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2-1 탄신연회 %3C유료 연재 시작 편입니다!!%3E =========================================================================
그때 한 중년의 귀족이 그들에게 다가와 엘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오, 후작. 웨일에서 늘 이야기 많이 듣고 있소.”
“아, 공작 전하.”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
브리티아 섬 중, 론도의 서쪽 지방, 웨일의 대귀족인 하버 공작이었다.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클로랜스 가의 차남, 크리스라고 합니다.”
“경도 이야기 많이 들었소. 행정부의 촉망받는 인재라던데? 고생이 많소.”
그러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공작의 눈치를 받고,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아마 웨일 지방의 일로 논한 일이 있는 듯했다.
새어머니도 오랜만에 만난 친우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덕분에 엘리제는 자연스레 홀로 연회장에 남겨졌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구석 어디에 쉬고 있을 만한 곳 없나?’
예전이라면 몸이 아파도 어떻게든 연회를 즐기려 했겠지만, 지금은 별 관심 없었다.
아예 밖에 나가서 앉아 있고 싶었지만 오자마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기, 저 구석. 저기면 쉴 수 있겠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찾아내 걸음을 옮겼다.
“하아…….”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걸었다고, 어지럽고 머리가 아팠다. 온몸이 때린 듯 아파 아무 데나 눕고 싶었다.
‘빨리 돌아갈 수 있으면…….’
하지만 황제가 축일 기념문을 낭독할 때까지는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어떻게 버틸지 막막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황태자 전하 납시오!”
“……!”
엘리제는 놀란 마음이 들었다.
‘황태자가 벌써?’
황태자면 린덴 드 로마노프. 이전 삶, 그녀의 남편이었던지라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연회를 지독히 싫어해, 항상 끝나기 직전에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벌써?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많은 이의 인사를 받으며, 황족의 자리에 올라간 그가 주변에 기립한 이들을 놔두고,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모습.
“……?”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전하?”
주변의 대신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멀리 구석에서 그 모습을 보던 엘리제도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정확히.
수많은 인파의 장벽을 뚫고 정확히 그녀가 자리한 구석으로 꽂혔다.
“……!”
그 시선과 마주한 엘리제는 순간 흠칫했다.
‘날 보는 건가?’
엘리제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서로를 식별하기도 어려운 먼 거리. 그녀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것이고, 알아본다 해도 자신을 저렇게 빤히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주변에 누가 있지?’
옆을 둘러보았으나, 그녀 외에는 몇몇 시종밖에 없었다.
‘모르겠네.’
어쨌든 자신을 보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도 연회에 오겠구나. 언제쯤 올까?’
황태자를 보니 문득 ‘그’가 생각이 났다.
‘바람둥이라서 맨날 연회에 일찍 도착해 영애들을 꼬셨는데. 오늘은 안 보이네?’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황태자와 더불어 또 다른 황족.
론도 최고의 바람둥이.
그리고 이전 삶, 그녀의 유일했던 친구.
‘참 신기하지. 가까워야 할 사람들과는 그렇게 파국을 맞고, 가장 멀었어야 할 ‘그’와는 친구로 지냈고.’
어차피 자신은 황실과 상관없는, 의사의 삶을 살 것이기에 황태자는 물론 ‘그’와도 인연을 가질 일이 없겠지만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었다.
자신 혼자만 기억하는 추억이겠지만 ‘그’와의 인연은 나름 소중했었으니까.
“어머, 이게 누군가요? 오랜만이에요, 클로랜스 영애.”
그때, 높은 고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신경질적인 외모의 귀족 아가씨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더라?’
“저…… 실례지만 누구신지……?”
“뭐예요? 지금 제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하! 기가 막혀!”
귀족 아가씨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엘리제는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진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쩌지?’
저 아가씨는 그녀를 몇 달 만에 만나는 것이겠지만, 엘리제는 2번의 삶, 30년이 넘어 만나는 것이었다. 스쳐 지나간 인연까지 잘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아픈 머리로 고민해 간신히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버몬트 영애.”
“기억해 주셔서 참 영광이군요! 지난번 영애가 말씀했던 대로 클로랜스 가문에 비하면 참 보잘것없는 가문인데!”
엘리제는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보아하니 시비를 걸러온 것 같았다.
‘버몬트 백작가. 귀족파 대표 가문 중 하나.’
버몬트 백작가는 차일드 후작을 필두로 하는 귀족파 가문 중 하나였다.
황제파의 수장인 클로랜스 가문과는 당연히 앙숙 사이.
‘사교계에서도 황제파, 귀족파로 나뉘어 참 많이 으르렁거렸었지.’
가문의 정치적인 문제는 사교계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전 삶, 그녀는 황제파 귀족 영애들의 우두머리로 귀족파 영애들과 수없이 싸웠었다.
물론 그건 지금 시점으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황태자와의 약혼이 공표된 뒤에 벌어질 이야기로, 아직 그녀는 사교계에 별 인지도가 없었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고. 성격만 못됐을 뿐, 그럴 만한 카리스마도 부족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버몬트 영애에게 이전 무슨 잘못을 했던 거지?’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 시비를 거는 것은 분명 자신이 이 영애에게 어떤 잘못을 했던 탓일 것이다.
‘뭐였을까?’
고민한 끝에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거였군.’
대단한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한 당사자에겐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을 터.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버몬트 영애.”
“뭐죠?”
“이전에 영애의 가문에 대해 철없이 말했던 점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러고 엘리제는 머리를 숙였다.
“……!”
그 생각지도 못한 사과에 버몬트 영애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시비를 걸러 왔으나 이런 반응은 상상도 못했다.
저 오만하고, 자신만 아는 클로랜스 영애가 이런 사과라니?
혹시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싶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사과였다.
“이런다고 당시의 불쾌감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어려 잘 모르는 마음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 그렇게까지 말하니 저도 넘어가죠.”
당황한 버몬트 영애는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가 아는 엘리제는 절대 이런 사과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클로랜스 가문에 대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그녀가 이렇게 선선히 고개를 숙이다니?
하지만 엘리제의 생각은 이랬다.
‘잘못했으면 사과를 하는 것이 맞지. 잘못했는데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그것이 오히려 가문의 명예를 먹칠하는 것일 터.’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사과할 수 있었다.
그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잘못을 알고도, 외면하는 것이 더 자존심을 떨어뜨리는 것이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랜만이에요, 클로랜스 영애. 잘 지내셨나요?”
일반 귀족 영애와 다른 당당하고 시원시원한 음성.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두 번의 삶이 지났지만, 선명히 기억나는 목소리였다.
과연 똑똑히 떠오르는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지구의 모델같이 큰 키.
호리호리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
약간은 짙은 피부색은 건강하면서도 시원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병약해 보이는 엘리제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미인.
“차일드 영애.”
그녀는 다름 아닌 귀족파의 수장인 차일드 가문의 공녀였다!
“다행이네요. 제 이름은 기억해 주어서.”
유리엔 드 차일드.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똑같은 말이지만, 버몬트 영애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비꼬는 게 아닌,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는 듯한 음색.
실제로 비꼬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리엔,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차일드 영애.’
엘리제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독사 같은 차일드 후작과 다르게 유리엔과는 여러모로 애증이 교차하는 사이였다.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좋기는커녕 원수 같았다.
차일드와 클로랜스.
가문끼리 지독한 앙숙이었고,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유리엔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황태자를 짝사랑했었다.
즉, 그녀는 적대 가문 출신인 것도 모자라 개인적으로는 연적이었던 것이다.
‘정말 지독히도 싸웠었는데.’
문자 그대로,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원수처럼 지냈었다.
당시에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엘리제는 씁쓸히 생각했다.
지구에 살며 이전 삶을 떠올릴 때. 유리엔 생각을 가끔 했었다.
가문의 입장이 다르고, 같은 사람을 사랑했을 뿐.
그녀는 객관적으로 참 멋진 여성이었다. 돈놀이꾼 차일드 후작의 딸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라리 내가 아니라 그녀가 황후가 되었으면 여러모로 좋았을지도 모를 텐데.’
심지어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유리엔이 황태자와 결혼했으면, 자신처럼 비극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파도 황실의 편으로 어느 정도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삶에선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도 좋겠구나. 그토록 황태자를 사랑했으니까.’
정치적 입장상 어려울 가능성이 높지만 자신이 빠질 것이니 혹시 몰랐다.
그녀가 황태자를 사랑하는 감정도 보통 깊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죠?”
유리엔이 물었다.
엘리제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차일드 영애.”
“…….”
유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제의 말투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싹수없던 평소와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목소리에 은은한 반가움이 숨어 있었다.
‘뭐지? 내가 잘못 느낀 거겠지?’
하지만 그녀가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엘리제는 실제로 그녀를 반가워하고 있었다. 엘리제도 자신의 감정이 신기했다.
‘그렇게 싸웠는데,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유리엔은 그런 엘리제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영애는 조금 이상하군요.”
사실 유리엔이 엘리제에게 온 것은 좋은 의도가 아니었다.
평소 도가 넘치게 예의가 없는 엘리제를 따끔하게 혼내려고 한 것이었는데, 이건 뭐. 맥이 빠졌다.
못된 살쾡이가 순한 토끼로 변하기라도 한 느낌이다.
“…….”
“…….”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유리엔은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로, 엘리제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그런데 한참 엘리제를 살피던 유리엔은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챘다.
“안색이 안 좋은데, 몸이 안 좋으신가요?”
“네, 조금 감기 기운이 있네요.”
“조심하시지 그랬어요. 요즘 감기가 매우 독하던데.”
말을 하고 유리엔은 아차 후회했다.
서로 이런 말을 나눌 사이가 아닌데.
하지만 클로랜스 영애의 반응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걱정에 감사드립니다, 영애. 영애께서도 건강 조심하도록 하세요.”
공손한 감사.
유리엔 공녀는 기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도대체 넌 누구냐 하는 눈빛이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쉬도록 하세요.”
그러고 유리엔은 등을 돌렸다.
그런데 엘리제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저! 영애.”
“네?”
“저…….”
엘리제는 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유리엔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으나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
사실 엘리제는 유리엔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당당하고 멋진.
제 아버지와 다르게 인애(仁愛)를 갖추고, 마지막 순간에는 기품을 잃지 않았던 여자.
그게 그녀가 기억하는 유리엔이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자신과 같았지만, 그녀는 자신과 전혀 다른 여인이었다.
‘친구가 되면 좋겠지만.’
의사 생활을 하다 시간이 나면 저런 친구와 같이 차와 케이크를 먹으며 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서로의 집안을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아.”
유리엔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아, 아니에요.”
유리엔은 알 수 없다는 듯 엘리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자신을 저런 눈빛으로 본단 말인가?
결국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부담되니 그런 눈으로 그만 보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차나 한잔해요.”
“……!”
그 말에 엘리제는 밝게 웃었다.
“네, 그럴게요. 꼭.”
물론 둘에게 그럴 기회가 올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우연이라도 한 번쯤 그녀와 차를 마셔보고 싶었다.
“후우, 그러면 가볼게요.”
“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 참. 클로랜스 영애.”
“……?”
유리엔이 물었다.
“오늘 발표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아세요?”
“네? 무슨 말인지?”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 말이에요. 오늘 황제 폐하께서 축일 기념문 낭독 후, 누가 전하의 약혼녀가 될지 발표한다셨잖아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정말요?”
“네, 몰라요.”
하지만 유리엔은 믿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혹시 영애 아니에요?”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