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1-6 그와 그녀의 진료 =========================================================================
시종장, 밴트 남작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신이 부족하여.”
“아닐세. 어쩔 수 없지. 레시피대로 해도 손맛을 살릴 수는 없으니까. 그냥 나중에 직접 끓여달라 해야겠어. 빨리 그 아이가 끓여주는 차 맛을 매일 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군.”
그 말을 하며 민체스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푸근한 느낌이 드는 미소.
그 모습을 보며, 고트는 속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한 손으로 제국을 지배하는 지고한 황제가 저런 편안한 웃음이라니?
아까 언급한 ‘클로랜스 영애’을 생각하고 그런 건가? 하지만 자신이 소문으로 들은 클로랜스 영애는...?
그런데 그때였다.
황제가 용건을 꺼냈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가 궁금하지?”
“말씀하시옵소서, 폐하.”
고개를 숙인 고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리고 황제의 입에서 나온 용건은, 전혀 상상도 못 하던 것이었다.
“로제란 아이에 대해서 아나?”
“...!!!”
고트는 눈을 크게 떴다.
로제?
그 아이?
“모르나? 자네 병원에 도제로 들어갔다던데.”
“아, 압니다!”
고트는 당황해 답했다.
당연히 안다.
하지만 황제가 그 아이를 왜? 엘 후작도 그렇고.
‘도, 도대체 뭐지? 그 아이의 정체가?’
황제가 말했다.
“그 아이에 대해 말해주겠나?”
“어, 어떤 것을 말입니까?”
“그냥 전부다. 어떻게 지내는지, 자질은 어떤지, 힘들어하진 않는지. 자네가 보기엔 어떤지. 전부 다 이야기해주어 보게.”
고트는 황제의 부탁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무려 지엄한 황명인지라 정신없이 로제에 대해 설명했다.
“흐음, 그런가? 그 아이가 그렇게 뛰어나다고?”
“네, 폐하. 신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의사보다도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향후 제국 의학계의 미래를 밝힐 인재로 보입니다.”
“아직 어린데, 지나친 평가가 아닌가?”
반문하는 황제는 무언가 뚱해 보였다.
고트는 눈치도 없이 극찬하였다.
“아닙니다. 제가 비록 부족하지만, 35년이 넘게 의사 일을 하였는데, 그 소녀 같은 이는 처음입니다. 가히 그라함 백작, 프레밍에 맞먹는 자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크흠. 여린 소녀라 들었는데, 환자를 보는 것을 어려워하진 않고?”
“전혀 아닙니다. 그 어린 나이로 어떻게 환자를 그렇게 보는지,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천생 의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 ... .”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어딘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고트 자작.”
“네, 폐하.”
“오늘 수고했네. 바쁠 텐데 내가 시간을 많이 뺐었군. 이만 돌아가 봐도 좋네.”
“네, 소신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고 고트는 조심히 어전에서 물러났다.
황제가 왜 로제에 대해 물은 걸까 궁금해하며.
그런데 그때,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참, 자작.”
“네, 폐하?”
“이번 의사 자격시험은 잘 준비하고 있는가?”
테레사 병원의 원장이자, 자격시험 출제 임원인 고트는 얼마 전 받은 이해 못 할 황명을 떠올렸다.
의사시험을 어렵게 내라는.
“네, 폐하. 자격이 되는 인재만이 합격할 수 있도록 문제를 엄선하고 있습니다.”
“그래, 반드시 어렵게 문제를 내주게.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합격하는 일이 없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답을 하면서도 고트는 속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존의 의사 자격시험도 충분히 어려워 자격이 안 되는 이가 뽑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어려운 의사 시험을 통과했기에 의사가 제국의 전문직으로 존경받는 것이다.
‘그리고 왜 폐하께서 의사 시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어쨌든 난이도를 다시 한 번 더 올려야겠구나.’
그는 그렇게 어전에서 물러났다.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자격시험 난도를 올릴 것이니, 이번 시험은 정말로 곡소리 나는 문제만 가득하게 될 것이다.
“흐음...”
민체스터는 턱을 쓰다듬었다.
“엘리제, 그 아이가 그렇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평이었다.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도망칠 줄 알았는데? 놀랍군.’
그냥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천재란다.
그것도 역사의 획을 그을 재능의 천재.
‘설마.’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황제는 그녀를 무척이나 아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아닌가?
‘의술을 전혀 접해본 적도 없는 아이가 그런 일들을 해냈다고? 글쎄, 뭔가 착오가 있겠지.’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생각보다 잘하고 있나 보군. 저렇게 인정받고 있는 것 보니. 역시 똑똑한 아이야.’
그는 이전 엘리제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철없음을 벗어던진 소녀는 누구보다도 현명해 보였다.
‘얼마 전 정말로 몽셀 왕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전보를 받았지.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크림 원정이 큰 곤란에 빠질 뻔했어.’
곤란 정도가 아니었다.
엘리제는 최악에는 전멸도 각오해야 할 함정에서 제국군을 구해낸 것이다.
그런 똑똑한 아이니 병원에서의 일도 저렇게 잘하는 것일 것이리라.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너무 빠지면 안 되는데. 황태자비, 후에 황후가 될 아이가 말이야.’
환자를 위하고, 여린 몸으로 병원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하단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차피 황실의 일원이 될 아이였다.
병원 일을 하다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이 들었다.
“밴트 경.”
“네, 폐하.”
“탄신 연회 준비는 잘하고 있지?”
시종장은 공손히 답했다.
“네, 분부한 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에 대한 발표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최측근인 밴트 시종장은 엘리제와 황제와의 내기를 알고 있었다.
클로랜스 영애가 내기에서 이기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직 성인식 전까진 내기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에 그녀를 약혼녀로 발표하면 내기를 어기는 것이다.
“내기를 어길 생각은 없네. 가볍게 한 내기라도 짐이 직접 제안한 내기가 아닌가? 그리고 어차피 내가 이길 내기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황제인 그가 직접 제안한 내기이다. 그러니 아무리 황태자비로 바란다 해도 엘리제가 내기의 조건을 충족하면 그녀를 놓아줄 것이다. 그건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다만 내기의 조건이.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내면.
였다.
대 브리티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내려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해내야 할까? 그것도 6개월 안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민체스터는 자신이 질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혹시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에 대한 발표를 미루실 것입니까? 내기가 끝날 때까지?”
“아니, 미루지 않아.”
“그러면...?”
시종장은 황제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내기를 어기지도 않으면서, 발표를 미루지도 않겠다니?
하지만 민체스터는 대답 대신 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짓궂은 미소였다.
“클로랜스 영애도 탄신연회에 참석하겠지?”
“네, 당연합니다. 백작 가문 이상의 고위 귀족들은 불가피한 사유가 없는 한, 모두 탄신연회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니까요.”
“그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말했다.
“좋은 연회가 되겠군.”
***
론도(Londo)의 거리가 점차 들뜬 분위기로 물들어갔다.
탄신연회는 온 제국의 축제. 평민, 귀족할 것 없이 모두 기쁜 얼굴로 축제를 준비했다.
“이번 탄신연회는 폐하께서 특별히 더 성대하게 준비할 거라는데?”
“그래?”
“응, 빈민가의 시민들에게도 무료로 음식과 술이 제공될 거라더군.”
“캬, 역시 황제 폐하! 만수무강하시길!!”
시민들은 두런두런 모여 탄신연회에 대해 떠들었다.
당금의 브리티아 제국의 국력은 서 대륙... 아니, 세계 최강을 아우르고 있었다.
서대륙을 넘어 검은 대륙, 신대륙, 동방까지.
황실 십자가기가 꽂히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가히 해가 지지 않을 정도의 방대한 영향권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견할만한 열강은 전통적 적대국인 서대륙 본토의 프랑소엔 공화국 정도?
본토의 또 다른 군사 강국 프러시엔 공국, 해양 왕국 스파냐, 신대륙의 신 연방도 있었지만, 브리티아 제국과 프랑소엔 공화국엔 미치지 못했다. 동방의 대국 청(淸, Qing)은 이미 기울어가는 달이었고.
어쨌든 그런 국력을 소유한 제국이니만큼, 국가적 행사인 탄신연회의 규모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탄신연회 때 중요한 발표가 있을 거라는데?”
“아, 들었어.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를 발표한다던데?”
“그렇구먼! 황태자 전하도 민체스터 폐하를 이을 명군이 될 인재라는 소문이 자자하지?”
“그렇지. 이미 여러 분야에 전권을 위임받아 국정에 참여 중이신데, 그 능력이 대단하시다더군. 성격은 차갑지만, 능력은 황실의 핏줄 중에서도 역대 최고에 가깝다고.”
“하? 그런가? 정말 대단하군. 역시 로마노프 황가야! 그런데 자네는 그런 이야기는 다 어디서 들었나?”
“이 친구야. 맨날 술만 먹지 말고, 신문 좀 읽게. 신문에 다 나와 있어. 바람둥이 3황자, 검제(劍帝) 전하의 새로운 애인이 누군지도 보도됐던데?”
남자의 말처럼 브리티아 제국은 언론이 굉장히 발달해있었다.
경제, 정치부터 유명인사들의 가십까지. 언론의 자유도 비교적 높았다.
“크흠, 그나저나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는 누가 될까?”
“글쎄, 나도 궁금하네. 어질고 아랫사람을 아낄 줄 아는 현숙한 사람이 약혼녀가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황태자 전하의 성격이 다소 차갑다니 그런 여인이면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제발 좋은 사람이 약혼녀가 되었으면 좋겠군.”
그러면서 둘은 한참을 황태자와 곧 발표될 약혼녀에 대해 떠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 테레사 병원.
제국 시민들의 화제의 중심인 황태자와 엘리제는 진료를 보고 있었다.
“피로감은 좀 어떠신가요?”
“많이 좋아졌다.”
“몸이 무거운 느낌이나 기력 없음은요?”
“그것도 이제는 없어졌다.”
“가슴이 초조하거나, 두근거리는 느낌이 새로 생기지는 않았나요?”
몇 번이고 반복된 진료.
엘리제는 늘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다. 증상은 어떠하냐? 혹시 불편한 느낌이나 부작용이 생긴 것은 없느냐?
그리고 이런 문답들이 끝난 후 뭔가를 종이에 적어 내리고 약용량을 결정하였다.
“네, 약용량은 이대로 유지하면 될 것 같아요. 처방전 드릴 테니 약 받아가세요.”
진료가 끝났음을 알리는 말.
“... 다 끝난 건가?”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엘리제는 친절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론님?”
“... 아니다.”
그와 그녀의 진료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소녀는 딱 필요한 문답만 하고 친절히 인사를 했다. 말이 인사지 축객령이었다. 진료 끝났으니 나가보라고.
린덴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료 시간도 엄청 짧았다. 느낌상 다른 환자 진료 시간의 반도 안 보는 것 같았다.
‘꼭 이렇게 빨리 나가라고 해야 하는 건가?’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한 그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의사와 환자가 필요한 진료만 보고 헤어지면 되지, 무슨 시간을 더 보내겠는가?
물론 진료 시간이 짧긴 했으나, 그건 소녀가 정확히 필요한 진찰만 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헤어질 때마다, 가슴 속에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