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9 1-6 그와 그녀의 진료 =========================================================================
“앉아 차 한 잔 들도록 하시오.”
“네, 각하.”
하녀가 와서 그에게 동방에서 수입한 홍차를 따라주었다.
클로랜스 가문답게 극상품의 찻잎이었지만, 고트는 후작이 무슨 용건으로 자신을 부른 건지 긴장돼 향을 음미할 수 없었다.
“병원을 운영하며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소?”
“네, 각하의 후원 덕에 큰 문제 없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구려.”
후작은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한참 보냈다.
결국, 고트 자작이 못 참고 물었다.
“저... 각하, 혹시 어떤 일 때문에 저를...”
“아... 그게...”
하지만 엘 후작은 머뭇거리듯 입을 다물었다.
“...??”
고트는 더욱 긴장했다.
도대체 얼마나 중대한 일이길래 제국의 이인자, 재상 엘 후작이 저리 어려워한단 말인가?!
“말씀해주십시오. 병원에 제가 모르는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오. 그게...”
후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제라는 아이를 아시오?”
“네?”
고트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반문했다.
“모르오? 최근에 테레사 병원에 도제로 들어간 아이인데...”
“아, 압니다. 그런데 어째서?”
로제.
모를 리가 없었다.
최근 테레사 병원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었으니까.
그런데 천하의 엘 후작이 그 아이를 왜?
“크흠, 그 아이는 어떻게 잘 지내고 있소?”
약간 겸연쩍은 듯한 목소리.
고트 병원장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답했다.
“네, 잘 지냅니다. 그냥 잘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소? 어떤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소?”
잘하고 있다는 말에 후작이 반색하며 물었다.
고트는 그 모습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의 안부를 물으러 날 부른 것인가?
도대체 왜?
‘혹시?’
순간 엘 후작의 하나 있다는 딸이 떠올랐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후작가의 공녀가 우리 병원에 도제로 들어올 리가...’
그리고 그가 소문으로 들은 후작가의 ‘못된’ 공녀 클로랜스 영애와 로제는 너무나 달랐다. 동일인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 왜?’
어쨌든 후작의 물음이니 답했다.
로제?
그녀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였다.
“레이디 로제는 천재입니다.”
“...!”
그 뜻밖의 말에 후작은 놀라 반문했다.
“천재...? 엘리... 아니, 로제가 말이오?”
“네, 그것도 보통 천재가 아닌, 하늘이 내린 듯한 희대의 천재입니다.”
후작은 입을 벌렸다.
그냥 천재도 아닌, 희대의 천재라고? 그 아이가?
“그 말이 정말이오?”
후작은 고트 자작이 농담을 하나 살폈다.
하지만 완고한 병원장의 얼굴엔 한 치의 거짓도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네, 사실 그 소녀에게는 천재란 표현도 부족합니다.”
그러면서 고트는 생각했다.
‘나도 깜짝 놀랐지.’
고트는 처음에 그녀가 비장절제술을 해냈단 이야기를 듣고 믿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너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래서 그녀가 지금껏 병원에 들어온 일을 샅샅이 조사했다. 첫날부터 그날 있었던 일까지. 모조리.
그리고 경악했다.
비장절제술만이 아니었다.
부랑자 병실을 돌본 것부터, 구호소에서 해냈던 수많은 응급조치까지. 하나, 하나가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트는 소녀가 정말로 하늘이 내린, 말도 안 되는 천재란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디 로제는 천재... 정말 천재입니다.”
“도대체 어떻길래 그렇게 말하는 것이오?”
“병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고트는 엘리제가 한 일들을 하나, 하나 다 알려주었다.
“... ... .”
그리고 그 설명을 듣는 후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우리 딸 리제가? 정말로??’
의사가 아니기에 의학 용어를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엘리제가 병원에서 상식을 벗어난 일들을 해내고 있다는 것을!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내가 알기로 로제란 아이는 이제 16살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희도 처음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요. 이제 병원에 갓 나온 15살 소녀가 그런 일들을 해내다니. 하.”
고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들은 모두 한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입니다.”
“... ... .”
“어쩌면... 레이디 로제는 이대로 성장한다면 의학의 선구자인 그라함 백작이나 대 연금술사 프레밍을 뛰어넘는 위대한 의학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
후작은 입을 벌렸다.
그도 그라함과 프레밍을 알고 있었다. 의학의 개념을 통째로 새로 세운 위대한 인물들 아닌가?
엘리제, 그 아이가? 그런 인물들과 비견될만하다고?
“혹시 사람을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니오? 이름이 헷갈렸다거나...”
“우리 병원의 도제 중 로제란 아이는 단 한 명입니다.”
“... ... .”
후작은 놀란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사실 그가 고트 병원장을 부른 것은 엘리제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제 처음 병원에 나가는 아이가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는가? 맨날 혼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황제 폐하와의 내기는 애초에 이길 수 없는 거였고.
그저 매일 피로한 얼굴로 들어오길래 아비 된 마음으로 안쓰러워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려 한 것이었는데...
내 딸이 천재라고? 그것도 상식을 뛰어넘는?
“... 혹시 사람들에게 잘못하는 것은 없소? 버릇없게 군다거나?”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칭찬이 자자합니다. 실력도 탁월하고, 얼굴도 예쁜데, 성격도 친절하다고. 병원에서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일하는 것을 힘들어하진 않소?”
“아무래도 어린 소녀이다 보니, 피로해하긴 합니다. 병원 도제 일이 쉽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환자를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고트는 며칠 전 구호소로 직접 가서 본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몸에 피로가 느껴졌지만, 얼굴에 행복과 생기가 흘렀다. 환자를 아끼는 의사의 얼굴이었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이런 말이 어울릴까 싶지만... 제가 보기에 레이디 로제는 천생 의사로 보입니다.”
천생 의사.
환자를 돌보는 의사에게 할 수 있는 극찬의 칭찬 중 하나.
고트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지. 그렇게 작은 소녀가.’
정말 불가해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나? 믿지 않는다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 그래, 알겠소. 바쁠 텐데 고맙소.”
“아닙니다. 혹시라도 더 여쭤볼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그러고 인사를 한 후, 고트는 저택에서 물러났다.
“... ... .”
후작은 잠시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딸이 있는 테레사 병원 쪽이었다.
“허허. 이것 참. 그 아이가 그렇다고?”
후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상상도 못 했다.
딸이 병원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을지.
당황스럽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좋았다.
어떤 아비가 딸에 대한 이런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을까?
“엘리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딸을 사랑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엘리제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가 테레사 병원에 나간다 했을 때 많이 속상했었다. 황제와의 내기는 둘째치고 고생할까 봐. 힘든 일 때문에 고생할까 봐. 여린 몸이 아프기라도 할까 봐.
속상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소, 테레사.’
그는 엘리제가 어릴 때 죽은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엘리제, 그 아이가 당신을 닮았나 보오. 언제나 철들까 걱정만 했는데 말이오.’
테레사.
그의 전 부인이었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간호사가 되겠다고 가출해 가문을 뒤집은 적도 있었으니까.
‘당신의 유언에 따라 지은 테레사 병원에서 우리 엘리제가 일하고 있다오. 신기하지 않소? 당신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기라도 할 것처럼.’
후작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소? 아이들은 모두 다 잘 자랐다오. 큰 아이 렌도, 작은 아이 크리스도 말이오. 엘리제가 가장 걱정이었지만...’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집어들었다.
전날 저녁, 딸이 병원에서 돌아와 아버지를 위한다고 직접 구워준 쿠키였다.
‘난 요즘 엘리제가 너무 사랑스럽다오. 아무에게도 주기 싫을 만큼. 주책 맞게 말이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일순 흐려졌다.
‘그래서 걱정이구려.’
답답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소.”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창밖.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브리티아 제국의 황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답답함의 원인.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깊고 깊은 한숨이었다.
***
‘후작 각하께서 왜 로제에 대해 물어봤을까?’
고트는 고민했다.
‘혹시 정말로...? 레이디 로제가?’
그는 소문으로 들은 클로랜스 영애에 대해 떠올렸다.
못되고 이기적인 성격.
어린 나이임에도 안 좋은 소문이 파다했다.
‘아니야. 전혀 다르잖아.’
레이디 로제는 천재적인 실력도 실력이지만, 배려 깊고 남들에게 항상 친절했다. 소문의 클로랜스 영애와는 너무 달랐다.
‘왜일까?’
그런데 그는 고민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제국 최고의 귀족이라는 엘 후작보다도 높은, 그야말로 지고한 이가 그를 부른 것이다.
“미, 미천한 이가 폐, 폐하를 뵙습니다! 고트라고 하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고트는 벌벌 떨며 인사를 올렸다.
그런 그의 앞에서 온화한 인상의 중년인이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정체는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
제국의 황제가 그를 부른 것이다!
‘어, 어째서 폐하가 나를?’
고트는 머리를 바닥에 숙인 상태로 눈을 굴렸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침에는 엘 후작이, 오후에는 황제가 자신을 부르다니!
‘도대체 왜?’
친우인 밴이야 어의로서 황제를 질리도록 알현하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훈장을 받을 만큼 좋은 일을 한 적도 없는데, 소환당하니.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일어나게. 테레사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느라 고생이 많다고 들었네.”
“아, 아닙니다, 폐하.”
“평소 밴 경이 자네 이야기를 많이 하네. 빈민들을 돌보는 데 어려운 점은 없나?”
“송구스럽습니다. 다행히 폐하의 성은으로 특별한 어려움은 없습니다.”
“내 성은은 무슨. 다 클로랜스 후작의 덕이겠지.”
황제는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고, 고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마치 오전의 엘 후작처럼.
편안한 목소리였지만, 고트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지고한 황제가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런 고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민체스터는 편안히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시중을 드는 시종장에게 말했다.
“여전히 차 맛이 그 아이처럼은 안 되는구나.”
“죄송합니다, 폐하.”
“클로랜스 영애가 일러준 대로 달인 거지?”
“네, 한치의 틀림도 없이 그대로 달였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영 마음에 안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의 맛이 안 살아. 그 아이가 달여준 차는 깊으면서도 머리가 맑아지는 청량한 맛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