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39화 (39/194)

00039  2-3 검제(劍帝)  =========================================================================

<2-3 검제(劍帝)>

그날의 탄신연회는 그렇게 혼란과 경악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늦은 밤, 황궁의 어전.

한없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부디 통촉해 주시옵소서, 폐하!”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귀족이자, 클로랜스가의 가주, 재상 엘 후작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침통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딸이 황족의 몸을 시해하는 중죄를 저지르다니!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 딸은 그런 잘못을 저지를 아이가 아닙니다. 엘리제 그 아이가 비록 공작부인의 몸을 손상시키긴 했으나, 절대 좋지 않은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때 그 순간. 공작부인이 쓰러지고, 엘리제가 나이프로 공작부인의 목을 겨눌 때 엘 후작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저게 무슨?!

말릴 수조차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나이프가 공작부인의 목을 꿰뚫었고, 피가 솟구쳐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엘 후작의 부인은 충격에 기절해 버렸고, 그의 하늘은 무너져 내렸다.

하나뿐인 딸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딸이 공작부인의 시해범이 된 것이다!

아니라 부정할 수도 없었다.

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아니야! 내 딸이 황족시해죄라니! 그럴 리가 없어!’

항상 근엄한 후작이지만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엘리제 그 아이는 공작부인을 살리려 그런 게 분명해!’

후작은 똑똑히 봤다.

엘리제가 나타나기 전, 공작부인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것을. 의학을 몰라도 질식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딸은 나이프를 들기 전, 공작부인의 배를 잡고 살리려는 조처를 먼저 했었다.

그런 그녀가 미쳤다고 갑자기 나이프를 들어 공작부인을 해치려 했겠는가?

분명 공작부인을 살리려 그런 것일 거다. 후작은 딸을 굳게 믿었다.

‘하지만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

엘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엘리제가 나이프로 공작부인의 목을 찔렀다는 점이다.

환자의 목을 칼로 찌르는 치료법이라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법이다.

앞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그저 끔찍한 범죄로만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여러 상황이 참작되어 그녀가 공작부인을 살리려는 의도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인정되어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무려 황족의 몸이다.

아직 의사도 아닌 그녀가 정확하지도 않은 방법으로 황족의 몸에 칼을 대 중상을 입혔다는 죄는 피하기 어려웠다.

“폐하, 부디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는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사건의 최종 심판관이 황제이기 때문에.

엘리제의 처우는 황제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저희 가문의 그란비아 섬이라도, 아니, 클로랜스 가문 전체라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엘 후작은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자존심도, 재산도, 가문도!

딸이 그런 중죄를 뒤집어쓰게 생겼는데, 이런 것들이 문제겠는가?! 그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딸을 사랑했다.

“그만. 그만하게, 재상.”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가 말했다.

그의 얼굴은 온화한 평소와 다르게 딱딱했다.

“짐이 설마 엘리제에게 그런 중죄를 덮어씌우겠는가? 엘리제는 자네뿐 아니라 나에게도 가족같이 소중한 아이이네. 그리고 짐도 알고 있어. 그 아이가 그럴 아이가 아니란 것은.”

그래, 황제도 알고 있었다.

당시 정황을 봤을 때 엘리제는 공작부인을 구하려 그런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공작부인은 살아났다.

질식이 일어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말이다.

목에 상처만 입었을 뿐, 상태도 멀쩡했다.

‘그 아이가 살려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칼로 목을 뚫는 그 정체불명의 치료가 효과를 본 것이 분명했다.

사실 처벌이 아니라 큰 상을 내려야 할 상황.

‘문제는 황족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건데. 그것도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사실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죽을 상황이었는데, 상처가 문제겠는가?

생명을 살렸는데, 황족의 몸을 시해했다고 탓하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는데, 거칠게 건져냈다고 탓하는 격.

제국을 경영하는 민체스터는 그런 소심한 위인은 아니었다.

더구나 의학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면 그녀 덕분에 공작부인이 살아났다는 점이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벌이 아니라, 큰 상을 내려야 할 수도 있다.

<황족을 살린 클로랜스 영애! 황실 훈장 수여.>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황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큰 벌을 내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가 엘리제를 아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죄가 없는, 오히려 공작부인을 구한 아이에게 무슨 큰 벌을 내리겠는가?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런 일을 해냈다면 큰 상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벌을 내리진 않더라도 일부러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아야겠지.’

그 이유는 자명했다.

그녀가 자신이 아끼는 클로랜스 영애이기 때문에.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병원에서 아예 손을 떼게 하여야겠어.’

애초에 그녀가 의사가 되려는 것을 못마땅해한 황제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겪으며 그 생각이 확고히 굳어졌다.

‘이런 위험한 일을 더 하게 할 수는 없어.’

후에 황후가 될 아이가 칼로 목을 절개하다니!

당시 그 아이의 몸에 얼마나 많은 피가 튀었는지 모른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는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조사단에게 일러 최대한 철저히 당시 상황을 조사하라 해야겠군. 의학적으로 봤을 때 조금의 문제라도 있었다면 그걸 이유로 더는 병원에 발도 못 붙이게 해야겠어.’

황제는 입을 열었다.

“후작.”

“네, 폐하.”

“만약 공작부인을 살리려던 당시 처치에 문제가 없었다면, 클로랜스 영애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야. 하지만 조금의 문제라도 있었다면!”

황제는 선언했다.

“그 아이와의 내기는 이걸로 끝이야. 더는 그 아이가 병원에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걸세.”

“……!”

물론 황제는 이 조사에 주관적인 입김을 개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최고의 의사들로 꾸려질 조사단은 최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이게 당시의 처치를 검토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 아이가 한 처치가 아무런 흠도 없는 완벽한 처치일 리는 없으니까.’

그는 엘리제가 한 응급 처치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의학적으로 여러 문제가 있는 처치였을 터.

최고의 의사들이 모인 조사단은 엘리제가 했던 처치의 문제점들을 세세하게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조사단을 꾸리라 해야겠어.’

황제는 시종을 통해 명령을 내렸고, 의학 연구원에서는 총 3명의 의사를 선정하였다.

그는 조사단이 결과를 가져오면 엘리제에게 다시는 병원에 나가지 못하도록 명하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황제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 3명의 의사 중, 다음의 2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황실 십자 병원의 병원장이자 황궁 어의인 밴 자작!

그리고 테레사 병원의 교수이자, 의학계에 명성이 자자한 젊은 천재 그레이엄 남작!

둘 모두 의학에 자신의 삶을 바친 의학자들.

그들은 황제의 명을 따라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

이튿날 늦은 저녁.

황궁의 깊은 곳에 위치한 회색 탑에도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회색 탑의 이름은 백원(百願)의 궁(宮).

따로 혈탑(血塔)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예로부터 죄를 지은 황족이 유폐되는 곳으로, 이번에 사건을 일으킨 엘리제는 그 백원의 궁에 구금되었다.

탑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들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새로운 손님, 엘리제는 죄인들이 흔히 하는 행동인 억울하다느니, 용서해달라느니 그런 말도 없이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감시하는 로열 가드가 걱정할 정도.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자정이 넘어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 깊어갔다.

그런데 그 고요함 속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백원의 궁에 스며들었다.

“……!”

두 눈 부릅뜨고 있는 로열 가드도 아무런 눈치를 못 챌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

그 그림자는 좁은 궁 내부의 어느 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로 엘리제가 감금된 방 쪽이었다.

“…….”

말없이 엘리제가 감금된 방 안으로 들어간 그림자에게 희미한 달빛이 떨어졌다.

그리고 달빛을 통해 드러난 그림자의 얼굴.

놀랍게도 그림자의 정체는 황태자인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

침대에 잠들어 있는 엘리제를 보는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엘리제. 이 바보 같은.’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어쩌자고 그런 무모한 행동을!’

그는 얼마 전 탄신연회 때 그녀가 저지른 일을 떠올렸다.

‘잘못됐으면 어떻게 하려고!’

물론 그도 그녀가 공작부인을 구하려고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잘못됐으면 어떻게 그 책임을 감당하려고 그런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겁도 없이!

물론 먼 친척인 공작부인을 구해준 것은 감사하다.

하지만 두 눈으로 목격한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치솟았다.

‘정말 볼 때마다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그는 도대체 몇 번을 했는지 모를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그녀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이런저런 일로 자꾸 생각나게 하는 것도, 신경 쓰이게 하는 것도, 불안하게 하는 것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도, 모두다!

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

‘하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왜 여기에 온 것이지. 이 마음에 안 드는 소녀를 보러.’

도저히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백원의 궁에 몰래 잠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초상(超上) 능력 중 하나인 그림자 걷기(Shadow walking)를 사용해야 했고, 사실 그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하물며 이 백원의 궁에는 자신에 비할 만큼 강력한 초상(超上) 능력자가 한 명 더 머물고 있었으니까.

그의 감각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쯤 자신의 출현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왜 자신은 이런 위험한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소녀를 보러 왔을까?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어른거리며 짜증이 나서? 일이 손에 안 잡혀서?

모르겠다.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계속 그녀 생각이 났고, 어느 순간 자신은 이 백원의 궁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엘리제.’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달빛을 받아서인지, 조금은 더 창백해 보이는 안색.

그의 가슴에 들끓는 감정이 타올랐다. 그건 간절하면서도 안타까운, 그러면서도 저리게 아픈,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아, 속 편히 잘도 자고 있군. 밖에선 얼마나 애끓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인형같이 예쁜, 그러면서도 조그맣고 창백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외모.

나이프는커녕 피 한 방울만 봐도 기절할 것처럼 생겼으면서 잘도 그런 일을 저질렀다.

‘이번뿐이 아니야.’

대수술, 비장절제술을 해낸 것도 그녀였다. 그리고 그는 테레사 병원에서 그녀가 수많은 험한 환자를 치료해 낸 것을 알고 있다.

‘미칠 노릇이지. 이런 몸으로.’

하지만 문제는 그 모습이 의외로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아니, 단순히 어울린다, 정도가 아닌.

아름다웠다.

저 여린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환자를 치료할 때의 강렬한 의지가, 그리고 환자가 좋아졌을 때 환하게 웃는 미소가 그녀를 밝게 빛나게 했다.

그건 연회장에서 곱게 단장한 치장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여리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아름다움.

“하아.”

린덴은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보고 있는데, 계속 마음이 갑갑했다.

알 수 없는 갈망, 가슴이 꽉 막힌 듯이.

“이제 몸은 괜찮은 건가.”

며칠 전 고열이 나던 게 생각났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게 아직도 열이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아프지나 말 것이지. 그러면서 무슨 환자를 본다고.”

역시 마음에 안 들었다.

또 저렇게 열이 끓고 있는데, 이불은 왜 한편에 밀어버린 건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그는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주었다. 이불이 얇은 것 같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 작품 후기 ============================

내일 토요일 09:07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