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31화 (31/194)

00031  1-6 그와 그녀의 진료  =========================================================================

‘마음에 안 들어.’

그래. 왜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소녀가 의아하게 물었다.

“론님?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병에 대해 물어볼 게 있나요?”

린덴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다. 3일 뒤에 보지.”

“네,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여전히 친절한 인사.

그 친절한 인사가 괜히 눈에 거슬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 소녀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다음번만 오시면 더 오지 않으셔도 돼요.”

“...!”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안 와도 된다니? 이제는 더 오지 말라는 건가?”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

그 음성에 섞인 불쾌감에 놀란 엘리제는 답했다.

“아... 이제 좋아져서요. 한 번만 더 오시면 될 것 같아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병원에 안 와도 된다는데, 왜 저런 반응이지?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 병이 안 나은 것 같아 불안해 그런가?

엘리제는 환자를 안심시키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병원은 안 올 수 있으면 안 오는 게 좋아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의사의 얼굴은 자주 안 볼수록 좋다고. 걱정하지 마시고 처방한 약 꾸준히 먹으면 다 좋아질 거예요.”

그렇게 설명하는데 할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 그래.”

그렇게 그날의 진료가 끝났다.

***

린덴은 초상(超上)능력을 해제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황궁에 복귀해 업무를 보았다.

많은 분야의 국정을 보는 그인지라,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사실 진료 때문에 3일에 한 번씩 테레사 병원까지 가는 것은 굉장히 무리하는 것이었다.

병원에 갈 여유를 만들기 위해 그는 나머지 시간을 무척 바쁘게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오지 말라니.’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면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었다.

병이 좋아져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되는 거니 오히려 기뻐해야 일. 그도 그건 알았다. 알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린덴은 고개를 돌렸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날카로운 인상.

그러면서도 조각을 다듬은 듯 잘생긴 얼굴. 차갑지만 아름다운 그 외모는 잘 벼려진 보검(寶劍)을 연상시켰다.

엘리제와 닮은 백금발을 보며 황태자는 그의 이름을 말했다.

“렌.”

렌 드 클로랜스 남작.

엘리제의 큰오빠이자 클로랜스 후작가의 후계자.

그리고 로열나이츠인 총-기사단(Rifle knightage)의 부단장, 제국에서 손꼽히는 오러 나이츠, 군부의 차기 실권자.

동시에 황태자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측근이자 유일한 친우였다.

“전하, 얼굴이 좋지 않습니다. 혹시 다시 몸이 안 좋아지신 것 아닙니까?”

“아니다. 괜찮아. 몸은 좋아.”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몸은 좋았다.

어의가 준 약을 복용할 땐 아무런 효과도 없었는데, 엘리제, 그녀가 처방한 약을 먹으니 몸이 정말 좋아졌다.

신기할 정도로. 이젠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 사실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빨리 나은 거야? 무슨 약을 처방했길래?’

빨리 나은 것은 분명 다행인 일이긴 하지만,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다 나았으니 이제 오지 말라고 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면 혹시 3황자 측이 무슨 일이라도?”

“아니야.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그러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혹시 곤란한 일이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자네 막내동생 때문에 그렇지 않나.

라고 말할 수도 없어, 황태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남작.”

“네, 전하.”

“자네 동생은 뭘 좋아하나?”

“...??”

렌 드 클로랜스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건 어째서...?”

“그냥. 사례할 일이 생겨서.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황태자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변명하듯 말했다.

‘고마움을 갚긴 해야 하니까. 란돌 경도 살려주고, 내 병도 치료해주고.’

그래, 이건 감사의 표시이지, 특별한 감정이 담긴 선물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황실의 일원으로서 은혜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황태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뭘 좋아하나? 자네 동생 엘리제는?”

렌, 엘리제의 큰 오빠는 그 물음에 고민에 잠겼다.

‘뭘 좋아하지?’

생각해봤으나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천상 군인인 그인지라, 동생이 뭘 좋아하는지 따위를 관심 두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맨날 동생을 혼내기만 했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고.

그는 그나마 떠오른 것을 답했다.

“먹을 것을 좋아합니다.”

“뭐?”

“특히 딸기 케이크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 ... .”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답변이었다.

감사의 표시로 딸기 케이크를 덥썩 사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른 것은 없나?”

“망고 푸딩이랑 바나나 타르트도... 우유는 싫어하고...”

“아니, 그런 것 말고. 뭐, 선물할만한 것으로!”

“... ...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친우를 보며 황태자는 혀를 찼다.

이 일밖에 모르는 이 같으니라고!

도움이 되지가 않았다.

“뭔가 선물을 하려는데... 뭐, 좋은 생각 없나? 자네는 영애들한테 고백할 때 어떤 선물을 했나?”

“... ... .”

역시 꿀 먹은 벙어리.

'내가 누굴 데리고 이런 질문을.‘

황태자는 상대를 잘못 선택한 자신을 탓했다.

평소 3황자 패거리를 비롯한 정적들에게 막힘없는 독설을 내뱉는 렌 남작이지만, 한 가지 지독히 못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여성을 상대하는 것!

무드 없고, 무뚝뚝하고, 재미없고, 독설가인 렌 남작은 여자에 완전히 젬병이었다.

지금까지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을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친우를 탓할 수도 없는 게 황태자 본인의 성격도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에만 빠져 산 그도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셋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는 이 황궁, 아니 론도 전체에서 최고로 꼽히는 바람둥이를 떠올렸다.

미하일 드 로마노프.

계승권에서 밀리는 황자이면서도 검제(劍帝)란 광오한 별명으로 불리는 이.

바로 그의 셋째 동생이자, 정적인 3 황자였다.

‘미하일.’

린덴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정적이라도 동생에게 특별한 유감은 없다.

하지만 ‘그날’의 사건을 일으킨,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갔던, 자신의 삶을 무채색의 지옥으로 만든 ‘그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때, 총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독설가인 렌 남작이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보석은 어떻습니까?”

“보석?”

“네, 생각해보면 엘리제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반짝이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드레스도 항상 보석 달린 것을 좋아했고요.”

“보석. 그렇군.”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성의를 표시하기 좋은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여자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클로랜스 영애도 좋아할까?’

그는 테레사 병원에서 일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허름한 진료복에 보석은커녕 간단한 장신구도 하지 않고 있던,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던 모습.

그런 그녀와 보석은 왠지 매칭시키기 어려웠으나, 신뢰하는 수하이자 그녀의 오빠가 하는 말이니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시종에게 일러 선물용 보석을 마련했다.

영롱한 붉은빛을 내는 루비였다.

그리고 3일 뒤 마지막 진료를 받으러 가, 진료가 끝난 후 감사의 선물을 내밀었다.

***

“사양하겠어요.”

1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 ... .”

칼같이 단호한 거절에 린덴은 잠시 말을 잃었다.

“어째서지?”

“이런 걸 바라고, 란돌 경이나 론님을 치료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감사의 표시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의사예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당연한 일.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 이런 과분한 선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 ... .”

그러면서 그녀는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게 친절히 미소 지었다.

“좋은 마음으로 주신 것은 알고 있어요. 마음은 감사합니다.”

“... ... .”

“하지만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이런 선물을 받을 수는 없어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가 만약 간단한, 그러니까 과일이나 과자 같은 성의만 담긴 선물을 주었다면 기쁘게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선물,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루비를 어떻게 받겠는가?

그건 그녀의 직업윤리가 허락지 않았다.

지구의 한국에서 가난하게 의사 생활을 할 때도 이런 촌지(?)는 절대 받지 않았었다.

“알겠다. 미안하군. 괜한 선물을 주어서.”

“기분 상하셨으면 정말 죄송해요.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아. 다만.”

그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예상한 대로랄까? 연애 바보 렌 남작의 조언을 따를 때부터 왠지 느낌이 안 좋긴 했다.

다만 자신이 알던, 철없고, 사치와 허영만 밝히던 어린 엘리제가 이렇게 변한 게 놀랍달까? 솔직히 조금은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뭘요?”

“난 절대 빚을지지 않는다. 너한테 받은 도움들을 어떻게 갚지?”

“아, 그건. 진료비를 내는 것으로. 귀족이니 분명 과다 청구되었을 텐데...”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알량한 진료비를 말하는 건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닌 걸 알지 않나?”

“괜찮은데...”

“원하는 걸 말해. 난 빚지고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누가 보면 도움을 받은 사람이 아닌, 빚 독촉하는 사람처럼 권위적인 목소리였다.

결국, 엘리제는 말했다.

“딸기 케이크요.”

“뭐?”

“저 딸기 케이크 좋아해요. 혹시나 나중에 우연히 만날 일이 있으면 딸기 케이크나 한번 사주세요. 이왕이면 파이크 거리의 비아 제과점 걸로요. 거기 케이크가 엄청 달면서도 상큼하거든요.”

“... ... .”

남자가 입을 다물자, 엘리제가 진심이라는 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저 딸기 케이크 엄청엄청 좋아해요. 그런데 집에선 어머니가 몸에 안 좋다고 잘 못 먹게 한단 말이에요.”

작은 오빠인 크리스가 보면, 뒷목을 잡을 만큼 귀여운 목소리였다.

항상 어른보다 더욱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그녀가 순간 또래 어린 소녀처럼 보였다.

“망고 푸딩은?”

“네?”

“망고 푸딩은 안 좋아하나?”

“아, 네! 그것도 좋아해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바나나 타르트도 좋아하지? 우유는 싫어하고.”

“...!”

엘리제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눈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았다.

저 남자가... 평생 절대 안 웃을 것 같은 남자가 옅게 미소 지은 것이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파이크 거리의 비아 제과점. 딸기 케이크. 그것뿐 아니라, 망고 푸딩, 바나나 타르트까지.”

“...!”

그 미소에, 알 수 없게 가슴이 떨렸다.

두 번의 삶.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난 삶을 포함해 처음으로 마주하는 남자의 진실 된 미소였다.

과거 그토록 바라던 그 미소.

“모두 실컷 먹게 해주지. 앞으로 말이야.”

<1막 : Wish - Fin>

<2막 : 小和田 雅子 ??? - Start>

!! 내일 (토요일 00:07)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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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 프리미엄 연재로 전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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