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2-1 탄신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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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게 치장한 영애들, 풍성한 음식, 달콤한 술.
연회를 아름답게 하는 요소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 으뜸은 바로 춤이었다.
감미로운 음악에 맞춰 젊은 남녀가 한 몸이 되어 펼치는 앙상블.
그건 단순한 몸짓이 아닌, 감정이고 이야기였으며 예술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황궁 대연회장의 한복판.
또 하나의 예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오, 황태자 전하께서?”
“정말 전하가?”
사람들은 놀라 연회장의 가운데를 바라봤다.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가 작은 소녀와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 만에 춤을 추시는 거지?”
“최근엔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신기하군.”
“그런데 저 레이디는 누구지?”
“재상가(宰相家)의 클로랜스 영애인 것 같군.”
연회장 모두가 둘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누군가 중얼거렸다.
“아름답군.”
홀린 듯한 목소리.
“저 춤이 저렇게 아름다운 춤이었나.”
그 말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래,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그러면서 조금은 빠른 음악.
그에 맞춘 절도 있으면서도 강인한 남자의 리드와 옅은 드레스를 입은 채 부드럽게 남자를 따라가는 소녀.
격식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춤이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황태자님이야 원래 춤을 잘 추시기로 유명하지만, 저 영애도 대단하네요.”
“그러게요.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것으로 아는데.”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둘의 춤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그나저나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저렇게까지 추기 어려운데, 서로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호흡이 완전히 맞는 것 같아요. 대단해요.”
춤은 혼자 추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호흡이 맞아야 한다.
둘의 춤은 장시간 손발을 맞춰본 이들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치 천생연분 부부처럼 한 호흡으로 추는 것 같았다.
“이전에 여러 번 같이 춰본 것은 아니겠죠?”
“에이, 설마요.”
연인이나 부부가 아닌 한, 한 상대와 반복적으로 춤을 출 일은 없었다.
“혹시 모르죠. 무려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이니 전하와 혹시 만남이 있었을 지도요.”
“어머,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오늘 발표될 약혼녀도 역시 저 클로랜스 영애일까요?”
귀부인들은 수다를 떨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사실 그들의 추측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는 몰라도, 엘리제는 그와의 춤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삶, 둘은 부부였으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클로랜스 영애, 엘리제는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이네. 전하와의 춤.’
약혼녀, 황태자비, 황후.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으나, 그의 짝으로 지낸 세월이 9년이었다.
춤을 지독히 싫어하는 그였지만, 황태자로서 나서야 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때마다 그녀가 파트너로 호흡을 맞췄다.
‘리드. 여전하시구나.’
황태자의 춤은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무뚝뚝하고 절제된, 그러면서도 강한.
황족의 예법으로 다져진 그답게 완벽한 춤이었으나,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저 리드를 따라가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었는데.’
처음 그와 춤을 추고, 망신을 당한 후 정말 발이 까지도록 연습했었다.
열심히 해서 그와 어울리는 춤을 춰 그가 자신을 돌아봐 주길 바랐었다.
‘옛날 일이지.’
그때의 생각이 나며 기분이 씁쓸해졌다.
‘뭐, 오늘이 특별한 것일 뿐. 전하와 다시 이렇게 춤을 출 일은 없겠지.’
오늘 왜 자신에게 춤을 신청했는지 모르겠다.
꼭 필요한 상황 아니면 절대 춤을 추지 않으셨는데.
더구나 지금 자신은 그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모르겠다. 머리 아파. 빨리 집에 돌아갔으면.’
그런데 그때, 음악의 분위기가 빨라지며, 갑자기 그의 리드가 변했다.
거칠어진 느낌!
“……?!”
“무슨 생각을 하지?”
희미하게 불쾌감이 섞인 낮은 음성.
“그냥…… 아무 생각도요.”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황태자의 손이 갑자기 허리춤으로 파고들었다!
“……?!”
엘리제는 놀라 흡 숨을 들이켰다.
그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작게 말했다.
“집중해라.”
“네…….”
두근.
이제 아무런 감정이 없음에도 갑작스레 밀착한 탓일까? 허리로 느껴지는 그의 손에, 코로 느껴지는 그의 체향에 그녀의 가슴이 덜컥 떨렸다.
“저, 저기…… 전하.”
“뭐지?”
“조, 조금…….”
“뭘 말인가?”
그 밀착한 상태로 황태자는 정신없이 그녀를 리드했다.
무언가에 화라도 난 것처럼.
강렬하고, 격렬한 리드였다.
‘왜 갑자기?’
이전 삶, 이런 식의 리드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그였다.
엘리제는 혼란스러워하며 정신없이 그를 따라갔다.
“…….”
한편 린덴은 그런 그녀를 금색 눈으로 내려다봤다.
실제로 지금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왜 저런 표정이란 말인가?
저 씁쓸한 얼굴이라니?
자신과 춤을 추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런 표정이 나타난단 말인가?
자신과의 춤이 그렇게 싫은 건가?
‘마음에 안 들어.’
불쾌한 마음이 춤에 그대로 드러났다.
부드러움이 적어지고 거칠고, 강렬한 리드가 이어졌다.
지켜보던 이들이 그 모습에 감탄성을 토했다.
“오오, 역시 태자 전하!”
“강렬하군!”
황태자의 춤에서 역동적인 힘과 남성성이 강렬히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 강렬한 춤을 무리 없이 따라가는 엘리제에게 꽂혔다.
“저 영애도 정말 대단하군. 저 어려운 춤을 저렇게나 호흡을 잘 맞추다니.”
“그러게요. 역시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네요.”
황태자도 다소 놀란 시선으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하얀 얼굴의 소녀는 그다지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자신의 리드를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춤이 어찌나 그 자연스러운지, 마치 한 호흡으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렇게나 상대와 앙상블이 잘 맞는 춤을 추는 것은 처음. 이런 파트너와 함께라면 몇 번이고 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음악의 한 소절이 끝나 둘의 춤도 끝이 났고 황태자는 아쉬움을 느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하.”
엘리제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예를 올렸다.
“…….”
황태자는 잠시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참 알 수 없는 소녀였다.
프랑소엔 공화국의 계책을 꿰뚫는 식견, 믿을 수 없는 의학 실력에다 더구나 이런 춤 솜씨까지?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것 투성이였다.
그렇게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단 것을 떠올렸다.
“어디 몸이 안 좋은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하지만 고개를 젓는 그 모습이 더 안 좋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그는 손에 낀 장갑을 벗고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
“어머?”
갑작스런 스킨십에 둘을 보던 사람들이 놀람을 토했다.
“저, 전하? 왜?”
엘리제도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열이……!’
엘리제의 이마에서 고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춤을 출 때는 장갑을 끼고, 옷 위로만 접촉이 있어서 전혀 못 느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이랬던 것이지?”
“아…… 까부터요.”
황태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창백하다고는 느꼈지만, 이 정도인지는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아픈 줄 알았으면 춤 따위는 당연히 신청도 안 했을 것이다.
‘그렇게 병원에서 무리하더니, 결국!’
그는 론으로 그녀에게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항상 산더미 같은 환자들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저 작은 몸으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그렇게 무리하더니! 이렇게 아플걸!’
그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따라와라.”
“네?”
“이리로 따라와!”
“……?!”
***
“저, 전하. 이곳은?”
엘리제는 당황해 물었다.
그가 그녀를 이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황족 전용의 휴게 라운지였다!
아무리 클로랜스 가문의 그녀라도 예법상 이곳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오로지 이 제국을 지배하는 혈통, 로마노프가의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니까.
하지만 황태자는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앉아.”
“하, 하지만…….”
“난 두 번 이야기하는 것 싫어한다. 명령이야. 앉아.”
그 말에 결국 엘리제는 소파에 앉았다.
사실 아픈데 오래 서 있느라 너무 힘들었다.
‘편해…….’
거의 침대와 다름없는 안락함의 소파였다. 고급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라틴제의 가죽이 지친 그녀의 몸을 감쌌다.
‘자고 싶다.’
이대로 아침까지, 아니, 최소 폐하의 축일 기념문 낭독 직전까지만이라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그가 말했다.
“조금 자도 괜찮다.”
“…….”
“혹시 다른 로마노프가의 사람이 오면 나와 같이 왔다고 이야기하고.”
엘리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바이긴 하지만, 오늘 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오늘 왜 이러는 것이지?
“저…… 전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의 그에게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혹시 저를 신경 써주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황태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게…….”
엘리제는 이걸 말할까 말까 머뭇거리다가 말을 삼켰다.
-전하께서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래, 그는 자신을 싫어했다.
지난 삶 뼈저리게 그 사실을 느꼈고 고통받았다.
당시 그녀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고, 비뚤어지며 극단적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결국 비극적인 파국을 맞게 되었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서 그렇다.”
“네?”
“네 몸 상태가 이런지도 모르고 무리하게 춤을 추게 해 미안해서 데려온 거다.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니, 신경 안 써도 된다.”
“아……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그에게 다른 마음이 있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배고프지는 않나?”
“조금…… 요.”
아침부터 열이 나서 거의 먹은 것이 없었다.
고열로 지금도 입맛은 없지만 살짝 허기가 졌다.
‘밥은 무리고, 단 디저트나 먹었으면.’
그런데 그때 그가 말했다.
“딸기 케이크나 좀 가져오라고 하지.”
“……!”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이었다.
딸기 케이크면 5조각도 먹을 수 있었다!
“싫어하나?”
“아니, 좋아해요!”
“그래. 이야기해 놓을 테니, 먹고 잠시 눈을 붙이도록. 축일 기념문 낭독까진 아직 시간이 더 남았으니까.”
그러고 그는 연회를 돌아가려는 듯 등을 돌렸다.
“전하.”
“왜 그러지?”
엘리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너 때문에 그런 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도록.”
엘리제는 미소 지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좋은 연회 되세요.”
“……!”
그 순간, 황태자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려다 다시 닫았다.
“……?”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도 빨리 낫도록.”
그러고 그는 사라졌고, 남겨진 그녀는 머리를 갸웃했다.
빨리 나으라고?
지난 삶, 그와 부부로 살며 수시로 아팠던 그녀지만 저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애초에 저런 위로나 걱정의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시구나.’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약혼녀로 내정된 사람은 누구일까?’
예정대로 발표를 진행한다 했으니, 분명 내정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누구랑 이어져도 행복하게 지냈으면.’
안 좋게 끝났지만 그래도 한때 부부였고 자신이 많이 사랑하던 남자다.
이번 삶에선 그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잠시 후.
시종이 쟁반에 무언가를 담아 가져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였다!
‘와아.’
엘리제는 아픈 것도 잠시 잊고 침을 삼켰다.
마침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파이크 거리에 비아 제과점의 딸기 케이크와 똑 닮게 생겼다.
포크로 한 모금 입에 담은 그녀는 행복감을 느꼈다.
‘맛있어. 비아 제과점만큼이나.’
역시 황궁이었다.
론도(Londo) 제일의 딸기 케이크 집이라는 비아 제과점만큼 깊고 고급진 단맛을 내다니.
수준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맛도 거의 똑같을 정도로 흡사했다.
그때 옆의 시종이 웃으며 말했다.
“맛이 괜찮으시죠?”
“네, 맛있어요.”
“이번에 황궁에 어떤 높은 분의 요청으로 새로운 디저트 쉐프가 들어왔거든요. 파이크 거리의 비아 제과점에서 일했다던데.”
“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비슷하다 했더니, 비아 제과점의 쉐프가 만든 거였어?
‘이제 그러면 비아 제과점에 가도 똑같은 딸기 케이크는 못 먹겠네. 아쉽다. 황궁 사람들 말고는 이제 맛을 못 보겠구나. 황족이나 그 가족 중 비아 제과점의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나? 이제 그분은 이 케이크를 실컷 먹을 수 있겠네.’
그녀는 그 이름 모를 누군가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2-1 탄신 연회 - fin>
<2-2 뜻밖의 대형사고(?) - start>
============================ 작품 후기 ============================
내일 수요일 오전 09:07분에 뵙겠습니다!
앞으로는 늘 오전 09:07분에 뵙겠습니다.
Ps. 프리미엄까지 따라와주신 분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ㅠㅠ 독자님들이 남겨주신 코멘트들을 확인하고 정말 많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일일이 답변을 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모든 분들께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립니다.
Ps2. 여러 독자분들이 질문하셔서... 엘리제는 대략 160-180화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총 7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금은 2막 小和田 雅子??? 의 초반부가 진행 중입니다. 다만 6막까지 쓴 후 감정선에 흐름을 봐서 만약, 6막 만으로 클라이맥스로 충분하다 판단이 될 경우, 7막은 생략할 예정입니다. 이에 따라서 분량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간편히 160-180화. +- 10화 정도의 오차가 날 수 있다고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