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1-5 불가능한 수술 =========================================================================
내 사람.
엘리제는 그 대답을 들으며, 남자가 딱딱한 말투와 다르게 어쩌면 좋은 사람이 아닐까? 란 생각을 잠시 했다.
남자는 말했다.
“론이라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론님. 그러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마취하고, 소독 장갑을 낀 후, 프레밍이 개발한 소독약으로 수술 부위를 소독했다.
‘총상. 비장 파열...’
사실 그녀는 처음에 고민했었다.
과연 자신이 나서도 될지. 그리고 이런 대수술을 해도 될지.
그렇지 않아도 비상식적인 능력으로 과도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녀다.
만약 이 수술까지 해내면 어떤 시선을 받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눈앞에서 환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 환자를 살리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는가?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이제 시작이야. 잘하자, 엘리제.’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양상을 봤을 때 최소 5등급(grade V)의 비장 손상이야. 아차 하는 순간 환자를 잃어. 잘하자.’
이 환자는 ‘외과의사 송지현’으로서도 쉽지 않은 중환이었다.
치료하지 않았을 때의 사망률 100%.
수술을 시도해도 사망률은 높았다. 현대 지구에서도 그러니, 이곳에서는 더욱 심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살려내고 말 것이다.
두근.
그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 그 긴장감에 가슴이 떨렸다.
익숙한 긴장감이다.
그리고 그리운 긴장감이었다.
이 순간을, 메스를 다시 잡는 이 시간을 그리워했었다.
“메스 주세요.”
로제는 보조원에게 수술칼을 건네받았다.
한편 그녀의 스승 그레이엄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얼떨결에 여기까지 따라오긴 했지만, 정말 이 수술을 진행한다고?
물론 알고 있다.
어차피 이 환자는 가만히 놔두면 죽을 운명이니, 뭐라도 해보는 게 낫다는 것을.
그리고 소녀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진행하면, 어쩌면 정말로 환자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정말로 할 수 있다고? 아무리 천재라도 누구도 시도도 못 해본 이런 대수술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미친 짓 당장 멈추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순간, 소녀를 바라본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술 필드를 마주한 소녀는 이전과 달랐다.
평소에 흐르던 부드러움은 없었다.
오로지 느껴지는 것은 철혈(鐵血)의 의지! 저 작은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치 전장의 여인 같은 위압감이었다.
“... ... .”
그리고... 황태자, 린덴은 자신의 약혼녀로 내정된 그녀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오픈(open)합니다.”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손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중 절개(midline incision)!
메스가 명치에서부터 배꼽까지 일직선으로 살을 베었고, 배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파앗!!!
안에 고여있던 혈액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
“...!!!!!”
사방으로 비산하는 그 엄청난 혈액량에 그레이엄과 린덴은 흠칫 놀랐다.
놀라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한 명 엘리제뿐.
그녀는 곧바로 처치했다.
“더 피나는 것을 막아야 해요!! 거즈! 일단 론님께서 거즈로 압박해주세요!!!”
“...!!”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대망(greater omentum)과 위를 이쪽으로 젖혀주세요!"
둘은 정신없이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출혈이 너무 심해.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쇼크가 온 지 오래였다.
당장에라도 심장 마비가 올 수 있는 상황.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속히 지혈을 해내야 했다.
'일단 시야를 확보해야 해.'
낭자한 피로 내부 장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거즈 최대한 많이 주세요. 론님, 피를 닦아주세요."
현대 지구에서라면 흡입기(suction)으로 피를 빨아들여 시야를 밝혔겠지만, 이곳은 제국이다.
일일이 피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그레이엄 선생님, 이 철제 도구로 위장(stomach)을 이 방향으로 조금 더 젖혀주세요. 아래 갈비뼈도 들어 올려주시고요."
그녀의 지시대로 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복강 깊숙이 숨어있던 비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그레이엄은 그녀의 지시에 따르면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아이는?'
너무나 능숙했다.
마치 이 수술을 수십 번이고 해본 사람처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소녀에게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처가... 이걸 어떻게..."
그레이엄은 신음을 흘렸다.
비장의 상처가 너무 심했다. 총알이 비장 내부를 완전히 찢어놔 피가 울컥울컥 솟구치고 있었다.
도저히 손댈 수가 없는 상황.
그레이엄은 어쩌면 이대로 포기하는 것이 환자를 편하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이 순간, 엘리제는 다른 판단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다행이야. 총알이 다른 장기는 크게 건드리지 않고, 비장만 꿰뚫었어. 할 수 있어.'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로제?"
엘리제는 답했다.
"비장을 잘라낼 거예요."
"...!"
그레이엄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비장은 주변 장기들과 얽혀 있다. 그냥 가위로 톡 잘라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박리 해내면 돼요. 주변 장기, 특히 비장과 연결된 췌장 끝 부분만 박리 하면 비장을 분리해 따로 절제해낼 수 있어요."
"...!!"
그레이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소녀의 말대로 할 수 있다면 비장을 절제하는 게 가능했다.
소녀의 말대로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정말로?'
그레이엄으로선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건지. 정말 가능은 한 건지.
그런데 그때, 엘리제가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를 믿어주세요. 할 수 있어요. 선생님만 도와주신다면. 그러면 이 환자를 살릴 수 있어요."
"...!!"
그레이엄은 이를 깨물었다.
"... 알겠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미 상식의 범주를 까마득히 초월한 상황이다.
지금은 약에 취한 듯, 믿을 도리밖에 없다.
엘리제는 살짝 미소를 지은 후, 남자에게 말했다.
"론님께서는 이 부분을 잡아 고정해주고, 거즈로 비장을 압박해 최대한 출혈을 막아주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당부했다.
"압박(compression)은 간단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지혈 방법이에요. 출혈을 막는 론님의 역할이 이분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어요. 잘 부탁할게요."
그 말에 남자는 그녀를 바라봤다.
"알겠다."
뭔가 알 수 없는 눈빛과 낮은 저음.
"...!"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남자의 모습에 엘리제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으나, 곧바로 수술에 집중했다.
"박리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기적이 시작되었다.
***
"...!!"
그레이엄은 부릅뜬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건...! 도대체...!'
작은, 곱디고운 손가락에 들린 철제 수술 도구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도구가 지나갈 때마다 열리는 길들.
비장을 고정하는 인대(ligament)가 간단하게 끊겼고, 단단히 붙어있는 췌장 꼬리(pancreas tail)가 입을 벌리며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레이엄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일들.
하지만 소녀의 손은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완벽해.'
그레이엄은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소녀의 수술은 그가 꿈에서 바라던, 언젠가 이루길 바랐던... 그런 경지의 수술이었다.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지, 어떻게 저런 접근(approach)을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런 건... 상관없어.'
그래,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 완벽함 앞에서.
그저 아름다웠다.
소녀의 손이 움직이는 모습이, 그 손이 자아내는 결과가. 너무 아름다워 경외감마저 들었다.
'나도 언젠가 저런 수술을 하고 싶었는데.'
그는 꿈이 있었다.
의학의 기초를 마련한 그라함 백작을 뛰어넘는 최고의 의학자가 되자고. 그래서 의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자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젊은 천재라 부르며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지.’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그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절대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은 그저 노력할 뿐, 평범한 범재에 불과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른다. 자존심 강한 척, 잘난 척하고 있지만 속은 문드러져 내렸다.
‘그런데... 그랬는데...’
지금 그의 눈앞에 그토록 바라던 지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평생을 바랐던.
꿈에서 원했던 지평의 수술이다.
그때, 소녀가 말했다.
“박리 마무리합니다.”
툭.
마지막 동작과 함께 비장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이어 움직이는 손가락.
“타이(tie)."
수술용 실을 든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짧고, 절제된, 그리고 부드러운 움직임.
원 핸드 타이(one handed tie)였다.
그에 맞춰 검은 수술용 실이 춤을 추었고...!
콰악!
비장으로 향하는 비장 동맥이 완벽하게 묶였다.
“계속 실 주세요.”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실로 혈관을 지혈하는 기술, 타이(tie)가 계속해서 펼쳐졌다.
비장 정맥이 묶였고, 이어 위장에서 비장으로 향하는 동맥도 결찰(ligation)됐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멈추는 순간.
“...!!”
드디어 비장의 피가 멈췄다!
피를 공급하는 혈관이 모조리 막힌 탓이었다.
“끄, 끝난 건가?”
그레이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이제 고비는 넘겼어요. 비장만 잘라내면 돼요.”
“로, 로제... 너는... 도대체...”
그레이엄은 자신이 꿈을 꾼 건가 싶었다.
마치 이룩할 수 없는 경이를 마주한 예술가처럼 전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녀는 메스로 수술의 막바지를 마무리 지었다.
툭.
칼끝 아래서, 비장이 떨어져 내렸다.
“하아.”
그 순간, 엘리제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환자의 맥을 살핀 후 안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끝났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밤, 작은 소녀의 손에 의해 전 세계 최초의 비장 절제술(splenectomy)이 마무리되었다.
의학사(醫學史)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
수술이 끝났다 해서 환자 처치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배를 닫고, 드레싱을 하고, 모자란 혈액을 수액으로 보충하고, 여러 처리를 하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레이엄은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해 엘리제가 치료했다.
그리고 대충 마무리된 후, 말없이 병실 밖에서 기다리는 남자, 론에게 다가갔다.
“이제 괜찮은 건가?”
“네. 아직 상태가 안 좋긴 하지만, 수술이 잘 끝나 시간이 지나면 회복할 겁니다. 다만 비장을 절제한 뒤라 앞으로 감염증에 취약할 수 있어요. 앞으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남자, 황태자는 기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약혼녀로 내정된 엘리제가 정말 맞는 건가?
의술에 문외한이지만, 조금 전 소녀가 보인 수술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은 안다. 단지 뛰어난 정도가 아닌, 신기에 가까운 솜씨.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를 향하는 눈빛.
그녀의 눈에는 절박함과 간절함, 그리고 빛나는 생기가 담겨 있었고, 그 눈빛은 마치 전장의 여인같이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