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1-5 불가능한 수술 =========================================================================
‘거짓이라 생각했는데.’
이전 부황께 의사가 되고 싶다고 그녀가 말했을 때 솔직히 비웃고 넘겼었다.
곱게 자란 그녀가 웬 의사란 말인가?
하지만 오늘 모습을 보니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은커녕, 상상도 못 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고맙다.”
짧은 감사의 말.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감사였다.
엘리제는 기분 좋게 미소 짓고 말했다.
“론님도 오늘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수술도 도와주시고.”
그러면서 그녀는 속으로 살짝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인력이 없어 응급 수술에 보호자가 들어오게 하다니. 지구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내 사람을 치료한 일이다. 신경 쓰지 마라. 그나저나... 란돌을 치료해줬으니, 아까 이야기한 대로 보상을 하마. 원하는 것이 있느냐? 무엇이든지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대(大)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 소녀가 무엇을 원하든 들어줄 능력이 있었으니까.
“보상은.”
소녀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한테 말고, 병원 정산부에 가서 해주세요. 저는 이 병원의 의료진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그러면서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비쌀 거예요. 테레사 병원은 신분에 따라 금액을 차등해서 받거든요. 빈민은 무료, 서민은 소액, 일반 시민은 평균, 부르조아나 귀족은 고액... 이런 식으로요.”
그건 엘 후작의 뜻으로 잘사는 놈에게 뜯어서 못사는 사람들을 돕자! 란 취지였다.
물론 뜻대로는 잘 안 되고 있었다. 못사는 사람들만 바글바글 몰렸기 때문이다.
“음... 계산서 보시고 놀랄지도 몰라요. 나중에 바가지라고 화내시면 안 돼요.”
그 말에 황태자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신이 병원비 때문에 놀란다, 라.
웃기려는 농담이면, 하나도 안 웃겼다.
‘이번 빚은 달아놓고 나중에 갚아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그는 말했다.
“알겠다.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아, 그리고 란돌은 내일 황실 십자 병원으로 옮기도록 하겠다. 괜찮겠지?”
“네, 상태가 안정적이어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수술 과정에 대한 소견서를 써놓을게요.”
병원을 옮겨 환자를 치료하려면, 수술을 어떻게 해놨는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수술 과정을 적은 소견서가 필수였다.
‘비장절제술은 낯선 수술일 테니 치료에 혼란이 있을 수 있어. 수술 과정을 최대한 자세히 써야지.’
하지만 그녀는 그때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그 소견서가 어떤 파란을 불러일으킬지.
“이제 그만 가보겠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늦었다.
암행 중에는 며칠 궁에 안 들어갈 때도 있으니 큰 걱정은 안 하고 있겠지만, 슬슬 들어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때였다!
“...!!”
핑하고 머리가 돌아, 그는 순간 비틀거렸다.
“론님?”
엘리제가 놀라 그의 손을 잡았다.
“...!”
의사로서 환자에게 하는 일상적 부축.
하지만 황태자는 손에 갑작스레 닿은 따뜻한 감촉에 흠칫 놀랐다.
소녀의 손은 아까 그 대단한 수술을 해낸 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게 부드러웠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황태자는 손을 빼며 말했다.
하지만 의사 엘리제는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간파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지만, 안색이 희미하게 파리했다.
“얼굴색이 좋지 않아요. 혹시 열 기운이? 체온을 확인해봐도 될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만져 체온을 확인하기 위해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
황태자는 더욱 흠칫 놀랐다.
그녀의 몸이 가까워지며 우윳빛 향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말도록.”
그는 몸을 뒤로 뺐다.
자신을 피하는 그의 모습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은 병원, 그리고 그녀는 의료인.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진찰하려 했을 뿐인 그녀는 남자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시지 말고 제대로 진찰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아. 어지럼증은 이전부터 그랬다.”
황태자는 강한 어조로 거부했다.
하지만 철혈 의사 엘리제는 끈질겼다.
젊고 건강한 남자가 반복적인 어지럼증이라니? 뭔가 이상했다. 병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잠깐이면 돼요. 이쪽으로...”
그녀가 다시 다가오자, 그는 더욱 강하게 거부했다.
“정말 괜찮다!”
그러고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엘리제는 멍하니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왜 저러지?’
엘리제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최근 몇 년간 가장 당황하고 있었다.
당황하는 이유는 그 자신도 몰랐다.
“론님!”
“...!”
결국, 엘리제는 그의 뒤에 대고 말했다.
환자가 진료를 거부하는데 강제할 수는 없으니...
“만약 증상이 지속되면 꼭 다시 오도록 하세요. 진찰해드릴 테니까.”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병원을 빠져나갔다.
엘리제는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왜 저러지? 왜 어지럼증이 있는지 진료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게 그날 밤이 지나갔다.
힘들고, 파란만장한 밤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황실 십자 병원에서 환자를 데려갔고... 황실 십자 병원은 발칵 뒤집어졌다.
수술 경과를 기록한 엘리제의 소견서와 기적과도 같은 환자의 상태 때문이었다.
소견서에 집도의(執刀醫)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기에, 황실 십자 병원의 의사들은 이 믿을 수 없는 수술을 누가 집도한 것인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
“이건 도대체?”
황실 십자 병원의 원장이자 황궁 어의인 밴 자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런 수술을 해냈단 말인가?”
그는 소견서를 바라봤다.
몇 번을 읽었는지, 종이가 꼬깃꼬깃해진 지 오래였다.
‘말도 안 돼.’
소견서의 글씨는 지독한 악필이었다.
마치 애들이 장난치듯 쓴 글씨.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경악을 넘어 경이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말로 이런 수술을 해냈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산 증인이 있었다.
비장(spleen)에 정통으로 총알을 맞았는데도 멀쩡히 회복하고 있는 시종, 란돌이었다.
'황태자 전하께 비장을 총알로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흘려들었는데.‘
황태자는 무뚝뚝한 성격답게 간단한 설명만 하였다.
비장에 총을 맞았고, 테레사 병원에서 수술했으니 데려와 치료하라고.
비장에 제대로 총을 맞았으면 지금껏 살아 있을 리가 없기에, 엇맞았거나 다른 부위를 맞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특별한 치료 없어도 저절로 피가 멈추는 가벼운 비장 손상과 총알이 정통으로 관통한 심각한 비장 손상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데. 그라함 백작의 저서에도 심각한 비장 손상은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되어 있고.’
의학의 기초를 마련한 그라함 백작의 저서는 현시대 의사들에게 진리나 다름없었다.
‘그래, 이 소견서의 내용대로 수술하면 분명 심각한 비장 손상이라도 출혈을 멈추게 할 수 있어. 추후 면역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그건 일단 살아남은 다음의 이야기니까.’
제국 의학계의 거성(巨星)인 그는 소견서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봤다.
이건 단순한 소견서가 아니라, 논문으로 발표해 제국의 의사들이 모두 공유해야 할 내용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해서 직접 수술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다방면의 수술 경험이 많은 그는 이 소견서의 내용대로 하기가 결단코 쉽지 않음을 간파했다.
상처 부위의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과 주위 장기와 비장을 박리 해내는 섬세한 손기술이 없으면 시도도 못 해볼 것이다.
제국, 아니, 전 대륙에서 이런 수술을 능숙히 해낼 수 있는 의사가 몇 명이나 될까?
황궁 어의인 자신만 해도 해낼 수 있단 확신이 안 들었다.
‘차근차근 해보려면 해볼 수 있겠지만, 이건 시간을 다투는 응급 수술. 환자가 과다 출혈로 죽기 전에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자신 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이 의사는?’
그는 혹시 황제의 병을 추측해낸 의사와 이 의사가 동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알아봐야겠군.’
밴 자작은 테레사 병원의 원장인 고트 자작을 찾아갔다.
***
황궁 어의인 밴 자작과 테레사 병원의 원장인 고트 자작은 아카데미를 동문수학한 사이로 막역한 지기였다.
“밴? 바쁜 자네가 이 누추한 병원에 웬일인가?”
밴 자작은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추하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을 하는 곳을 누추하다 하면 어떻게 하나? 잘 지냈나?”
“나야 자네도 알다시피 항상 잘 못 지내고 있지. 맨날 병원이 파산 직전이어서 스트레스받는 것 모르나? 여기 머리 빠진 것 보라고.”
“엄살은. 어차피 필요한 돈은 클로랜스 가문에서 다 지원해주고 있지 않나? 하여튼 재상께서는 참 대단하시지. 가문의 재산으로 병원을 세워 빈민들을 치료해주시다니.”
밴 자작의 목소리에는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다.
이 테레사 병원의 설립자는 엘리제의 아버지인 엘 후작.
어디의 손도 벌리지 않고, 가문의 재산만으로 이 막대한 규모의 구휼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병원장인 고트 자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참으로 존경할만한 분이시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나 다름없는 분이랄까?”
사실 병원장인 고트 자작은 엘 후작을 직접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엘 후작이 병원에 모습을 거의 비치질 않기 때문이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음일까?
그는 자신이 테레사 병원을 후원한다는 사실을 크게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다.
그저 필요한 바를 대리인을 통해 파악해 지원해줄 뿐이었다.
‘정말 존경할 만한 분.’
그런 엘 후작을 존경하는 이는 테레사 병원의 의사들만이 아니었다.
가깝게는 의료 혜택을 받는 황도 론도(Londo)의 시민들부터, 멀게는 뜻있는 지식인들까지.
제국의 시민들치고 엘 후작, 자신들의 재상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게 다 재산이 많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떠들며 폄훼하는 이들도 일부 있지만.’
물론 엘 후작이 이런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자이기 때문이다.
클로랜스 가문은 브리티아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돈이 많다고,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오히려 돈이 많을수록 못난 욕심만 채우려 드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따라서 명재상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엘 후작과 클로랜스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귀족 가문이었다.
“여기 커피나 한잔 마시게. 그나저나 무슨 일로 왔는가?”
고트 자작이 건넨 잔에서는 짙은 아라비카(arabica) 품종의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밴은 커피에 손도 대지 않고 들뜬 얼굴로 물었다.
“자네에게 한가지 물어볼 일이 있어서 왔네.”
“무슨?”
“도대체 누구인가?! ‘그 수술’을 해낸 의사 말이야! 설마 자네는 아니겠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웬 수술? 알아듣게 설명해보게.”
“그 수술 말이야! 비장절제술(splenectomy)!"
하지만 고트 자작은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비장절제술? 비장을 잘라냈단 말인가? 그게 무슨...?”
“뭐야? 자네... 설마 모르는 건가?”
“그러니까 뭘?”
밴은 입을 벌렸다.
아니, 이런 기적 같은 수술이 자신의 병원에서 이루어졌는데 모르고 있다니!
“이것 보게!”
그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소견서였다.
“이게 뭔가?”
“빨리 읽어보기나 해봐!”
고트는 친우의 닦달에 안경을 꺼내 썼다.
“이게 도대체 뭐길래 그래? 글씨는 왜 이렇게 못 썼고? 애들이 낙서한 필체도 아니고...”
투덜거리던 그는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도 의학의 조예가 깊은 명의.
이 못난 글씨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