘리제도 저 남자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수를 써도 좋다. 얼만큼의 돈이 들어도 좋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라. 만약 살려만 낸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
“...!!”
그레이엄은 곤란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지, 제길? 비장이 관통된 상처를 치료할 방법은 없는데.’
너무 큰 거물, 무려 황가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지만 안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황실 십자 병원이든, 황궁 어의든 제국의 그 어떤 의사라도, 이런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죄송...”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옆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로제?”
그레이엄이 깜짝 놀라 제자를 돌아보았다.
그의 제자는 굳은 얼굴로 환자를 살피고 있었다.
“선생님, 할 수 있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로제? 총알이 비장을 뚫었어! 불가능해!”
그러면서 그는 치료가 불가한 이유를 설명했다.
“비장은 혈관이 무수히 많아! 총알이 그 혈관들을 다 꿰뚫었을 텐데, 지혈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알고 있어요. 비장의 찢긴 혈관들을 일일이 지혈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으면서 치료라니?”
그레이엄은 소녀가 환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에 무턱대고 이야기했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녀가 말했다.
“비장을 잘라내면 돼요.”
“...뭐?”
“비장 내에서 혈관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아예 비장을 잘라내고 그쪽으로 향하는 혈관을 묶어주면 돼요. 그러면 출혈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
그 말에 그레이엄의 얼굴이 경악에 뒤덮였다.
그는 뛰어난 의사.
소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꼭 비장 안에서 지혈할 필요는 없어. 비장을 잘라내고 그쪽으로 향하는 동맥을 묶으면 완벽하게 지혈이 가능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요컨대 물 주머니를 수선하는 것이 불가하니, 물 주머니를 없애버리고, 주머니로 향하는 호수를 막자는 것이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완벽한 지혈이 가능하다.
간단하지만, 이전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가히 혁명에 가까운 발상.
선진 의학의 기초를 세운 그라함 백작도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 아이는?!!’
하지만 그 발상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엄은 날카롭게 물었다.
“비장은 복강 가장 깊숙이 위치해 있다. 비장 주위에 있는 위, 췌장, 장, 대망(greater omentum)은 어떻게 할 거지?”
하지만 소녀는 이번에도 막힘없이 답했다.
“먼저 비장을 지탱하는 인대(ligament)를 절제 후, 비장의 위치를 회전(rotation)시키면 됩니다.”
“...!!”
언뜻 이해가 안 가는 설명이었다.
이 소녀의 머릿속에 뭔가 방법이 있는 듯한데, 그 같은 범인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 그러면. 누가 그 수술을 할 거냐? 난 네가 이야기한 수술을 할 능력이 없다.”
그 말에 소녀가 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가 하겠습니다.”
“...뭐?”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
그레이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병원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견습생이 그런 대수술을 집도하겠다고?
물론 그녀가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천재임은 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 그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이해해요.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저를 믿어주세요. 반드시 살려낼게요. 살려낼 수 있습니다.”
“...!!”
그레이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대로 놔두면 이 환자는 무조건 죽어요. 하지만 제가 말한 방법대로 하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반드시 살려낼 테니 한 번만 저를 믿어주세요.”
그런데 그때였다.
황태자의 묵직한 저음이 그녀를 향했다.
“정말 살릴 수 있나?”
엘리제가 그를 바라보았다.
“가능합니다. 아니,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황태자도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굳게 빛나고 있었다. 환자를 살리겠다는 의지로!
“...!!”
아찔할 만큼 강렬한 그 의지에 황태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아이였나?
하지만 그는 놀란 감정을 숨기며 차갑게 말했다.
“정말 할 수 있나? 무책임한 만용은 용서치 않아.”
그는 엘리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갓 의사가 되겠다고 선언한 교육생.
정식 의사도 불가능하다 말하는 판국에 그녀가 수술해낸다고?
한편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없어. 지금 당장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환자는 비장에서 끝없이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일분, 일분이 지나갈 때마다 생존율이 뚝뚝 떨어질 거라 초조했다.
“전 이 환자를 살리고 싶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
간절함과 초조함이 담긴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담긴 환자를 향한 마음에 황태자의 눈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결국, 말했다.
“좋다. 대신 반드시 살려내라. 할 수 있겠나?”
그리고 그는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 놀랐다.
정말 저 아이에게 란돌의 수술을 맡긴다고?
하지만 사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흐르면 란돌은 무조건 사망할 것이니,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약혼녀로 내정된 그녀의 그 눈빛.
그 눈빛에 담긴 강렬한 의지가, 환자를 향하는 마음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제국의 황태자로 적지 않은 명의들을 만나본 그이지만, 지금까지 저렇게 간절한 눈빛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는 의사는 본 적이 없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수술이 결정되었다.
***
수술은 곧바로 진행되었다.
원체 상태가 중하기 때문에, 한치의 시간도 아까웠다.
마취 가스로 마취를 시작하고 수술을 시작하려는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또 누가 수술에 들어가지?”
엘리제와 그레이엄이 들어가긴 할 거지만, 2명만으로는 부족했다. 최소 세컨드 어시스트(second assist) 역할을 할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했다.
문제는 워낙 늦은 시간인데다, 구호소도 다른 환자들로 바빠 수술에 들어올 의료진이 마땅치 않았다.
엘리제는 생각지도 않은 문제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그레이엄과 자신 둘만으로 수술을 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한 명이 더 필요한데...
그런데 그때, 의외의 인물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
“사람이 모자라나? 그러면 내가 도와주겠다.”
“...!!”
황태자였다.
엘리제와 그레이엄은 놀라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난 2년 전, 앙젤리 전쟁에 참전했을 때 여러 의료 처치들을 해본 경험들이 있어. 괜한 어중이떠중이보단 도움이 될 거다.”
엘리제는 그 말에 고민했다.
‘어떻게 하지? 괜찮을까?’
비의료인의 수술 참가라니. 의료 체계가 잘 잡혀 있고 의료법이 엄정한 현대 지구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했다.
‘하지만 비장 파열 수술에서 세컨드 어시스트는 워낙 간단한 일만 하니, 꼭 숙련된 의료진이 들어오지 않아도 도움이 되긴 할 텐데.’
세컨드 어시스트의 역할은 간단히 수술 기구를 잡고 있는 등, 의학적 지식이 거의 필요없는 단순한 것이었다.
“빨리 결정해라. 시간이 없지 않은가?”
그 말에 엘리제는 결정했다.
남자의 말처럼 시간이 없었다. 다른 의료진의 손이 빌 때까지 기다리기보단 누구라도 빨리 들어가 수술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잘 이끌어주면 어느 정도 역할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수술하는 모습이 다소 거북하실 수도 있습니다.”
고귀한 남자의 신분을 배려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물론 피가 튀는 험궂은 수술을 직접 돕는 것은 존귀한 황태자가 하기에 적합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시종, 란돌이 그의 최측근인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란돌은 분명 자신을 섬기는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의 사람’을 구하는 일인데 궂다고 고작 이런 일 하나 못 하겠는가?
린덴은 그런 마음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