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2-3 검제(劍帝) =========================================================================
그런데 그의 손이 이불을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엘리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안 돼…….”
“……!”
그는 흠칫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잠투정일 뿐 다행히 깨어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꿈을 꾸는 거지?’
소녀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변했다.
“안 돼…… 안 돼…….”
안타까울 정도로 괴로운 신음.
“죽지 마요…… 제발…… 제발…….”
그리고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
“……!”
린덴은 그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딱딱히 굳었다.
무슨 꿈이길래 저 강인한 소녀가 눈물까지 흘린단 말인가? 그리고 죽지 말라니? 누가?
그저 헛된 미몽이라 하기엔 소녀의 얼굴이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그는 뻣뻣이 굳어 소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더 잠꼬대를 중얼거리진 않았지만, 괴로운 얼굴의 소녀의 눈가에는 잔뜩 눈물이 고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하아.”
린덴은 손가락을 들어 소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말했다.
“무슨 꿈인지는 모르지만…… 명령이니 그런 꿈꾸지 마라.”
내 가슴이 답답해지니까.
그는 등을 돌려 방문으로 걸어갔다. 달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걸어간 순간, 그의 몸이 어둠으로 변했다.
초상(超上) 능력인 그림자 걷기가 발동된 것이다.
린덴은 마지막으로 엘리제를 돌아보았다.
“좋은 꿈꾸길.”
부디.
그러고 린덴은 백원의 궁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가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서 빠져나갔을 때였다. 백원의 궁 꼭대기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형님의 그림자 걷기는 오랜만이네. 저거 조금 위험하지 않나? 형수님이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건가? 연애 세포가 전혀 없는 연애 바보인 줄 알았더니 저런 면도 있으셨네.”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탑의 꼭대기에 누워 있었는데, 놀랍게도 몸이 허공에 떠 있었다. 마치 투명한 마법 양탄자에 올라탄 것처럼.
그는 빙긋 웃었다.
“어쨌든 이곳에 같이 갇힌 것도 인연인데, 나도 형수님께 인사나 한번 드릴까? 의사가 되려 한다고? 의사는 대부분 술 좋아하던데 형수님도 술 좋아하시려나?”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이름은 미하일 드 로마노프.
현 황실의 3황자이자, 황태자의 정적.
그리고 론도(Londo) 최고의 바람둥이이자, 서 대륙 최강의 오러 나이츠, 검제(劍帝)라 칭송받는 남자였다.
***
의학 연구원에서 파견한 3명의 조사단은 공작부인의 상처를 철저히 조사했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황궁 어의 밴이 중얼거렸다.
“자네도 동의하지, 그레이엄?”
“네, 자작님.”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1인, 로즈데일 병원의 수석교수인 카일 준남작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역시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러면 더 조사할 것 있나? 보고하도록 하지.”
그렇게 조사단은 황제를 알현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았네. 조사는 끝난 건가?”
“그렇사옵니다.”
옆에 동석한 엘 후작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들의 보고를 기다렸다.
설마 황제가 엘리제에게 중벌을 내리지야 않겠지만, 만약 저들의 조사가 안 좋은 쪽으로 결론 나면 또 몰랐다.
반면 민체스터 황제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엘리제와의 내기를 끝낼 순간이 왔다.
“빨리 말해보게. 어떤가? 클로랜스 영애의 응급조처에 당연히 여러 문제가 있었겠지?”
그는 티끌만큼의 문제라도 있었으면 그 핑계로 엘리제를 다시는 병원 일을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앓던 이를 뽑게 되겠군. 황후가 될 아이가 의사라니. 말도 안 되지.’
황제는 내친김에 정식 약혼 발표도 앞당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인식까지 기다릴 필요가 무어에 있겠는가?
밴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무언가 들뜬?
“이건... 기적입니다.”
“……뭐?”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뭐라고?
“완벽합니다, 폐하! 그야말로 완벽한 조처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목을 칼로 찌른 조처가 완벽하다니?”
“만약 그 조처가 아니었다면 공작부인은 사망했을 것입니다. 공작부인이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클로랜스 영애의 조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일 아닌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위험한 조처를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밴은 황제의 기분도 읽지 못하고 흥분하여 설명했다.
“그래서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전부터 기도가 막혔을 시 목을 절개해 숨구멍을 뚫어주려는 아이디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위험해 제대로 시도를 못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공작부인에게 시술된 그 상처는 지금껏 의사들이 생각하던 완벽한 기관절개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의 어떤 장기도 손상하지 않고,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딱 필요한 만큼의 상처! 그 급박한 순간에 어떻게 이런 시술을 해냈는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듣자 하니 10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해냈다 하던데.”
“……크흠.”
황제는 불편한 기침을 내뱉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완벽한 시술이었다고? 그냥 우연 아닌가? 너무 과찬하는 것 같군.”
“저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보기 전까지는요.”
그러면서 밴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한 장의 종이였는데, 애들 장난처럼 못 생기게 쓴 글씨가 삐뚤삐뚤 채워져 있었다.
“무언가, 그게?”
알아보기 힘든 그 글씨에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술서입니다.”
“진술서?”
진술서? 설마 저 못생긴 글씨가 클로랜스 영애가 쓴 거란 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진술서가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밴이 들뜬 음성으로 설명했다.
“그냥 진술서가 아닙니다. 영애가 어떤 의도와 방법으로 그 처치를 한 것인지 진술서에 기술했는데…… 그 내용이 마치 의학 논문을 보는 듯합니다.”
“…….”
뭐? 의학논문?
“이 진술 내용을 보면 목과 기관의 해부학적 관계를 정확히 꿰뚫고, 가장 안전한 위치, 가장 필요한 부위에 딱 적합한 절개를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지식과 빠른 판단, 과감한 행동이 조합된 조처로 보입니다. 그것도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요! 저희도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 이가 없는데, 어찌 이제 16살인 영애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면서 밴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 진술서는 형사부에 보관할 것이 아니라, 의학 발전을 위해 논문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조처였습니다.”
그 정도를 뛰어넘는 극찬에 황제는 잠시 말을 잃었다.
밴이 제대로 조사를 한 건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저 이는 원래 새로운 의학 지식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지. 편견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어.’
“자네의 이름은?”
까칠한 인상의 잘생긴 젊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학계의 젊은 천재라 불린다 했었지?
“그레이엄 드 팰론입니다, 폐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미천한 제 생각으로는…….”
그레이엄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국 의학계가 또 한 명의 희대의 천재를 만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허!”
황제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 말은 그레이엄의 진심이었다.
그는 이 조사를 하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제자, 로제를 떠올리게 하는 천재적인 조처였기 때문이다.
‘로제 말고도 이런 천재가 있었다니!’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범재의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있는데, 허탈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들, 밴과 그레이엄은 로제와 엘리제가 동일인 것을 모르니 하는 생각이었다.
“허허, 도저히 믿을 수 없군. 카일,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황제는 이번엔 로즈데일 병원의 수석교수 카일의 의견을 물었다.
로즈데일 병원은 사실상 귀족파의 수장인 차일드 후작의 소유. 황제파의 수장 가문인 클로랜스 영애에게 최대한 공정한, 아니, 불리한 판정을 해줄 것이다.
황제는 귀족파인 카일이야말로 편파적인 편견이 들어간 안 좋은 평가를 해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카일조차도 황제의 기대를 저버리고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정하기 싫으나…… 밴 경과 그레이엄 경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 그래도 뭔가 잘못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큰 잘못은 아니더라도, 사소한 실수라도... 뭐라도 잘못이 있을 텐데...”
뭐라도 좋으니 말해봐! 어떤 불공정한 판결이라도 좋으니, 란 눈빛으로 황제는 귀족파 카일 교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카일 교수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클로랜스 영애는 완벽한 조처로 공작부인을 살려냈습니다. 벌이 아니라 마땅히 큰상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저놈은 귀족파 주제에 뭐가 저렇게 올곧단 말인가?
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엘 후작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참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더구나 천재적인 조처라 하지 않은가?
‘보고 있소, 테레사? 역시 우리 딸이오.’
딸이 병원에서 고생하는 것은 싫지만, 저런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저런 조사 결과가 나왔으니 딸이 처벌받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황제는 심기가 불편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그 아이에게 상을 내려야겠는가?”
“네, 폐하. 공작부인이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클로랜스 영애 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에 마땅한 상을 내려야 한다 봅니다.”
밴은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이번 일을 의학계에 발표하려고 합니다. 영애가 진술서에 기술한 내용은 앞으로 기도가 막히거나, 기관을 절개해야 하는 환자를 치료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갈수록 가관이었다.
황족을 살렸으니, 최소 훈장감이었다. 아예 이런 경우를 위한 훈장이 따로 있었다.
-황실에 큰 도움을 준 자에게 수여되는 황실 장미 훈장(皇室薔薇勳章, Royal rose medal)!
그러면 언론에서도 득달같이 보도할 것이다.
[황태자의 약혼녀 클로랜스 영애, 훈장 수여. 천재적인 조처로 공작부인의 목숨을 살려내다!]
[클로랜스 영애, 황족을 구해낸 공으로 황실 장미 훈장 수여!!]
이런 식으로 말이다.
더구나 황제가 알기에는 만약 이번 일로 엘리제가 훈장을 받으면 제국 역사상 ‘최연소’에 ‘최초의 여성’ 황실 장미 훈장 수훈자가 된다.
그뿐인가? 황실 장미 훈장 수훈자에게는 자동으로 기사(Knight) 작위가 부여된다.
이번 일로 엘리제는 작위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그녀는 ‘레이디 엘리제’가 아닌, ‘데임(Dame) 클로랜스’가 된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고작 16살의 나이로.
‘골치 아프군.’
더구나 의학계에도 발표한다니, 의사들 사이에서도 유명세를 타게 생겼다.
마음에 안 들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또 제 부인을 끔찍이 아끼는 하버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당장에라도 감사를 표하러 뛰쳐나간다는 것을 판결이 안 났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간신히 말리고 있는데, 이런 판결이 나왔으니.
더구나 신문사의 반응도 걱정스러웠다. 특종을 바라는 기자들이 판결 내용을 목 놓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 판결이니, 어떤 내용의 기사들을 써댈지. 온갖 소설 같은 내용의 기사가 난무할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실컷 외람되었으면서 이제 와 조심하기는.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해보게.”
“그…… 클로랜스 영애를 만나볼 수는 없겠습니까?”
“……?”
“이번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허락해 주신다면 여기 그레이엄과 같이 만나 보겠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옆에 서 있던 그레이엄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도 클로랜스 영애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한 제자 로제와 비견할 만한 천재라니. 어떤 영애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밴과 그레이엄은 조만간 날짜를 잡아 클로랜스 영애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엘리제는 모르는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일요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Ps. 읽어주시는 분들께, 코멘트 달아주신 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