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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34화 (34/194)

00034  2-1 탄신연회  =========================================================================

“……!”

엘리제의 표정이 굳었다.

지난 삶, 약혼 발표 때가 떠올랐던 것이다.

“버킹엄 공작의 공녀, 프러시엔 공국의 공녀, 스페냐 왕국의 공주, 합스부르엔 왕가의 왕녀 등 여러 후보가 있지만 사실 영애가 가장 유력하지 않나요?”

“아니에요. 전, 절대로 아니에요.”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난 삶에선 자신으로 발표가 났었지만 이번 삶은 달랐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군요.”

유리엔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참 부럽네요.”

깊은 슬픔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전 삶의 자신처럼 황태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와 황태자 사이에는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깊은 간극이 있었다. 무저갱보다 깊은 간극이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하여튼 쉬도록 하세요.”

“네, 영애. 좋은 시간 되세요.”

유리엔이 물러가고, 엘리제는 기둥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녀와 재회한 게 반갑긴 했지만 대화를 나누었더니 더 어지러웠다.

‘조금만 쉬자. 빨리 집에 갔으면.’

다행히 구석진 자리라 아무도 자신을 보는 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끝날 때까지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를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아니, 오히려 수많은 시선이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

오늘 엘리제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몸이 안 좋아 안색이 하얬지만, 그게 가녀린 매력을 돋우었다. 수많은 귀족 영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꽃.

연회장의 수많은 귀족 영식이 그런 그녀를 보며 가슴 설레 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에게 직접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곧 있을 황태자의 약혼녀 발표!

혹시 그녀가 그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물론 후보자가 여럿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그녀가 가장 유력한 후보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

“마음에 안 드는군.”

그녀를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황태자인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뭘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정확히는 그녀를 보고 있는 남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탄신 연회에 왔으면 정숙히 연회나 즐길 것이지, 뭘 저렇게 쳐다보고 있단 말인가?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그녀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 저렇게 입고 와서. 저렇게 차려입고 오니 남자들이 쳐다보잖아.’

사실 탄신 연회에 오는데 예쁘게 단장하고 오는 게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그냥 다 마음에 안 들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전하?”

친우, 렌의 물음에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혹시 심기를 불편하게 한 자라도? 누군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자네 막내동생이다만.

이렇게 말할 수도 없어 린덴은 입술을 비틀었다.

“렌.”

“네?”

“자네 동생 말이야. 혹시 몸이 안 좋은가?”

초상(超上)능력자이자, 오러 나이츠인 황태자는 시력이 일반인보다 훨씬 좋았다.

저 멀리 보이는 안색이 하얬다. 평소에도 하얬지만 좀 더 창백한 느낌?

계속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있다가 기둥에 기대 있는 모습도 이상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렌 남작.

동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별로 관심도 없어 보였다.

도움 안 되는 친우를 보며 한숨을 내쉰 황태자는 고민했다.

‘한번 가볼까?’

하지만 이곳 자신의 자리와 그녀가 있는 곳은 너무 멀었다. 커다란 연회장의 끝과 끝?

그리고 거리는 둘째 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국정대신들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왜 저런 곳에 있는 거야? 마음에 안 들게.’

그녀가 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또 하나 추가되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

황태자의 눈썹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림같이 잘생긴 남자가 엘리제에게 다가가 춤을 신청한 것이다!

더구나 저 남자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린덴의 눈이 딱딱히 굳었다.

***

“보석처럼 아름다운 레이디. 저에게 레이디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순간 엘리제는 그 말을 못 알아들었다.

머리도 아팠고, 춤 신청을 받아본 지 너무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레이디?”

“아…… 저한테 말씀하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거렸다.

길거리를 걸으면 누구나 쳐다볼 만한 미남이었다.

부드러운 느낌이었는데, 갈색 머리칼이 자연스럽게 곱슬거렸다.

그런데 뭔가 브리티아 제국인과 느낌이 달랐다.

‘프랑소엔인?’

무엇보다 언어.

남자가 그녀에게 건 말은 브리티아어가 아니라, 혀를 많이 굴리는 서 대륙 본토의 프랑소엔어였다.

전통의 강국인 프랑소엔어는 서 대륙 각국의 귀족 사회에서 공용어처럼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제도 무리 없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레이디의 아름다움에 영혼을 빼앗긴 제 이름은 루이라고 합니다. 프랑소엔 공화국의 사절로 탄신 연회에 참여했습니다.”

“……!”

그의 이름을 들은 엘리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루이 경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남자는 은은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의 만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맙소사, 루이라고?!’

그녀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봤던 초상화랑 똑같아. 동명이인이 아니야. 그 루이가 분명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막의…… 전갈?”

“……!”

남자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풀어졌다.

“고결한 레이디의 입에 담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별명입니다. 그냥 루이라 불러주십시오.”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

프랑소엔 공화국의 통치자인 총통 시몬 니콜라스의 외아들이자 광활한 검은 대륙의 서북부를 평정한 프랑소엔 공화국 최고의 명장!

‘몽셀 왕국을 이용해 크림원정군의 뒷목을 자르려는 계책을 낸 것도 이 남자잖아.’

엘리제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그 계책으로 크림으로 원정 나간 제국군은 궤멸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야.’

곧 다가올 훗날, 2차 크림원정 때 이 남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제국군이 피해를 보았는지 모른다.

지난 삶에서 작은오라버니가 사망한 것도 크리스의 부대가 이 남자의 전략으로 몰살당한 탓이었다.

‘그런데 왜 루이 니콜라스가 탄신 연회에 온 것이지? 원래 공화국과 제국은 서로 친선 사절을 보내지 않는데.’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전 삶에 대한 기억과 국제 정세가 얽혔고, 곧 결론을 돌출했다.

‘설마……! 그 이유 때문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차라리 지금 자신의 추측이 터무니없는 것이면 좋겠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면 저 니콜라스가 굳이 직접 브리티아까지 올 이유가 없다.

“왜... 저에게 춤을?”

“아름다운 레이디와 춤을 추는 것은 모든 남자의 영광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전부터 레이디와 만나길 소망했었고요.”

“저를... 말이요?”

루이 니콜라스는 미소 지었다.

입가만 올라간 웃음.

“네. 제 계획을 막은 브리티아 제국의 희대의 군략가가 누군지 궁금했거든요.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

엘리제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내가 몽셀 왕국의 움직임을 예측한 것을 알고 있어?’

그녀는 루이 니콜라스의 눈을 바라봤다.

그림 같은 그 눈매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 같은 눈빛.

루이 니콜라스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레이디여. 저에게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

엘리제는 머뭇거렸다.

솔직히 춤추고 싶지 않았다.

몸도 너무 안 좋았고, 더구나 상대가 공화국의 니콜라스라니! 엄밀히 따지면, 이전 삶에서 작은오라버니의 원수 아닌가?

하지만 특별한 사유 없이 춤 신청을 거부하는 것은 실례였다.

웬만한 신분이면 실례를 범해도 상관없겠으나, 니콜라스는 공화국에서 왕자에 버금가는 신분의 인물이었다.

30년을 독재한 현 총통의 아들이자, 차기 총통으로 강력히 거론되고 있으니까.

‘하아, 누가 말려주기라도 했으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데 하얀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니콜라스와 마주 닿았을 때였다.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만.”

“……!”

“거기까지.”

깊은 흑발, 초상능력이 담긴 금안(金眼).

조각처럼 아름답지만 지독히 차가운 인상의 남자, 황태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제는 놀라 살짝 무릎을 숙였다.

‘황태자 전하가 어째서 이쪽에?’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취한 그녀와 달리 니콜라스는 마치 친우에게 하듯 유들유들한 말투로 인사할 뿐이었다.

“검은 대륙에서 2년 전 뵌 후 처음이군요. 오랜만입니다, 전하. 아니, 전하가 아니라 검은 대륙에서 부르던 영광된 존칭, 공제(空帝)라 불러드릴까요?”

하지만 황태자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린덴은 아직도 엘리제와 마주 잡고 있는 손을 바라봤다.

“놔라.”

“네?”

“말 못 알아듣나? 그 손 놓으라고.”

마치 북풍한설 같은 말투.

평소보다 더욱 차가웠다.

“……!”

니콜라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유들유들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제가 왜 그래야죠? 이곳 브리티아는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춤을 청하지도 못하나요?”

“싫어하잖아.”

“네?”

“넌 눈이 나쁜 건가? 싫어하는 얼굴이 보이지 않나?”

“……!”

드디어 니콜라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엘리제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물론 니콜라스와 춤을 추긴 싫다.

누군가 말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왜 갑자기?

심지어 기분도 굉장히 불쾌해 보인다. 지난 삶, 부부였던 그녀는 그의 기분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똑같이 차가운 표정이지만 저건 굉장히 불쾌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가 왜 불쾌해하지?

“알겠습니다. 제가 눈치 없이 실례했군요.”

니콜라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과장되게 무릎 꿇으며 엘리제에게 인사했다.

“아름다운 레이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혹시 다음에 다시 만날 운명적 기회가 저에게 찾아온다면, 그때 다시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다시 만날 날을 간절히 고대하겠습니다. 간절히 원하니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요.”

그는 프랑소엔 공화국의 예법대로 인사를 한 후 사라졌다.

그리고 연회장 구석에 단둘이 남겨진 두 사람.

“…….”

“…….”

엘리제는 어색하게 그를 바라봤다.

“저…… 감사합니다, 전하.”

“뭐가 감사하지?”

그 말에 엘리제는 고민했다.

진짜 뭐가 감사하지?

상대가 마음에 안 들었다 해도, 연회장에서 춤 신청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였다. 사실 그걸 막은 황태자의 행동이 이상한 것.

하지만 그래도 감사했다.

정말 저 남자와 춤추긴 싫었으니까.

그녀는 솔직히 답했다.

“저분과 춤추기 싫었거든요.”

“감사할 필요 없다.”

황태자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냥 그 녀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나선 것일 뿐이니까. 특별히 널 도와주려 한 것은 아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감사해요.”

그녀는 왜 그가 이렇게 나선 것인지, 불쾌해한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했다.

2년 전, 검은 대륙의 앙젤리에서 제국과 공화국은 전쟁을 벌였다.

황태자와 니콜라스, 모두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싸웠으니 감정의 골이 깊을 것이다. 만나자마자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아니, 그런데 원래 이렇게 사적인 감정으로 움직이는 분이셨나? 이전 삶에선 감정 표현 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는데? 그만큼 루이 니콜라스가 싫었나?’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더 이을 수 없었다.

황태자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레이디 엘리제.”

“전하?”

“괜찮다면 춤이나 추겠나?”

“……네?”

엘리제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뚝뚝한 금안(金眼)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춤 신청을 한 거야? 저 황태자가?’

눈을 크게 뜬 그녀에게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레이디 엘리제, 나와 춤을 춰주겠나?”

============================ 작품 후기 ============================

<내일 화요일 오전 09:07분에 올라갑니다.>

(-앞으로는 자정이 아닌, 오전 09:07분에 글이 올라갑니다.)

네, 프리미엄 연재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몇 분이나 따라와주실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이 따라오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글임에도 따라와 주신.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이 공지를 읽는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부족하니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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