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28화 (28/194)

00028  1-6 그와 그녀의 진료  =========================================================================

그때, 남자가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한가지 확인할 것도 있고."

엘리제는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남자는 차가운 외모만큼이나 불친절했다. 전혀 부연 설명을 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제 됐다. 그러면 가보마."

그러고 남자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엘리제는 멍하니 남자의 뒤를 바라봤다.

도대체 뭐지?

'잠깐. 그러고 보니?'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한가지 생각.

"잠깐만요! 론님!!"

그녀가 크게 불렀으나, 못 들은 것인지, 못 들은 척하는 것인지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엘리제는 뛴 걸음으로 남자의 뒤를 쫓아가 손을 잡았다.

"잠깐만요!"

남자는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흠칫 놀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하아, 하아."

소녀는 급히 뛰어온 게 힘든지, 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진료받고 가세요."

"뭐?"

"진료받고 가세요. 계속 어지럽고 기력 없으시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면서 엘리제는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봤다.

"치료해드릴게요."

<1-5 불가능한 수술 fin>

<1-6 그와 그녀의 진료>

***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작은 진료실.

엘리제는 남자에게 의자를 권했다.

“뭐하려는 것이지?”

“뭐하긴요. 진료하려고 그러죠.”

남자, 론... 아니,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사실 그는 그녀를 만나러 올 예정이 전혀 없었다.

그런 그가 발걸음을 옮긴 것은 충동...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충동 때문이었다.

왜 그런 충동이 든 것인지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저 아이에게 진료라니.'

물론 소녀의 말대로 계속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긴 하다.

하지만 황궁 어의인 밴도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짚지 못하고 있는데 저 소녀가?

의미 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냥 뿌리치고 가면 될 일을. 한심하군.’

처음엔 그냥 무시하고 환궁하려 했다.

하지만 꼭 진료받아야 한다고 어찌나 강력히 강권하던지.

자신도 모르게 여기까지 끌려 들어와 버렸다.

‘이런 아이였나.’

그는 자신의 약혼자로 내정된 소녀를 바라봤다.

이 소녀가 자신이 알고 있던 엘리제가 맞기는 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이쪽으로 좀 더 가까이 오세요.”

청진기를 목에 걸며 그녀가 말했다.

황태자는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그녀를 향해 의자를 당겼다.

“안색이 계속 창백해요.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느낀 게 언제부터죠?”

“... 2달쯤 되었다.”

“식사는 잘하시나요? 체중이 빠지거나 그런 것은 없나요?”

“그렇지는 않다. 입맛은 조금 없긴 하지만.”

“어지럼증 양상은 어떻죠? 혹시 천장이 빙글빙글 돌거나 그렇지는 않죠?”

소녀는 차분한 어조로 증상을 체크했다.

마치 꼼꼼하고 사려 깊은 의사가 할법한 물음들에 황태자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어의인 밴 자작이 했던 물음들과 비슷하군.’

소녀는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리며 문진(history taking)을 이어나갔다.

평소와 달리 이지적인 느낌.

그러면서 소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왜 그러지?”

“잠깐만요. 진찰하겠습니다.”

그리고.

소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

황태자는 소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다시 한 번 놀라 손을 뒤로 뺐다.

“뭐하는 거지?”

하지만 엘리제는 환자에게 하듯 말했다.

“촉진하려고요. 체온과 발한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요. 혹시 불편하신가요?”

“... 아니다.”

진찰을 위해 필요하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린덴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다시 내밀었다.

“잠시만요.”

그러면서 엘리제는 손등과 손바닥을 만지며 여러 정보를 캐치했다.

‘체온이 약간 낮아. 기본적으로 손바닥에 존재하는 수분도 적은 편이고.’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진단이 머릿속에 떠오르려 했다.

‘조금 더 확인해봐야겠어.’

한편 황태자는 그녀가 좀처럼 손을 놓지 않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왜 이렇게 오래 만지는 거지?’

실제로 만진 시간은 몇 초 되지 않지만, 엄청 오래 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환자를 볼 때도 이렇게 신체 접촉을 하는 것인가?’

황태자는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저 이유 없이 그냥 그랬다.

물론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려면 접촉이 필수인 것은 알고 있었다.

기본적인 진찰법인 시진, 청진, 타진, 촉진 중 시진을 제외한 모두가 신체 접촉(Touch to touch)을 기반으로 정보를 얻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군.’

그런데 그때였다!

린덴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

"잠시만 실례할게요. 목 쪽 진찰을 하겠습니다."

소녀가 조금 더 다가오더니... 그의 목덜미를 어루만진 것이다!

"무슨?!"

“증상을 봤을 때 목 쪽 진찰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금방 끝나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차분한 설명.

하지만 린덴은 극히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를 만지며 내려갔다. 부드러우면서도 간지러운 느낌.

그리고 그러면서 소녀의 우윳빛 체향이 그의 후각을 자극해 황태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이게...!'

슬쩍 만지는 것도 아니었다.

뭘 찾기라도 하는 듯, 소녀의 손가락은 그의 목덜미를 샅샅이 훑었다.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 않으려는 듯,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그게 더 곤란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소녀의 손가락이 그에게서 떨어졌고, 황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숨을 토했다.

"너...!"

하지만 소녀는 의사의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잠시만요. 곧 종합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이 아이는...!! 남자에게...!!'

린덴은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소녀의 눈이 너무 진지해 그러지도 못했다.

그저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의 진중한 눈빛!

결국,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더할 건 없는 건가?"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 아니다. 그냥 피곤해서 그렇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넘어갔다.

"잠깐만요. 금방 결과 설명해드릴게요."

그러고는 종이 위에 진찰한 내용을 빼곡히 기록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과를 분석했다.

'이 진찰 소견들은... '그 질환'의 가능성이 가장 높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몇 가지 더했다.

"2달 전, 감기 기운이 있지 않으셨나요?"

"그래, 감기에 걸렸었다."

"당시 목덜미가 아프셨었죠? 제가 아까 만진 부위요."

"... 그랬던 것 같군. 어떻게 알았지?"

황태자는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당시 그를 지켜보기라도 한 듯, 정확한 물음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 답들에 엘리제는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내렸다.

'맞아! 역시 그 질환이 분명해.'

"론님의 피로감과 무기력증은 아마 이 질환 때문으로 보입니다."

"뭐지?"

그리고 소녀는 진단명을 말했다.

황궁 어의도, 당대 최고라 불리는 황실 십자 병원의 교수들도 놓친 진단명이었다.

"드 퀘르벵 갑상선염(De Quervain's thyroiditis)입니다."

***

"드... 쿼벵?"

황태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 퀘르벵 갑상선염(De Quervain's thyroiditis)은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뛰어난 의사들도 진단하기 난해한 질환이었으니까.

"네, 드 퀘르벵 갑상선염에 의한 증상으로 보입니다."

"그게 뭐지?"

"갑상선에 급성으로 염증이 온 후, 염증에 의한 후유증으로 호르몬 기관인 갑상선에 기능 저하(Hypothyroidism)가 오는 것입니다."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갑상선은 우리 몸의 연료 같은 갑상선 호르몬을 만드는 기관이에요. 연료와 다름없는 호르몬 생성에 문제가 생기면서 론님과 같이 어지럼증, 무기력증 같은 증상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드 퀘르벵 갑상선염의 임상 양상을 차분히 설명했다.

드 퀘르벵 갑상선염(De Quervain's thyroiditis).

현대 지구에서는 아급성 갑상선염(Subacute thyroiditis)로 불리는 질환으로 그녀의 설명처럼 염증이 생긴 후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 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 ."

황태자는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드 퀘르벵 갑상선염과 자신이 지난 2달간 경험한 증상은 완벽히 일치했다.

놀랍게도 이 어린 소녀가 자신의 병을 정확히 진단해낸 것이다. 황궁 어의도 갈피를 못 잡았던 병을!

'대단하군.'

그는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부황의 지병을 추측해낸 일과 지난밤 믿지 못할 수술까지.

벌써 세 번이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녀는 해결책도 명쾌히 내놓았다.

"제가 약을 처방해드릴게요."

"무슨 약이지?"

"갑상선 기능을 보조하는 약제로 이 약을 먹으면 증상이 금방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방전을 적어주었다.

"이 처방전을 약제과에 보여주면, 약을 지어줄 테니 받아가세요."

"... 그래."

황태자는 다시 한 번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이 소녀가 정말 자신이 알던 그 소녀가 맞는 건지.

"??"

엘리제는 진료가 끝났음에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자신을 쭈욱 쳐다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 아니다."

엘리제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수고하셨습니다. 약 꼭 잘 복용하세요."

"더 용건은 없는 건가?"

"네, 없어요. 진료 끝났으니 이만 나가셔도 돼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 그래."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에서 나가려는 그에게 엘리제가 말했다.

"아! 론님, 3일 뒤에 다시 오세요."

"왜지?"

"증상의 호전 정도를 봐서 약용량을 조절해야 하거든요. 완전히 좋아질 때까지 한, 두 달 더 걸릴 것인데 그때까지 규칙적으로 와서 진료를 받아야 해요."

그러면서 엘리제는 남자의 신분을 배려해 말했다.

"만약 이곳에 자주 오기 그러시면 제가 소견서를 써드릴 테니 황실 십자 병원으로 가도 괜찮아요."

정확한 신분은 알 수 없지만, 남자는 고위귀족일 것이다.

어쩌다 자신의 진료를 받았어도 빈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테레사 병원에 오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어쨌든 어느 병원이든 정기적으로 가서 진찰을 받으세요."

그런데 그때 그가 의외의 답을 하였다.

"3일 뒤에 오마."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너를 찾아오면 되는 건가?"

엘리제는 답했다.

"만약 원하시면 다른 선생님께 오셔도 돼요. 어차피 증상을 보고 약용량만 조절하는 것이라서... 만약 이곳이 불편하시면 다른 병원에 가셔도 되고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한테 오마."

"...!"

"3일 뒤에 보자."

그렇게 그와 그녀의 진료가 시작되었다.

***

그리고 며칠 뒤, 론도(Londo) 귀족 거리에 위치한 클로랜스 후작가의 저택.

반백에 가까운 중년 남자가 엘 후작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고트 자작. 병원 운영에 힘써줘서 항상 고마움이 많소.”

남자, 테레사 병원의 원장 고트 자작은 고개를 젓고 평소와 다르게 극진히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테레사 병원의 모든 것은 각하의 은혜 덕에 운영되는 것. 저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테레사 병원은 전적으로 클로랜스 가문, 엘 후작의 후원하에 운영되고 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날 부르신 것이지?’

엘 후작은 대리인을 통해 조용히 후원만 할 뿐, 이렇게 따로 자신을 저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혹시 병원에 내가 모르는 문제라도 있는 건가?’

고트 병원장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사소한 일로 자신을 부른 것은 아닐 지리라.

<내일(화요일)은 쉽니다. 수요일 자정(00:07)에 뵙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