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45화 (45/194)

00045  2-4 데임(Dame) 클로랜스  =========================================================================

[2막 : 小和田 雅子???]

[2-4장 : 데임(Dame) 클로랜스 (3)]

***

처음 공부를 시작한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고아로 일가친척 하나 없던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살길로 공부를 택했고, 정말 피나게 노력했다.

‘그때 고아로 살며 가난을 뼈저리게 알았지. 그리고 이전 삶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도 깨달았고.’

그래도 다행히 고아원에서 마음씨 좋은 후원자를 만나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후원자의 사업이 어려워져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원이 끊겼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그 후원자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의대에 입학하고 나서도 살기 위해 공부했어.’

무일푼인 그녀가 의대 학비를 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학금밖에 없었다. 성적 미달로 장학금이 끊기면 당장 학교에 다닐 방법이 막막했다.

학자금 대출은 얼굴도 못 보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그녀 앞으로 빚을 남겨놔 어려웠고. 알바로는 한계가 있었다.

‘덕분에 죽어라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지.

남들이 연애도 하고, 동아리다 뭐다 하며 대학생활의 낭만을 즐길 때 그녀는 공부에만 전념했다. 남들이 독종이라 혀를 둘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힘들었던 시기다.

너무 힘들어 남몰래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울었다.

‘그때 힘들고 쓸쓸해 이전 삶의 가족들을 정말 많이 그리워했었는데.’

하지만 그런 노력이 쌓여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 내었다.

한국에서도 그레이트 서젼, 괴물 외과의사라 불리던 그녀를 말이다.

‘어쨌든 잘 보자, 엘리제.’

그렇게 곧 1시간이 거의 지났고 시험이 시작하기 직전, 엘리제는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예쁘게 포장된 그 상자에는 짙은 색깔의 엿이 들어 있었다.

<꼬맹이의 합격을 기원하며!>

‘난 꼬맹이가 아닌데.’

그 문구를 읽은 엘리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선물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3황자인 검제 미하일이었다. 이전 삶, 유일했던 친구인.

시험 전날인 어제, 클로랜스가의 저택에 몰래 나타나더니 선물을 전해준 것이다.

“떨어지면 혼내준다! 그러니 꼭 붙어!”

그렇게 장난처럼 이야기하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엘리제는 달콤한 엿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네, 꼭 붙을게요. 고마워요, 밀.’

밀.

지난 삶, 자신만 부르던 그의 애칭.

이번 삶에도 그 애칭으로 그를 부르게 될 날이 과연 올지 모르겠다.

이윽고 9시 정각.

시험을 치를 모든 도제가 자리에 착석하고, 긴장한 얼굴로 시험지를 기다렸다.

“책상 위에 물건은 전부 아래로 내려놓으시고, 부정행위가 발각 시 영원히 의사시험을 치를 자격이 박탈되니 주의하십시오.”

완고한 인상의 시험관이 경고 후 시험지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면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땡.

시험을 시작하는 종이 울렸고, 도제들은 시험지를 허겁지겁 펼쳤다.

엘리제도 시험지의 문제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본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형태의 문제들이 종이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

“아…… 이런.”

시험장 곳곳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걸 어떻게 풀라고?”

당황이 역력한 목소리들.

모두 문제의 난이도에 좌절했다. 심지어 시험이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됐는데, 짐을 꾸리고 떠나려는 이도 있었다.

엘리제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형태의 문제가 나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다만 당황의 이유가 남들과 달랐다.

문제의 난이도가 높아서 당황한 게 아니라…….

‘이건 지구의 KMLE나 USMLE Step 2ck의 문제 형태와 거의 흡사하잖아?’

KMLE(Korean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

USMLE(US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

각각 한국과 미국의 의사 면허시험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는 문제를 다시 한 번 훑었다.

[2번 문제 - Female / Age : 35]

3일 전부터 시작된 복통으로 병원에 왔다. 38도의 발열이 있었다. 복통의 위치는 정중앙에서 우하복부로 이동. 통증 부위에는 압통이 있었다. 상기 환자의 가장 가능성 높은 진단과 치료는?

현대 지구 의사 시험에서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는 전형적인 환자 케이스 형태의 문제였다!

‘원래 이곳 브리티아 의학연구원의 시험은 대부분 단답형 주관식 서술 문제로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알고 있는 제국의 의사 자격시험의 문제는 대부분 이런 형태다.

-맹장염의 진단법과 치료법은?

-폐렴의 치료법은?

-심근경색의 심장 전류 검사 소견은?

머릿속 지식을 백과사전식으로 묻는 단답형 서술형.

현대 지구 대부분의 선진국 의과대학에서는 21세기가 되며 주류에서 밀려난 방식이다.

‘이렇게 증상만 주고 진단과 치료법을 추론하는 환자 케이스 형태의 문제는 한 번도 안 나온 걸로 아는데?’

엘리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는 듯한 이 환자 케이스 형태의 문제는 처음 접하면 굉장히 어려운데. 다들 어렵게 느끼겠구나.’

정확한 지식은 기본에 환자를 보는 능력까지 동시에 요구되는 문제 형태이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난이도를 어떻게 높일까 했는데, 이런 식으로 문제 난이도를 높였구나.’

이 문제 형태의 변화는 의학연구원 교수들의 머리 빠지는 고뇌의 결과였다.

사실 의사 시험의 난이도를 높이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없는 질환을 창조해 낼 수도 없고, 희귀병만 주구창창 낼 수도 없으니까. 평생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희귀병으로만 문제를 도배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시험이라 할 수 없었다.

-국가 공인 의사 시험에 걸맞은 내용의 문제면서, 난이도를 높여야 한다!

그 과제 앞에 출제위원들은 고뇌를 거듭했고, 그 결과 시대를 까마득히 앞서 이런 선진 형태의 문제가 탄생했다.

‘대단하구나. 지구에서도 이런 형태의 문제가 도입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엘리제는 감탄했다.

‘확실히 이런 형태의 문제가 더 좋은 문제지. 난이도도 어렵고 단순히 암기형 지식이 아닌, 실제 환자를 진단하는 능력을 측정할 수 있으니.’

사실 난이도를 올리라고 말한 황제도 이런 결과는 상상 못했다.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이렇게 의학 시험의 질을 올리는 결과를 불러올 줄이야.

‘그래도 이런 형식의 문제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난이도가 확실히 올라가긴 할 텐데.’

한국에서도 이렇게 단답형에서 추론형으로 문제가 바뀐 직후 의사 시험 합격률이 8~90%대에서 50%대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번 브리티아 제국 의사 시험 합격률도 형편없이 곤두박질할 것이다.

‘하지만 난 이런 형태의 시험은 익숙한걸.’

지구에서는 임상 수업에 들어간 이후로 대부분 이런 형태로만 시험을 봤다. 따라서 지식을 묻는 단답형보다 이런 추론형이 더 풀기 편했다.

‘그래도 정신 바짝 차리자.’

그리고 단순히 문제의 형태만 바뀐 게 아니었다.

‘문제 자체의 난이도도 무척 높아. 드문 병들의 비중도 굉장히 높고, 간단한 치료법을 묻는 것도 아니야.’

엘리제는 긴장해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런 문제는 학생 수준으로는 절대 풀 수 없는 내용인데.’

이전 삶, 의사로서 살며 직접 진료를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문제도 수두룩했다.

‘합격 커트라인도 80점으로 한국 의사고시보다 훨씬 높으니.’

물론 현대의 의학 지식이 훨씬 공부할 내용이 많고, 복잡하니 단순 비교는 어려웠다.

그래도 100점 만점에 80점이면 결코 낮은 점수는 아니었다. 하물며 작정하고 어렵게 낸 시험이니.

그녀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꼼꼼히 읽으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다만 천하의 그녀도 풀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으니, 다음 문제들이 그러했다.

[123번 문제. Male / Age : 50]

다음, 다뇨, 다갈로 내원한 환자이다. 만성적인 피로감과 체중 감소를 호소하고 있다. 상기 환자의 진단법과 가장 가능성 높은 진단명, 치료법은?

‘전형적인 당뇨 환자의 문제.’

바로 현 황제인 민체스터가 앓고 있는 당뇨 문제였다.

진단법도 간단하고, 진단명도 간단하고, 치료법도 명확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게 아직 제국의 의학 수준으로는 정립되지 않은 내용이란 것이지.’

바로 그것이었다.

현대 지구의 의학으로는 고민할 것도 없는 내용이지만, 지금 제국의 의학을 고려하면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내용.

‘아니, 이런 정립되지 않은 내용들은 문제로 내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두 문제도 아니었다. 이런 문제가 시험 중간중간에 지뢰처럼 숨어 있었다. 적지 않은 수가.

‘이걸 다 틀리면 불합격이잖아.’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런 내용의 문제는 그녀라도 백 프로 정답을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 제국에서 정립되지 않은 내용이니 채점을 하는 교수가 주관적으로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지?’

그녀는 고민했으나,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최대한 쉽게, 이 시대의 수준에 맞추어 정답을 적어나갈 수밖에.’

엘리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지식을 현 제국의 의학 수준에 맞추어 답을 적어 내려갔다.

채점 교수들이 알아볼 수 있게 최대한 쉽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의학적 논리를 담아.

제발 좋은 결과가 나오길 십자가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

그렇게 8시간의 시험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엘리제는 다른 수험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진맥진하여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끝났다.’

시험은 끝났지만 기분이 홀가분하진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훨씬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지만, 그 정립되지 않은 내용의 문제들. 그 문제들 답이 어떻게 처리될지 모르겠다.

‘시간이 100년쯤 지나면 내 답이 맞는다고 규명될 테지만 지금은 아니니.’

최대한 제국의 의학적 수준에 맞춰 논리적으로 기술했지만 채점 교수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다 오답 처리되면 어떻게 하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 불합격이다.

‘안 돼! 그것만은!’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황제와의 내기도 패배다.

즉, 꼼짝없이 황태자와 결혼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 안 돼.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이 제국을 떠나겠어. 이 제국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의사로 살겠어.’

어린 소녀의 몸으로 출가해 제국을 떠나면 끔찍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과거의 삶을 되풀이할 바에는.

‘물론 나도 이전 삶의 악녀 엘리제가 아니니까. 똑같은 비극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래도 싫어.’

그녀는 이전 삶, 린덴과의 결혼생활을 떠올렸다.

그를 사랑하긴 했지만, 당시 결혼 생활은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다.

‘사랑하니까 더 고통스러웠지.’

사랑하는 이에게 외면받는다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지독한 고통이었다.

이번 삶에도 그런 고통을 더 느끼고 싶진 않았다.

‘내가 이번 삶에서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야. 원하는 일을 하며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그러기 위해선 이번 시험을 통과해야 할 텐데, 막상 시험을 치르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정말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아, 결과 발표가 언제였지?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모르겠다.’

그녀는 의학연구원 입구까지 터덜터덜 나왔다.

‘벤톨 경은…… 아직 안 오셨구나.’

마중 나오기로 한 가문의 기사, 벤톨 경을 찾았으나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끝난 탓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벤톨 경이 올 때까지 입구 옆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하고 배고파. 단것 먹고 싶다.’

우울해서 그럴까?

갑자기 단 음식이 마구마구 당겼다.

딸기 케이크, 망고 푸딩, 바나나 타르트, 초콜릿 무스, 프랑소엔 마카롱 등등.

애프터눈 티 전용 삼단 트레이에 잔뜩 디저트를 쌓아놓고, 생각 없이 흡입하면 얼마나 좋을까?

‘새어머니가 안 된다고 하겠지? 건강에 안 좋다고?’

엘리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누가 케이크 사준다고 유혹하면 납치라도 당해줄 마음이 있는데. 단 것,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 음식 먹고 싶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험은 잘 본 건가?”

============================ 작품 후기 ============================

내일 목요일 09:07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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