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51화 (51/194)

00051  2-5 변곡점  =========================================================================

[2막 : 小和田 雅子???]

[2-5장 : 변곡점 (5)]

***

“론…… 님?”

두근.

엘리제는 그 깊은 눈동자에,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의 감촉에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로제.”

“……네.”

“지난 몇 달간. 너와 만나 즐거웠다. 그러니…… 꼭 몸조심하고 지내고 있도록.”

낭만이라곤 하나 없는, 멋대가리 없는 인사.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알 수 없이 가슴이 흔들려 그녀는 그의 손가락에서 벗어나 화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지내도록.”

그리고 뚜벅뚜벅 멀어졌다.

점점 사라지는 그의 등을 보며 엘리제는 멍하니 생각했다.

‘전쟁이라니.’

사실 그와 자신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이렇게 감정이 흔들릴 이유가 없는데.

하지만…… 가슴이 아팠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혹시나 그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게. 모두 싫었다.

지난 몇 달간, 그와 만나며 생각보다 많은 정이 들었나 보다.

그의 무뚝뚝한 얼굴이, 재미라곤 하나 없는 말투가, 연애 한 번 못 해본 듯한 딱딱한 태도가.

싫지 않았나 보다.

‘괜찮겠지? 그래도 고위귀족이니까.’

그녀는 애써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전쟁의 총탄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는다.

지난 삶, 작은오라버니 크리스도 고위귀족이지만 전사했다. 심지어 2년 전 검은 대륙의 전쟁 때는 1황자가 전사했다. 황족이자 초상능력자였던 그가 말이다.

그도, 무뚝뚝하게 서 있는 모습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저 남자도 전쟁에서는 어떻게 될 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그에게 달려갔다.

“론 님!”

“……?!”

그녀는 다급히 손을 목 뒤로 가져가 무언가를 풀었다. 그리고 그걸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이것! 이것 가져가세요!”

“……뭐지?”

보니 진주로 장식된 십자가 목걸이였다.

다만 화려하기보단 세월이 묻은 듯한 장신구였다.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

“그러니. 그러니! 주는 것 아니고, 맡기는 거니 꼭 돌려주세요!”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잠시 목걸이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정말…… 나에게 주는 게 맞는 것인가?”

이건 ‘징표’였다.

연인이나 가족이 전쟁에 나가는 사랑하는 이의 무사 생환을 기원하며 맡기는.

“주는 것 아니에요. 맡기는 거예요. 그러니 반드시 돌려줘야 해요. 만약 돌려주지 않는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강하게 말했다.

“그러니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앞장서지도 마요. 비겁해져도 돼요. 다치면…… 그래서 이 목걸이를 돌려주지 않으면, 절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 꼭 무사히 돌아와요.”

그는 그 말에 미소 지었다.

황태자인 자신에게 앞장서지 말고, 비겁해져도 된다니.

그래도 그 말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고맙다. 반드시 돌려주마.”

***

엘리제를 클로랜스 가문에 내려준 후, 론, 아니, 황태자는 마차에서 변검 능력을 풀었다.

“아슬아슬했군.”

그는 변검의 매개체가 되는 아티팩트를 바라봤다.

작은 초상화가 새겨진, 손가락만 한 아티팩트는 희미한 금이 나 있었다.

“앞으로 최소 반년, 아니, 1년은 사용하지 못하겠군.”

너무 변검 능력을 자주 사용한 탓이었다.

원래는 2달에 한 번 정도가 적절한데, 며칠에 한 번꼴로 써버렸으니.

‘그래도 작별 인사는 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

그는 엘리제를 떠올렸다.

항상 못마땅한 그녀.

그러나…… 항상 보고 싶은 그녀.

방금 자신을 향해 눈물을 글썽일 때는 강하게 껴안아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정말 간신히.

이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빌어먹을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물론 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 황태자, 린덴의 얼굴로 보러 가면 되니까.

하지만.

‘전하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 틀렸다.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을 싫어했다. 매우.

결혼을 그렇게나 완강히 거부할 정도니.

물론 그녀가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의사가 되고 싶기 때문인 것은 안다.

하지만 론일 때의 자신과 황태자일 때의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너무나 달라, 그는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황태자인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담긴 감정은 단 하나. 강한 거부감이었다.

‘빌어먹을.’

그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집어졌다.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왜 이 마음에 안 드는 소녀는 자신의 가슴에 이렇게나 깊숙이 들어온 걸까. 왜 이렇게 자신을 아프게 하고, 그리고 안타깝게 하는 걸까.

‘‘그날’ 이후 내가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무채색 한 세상에 빛이 들어왔다. 유일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자신을 싫어했다.

그 사실이 그를 좌절하게 했다.

‘이렇게 모습을 바꿔 찾아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기만이지.’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알고 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녀를 찾아가는 것은 기만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떠오르고, 보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인제 그만 가야지. 이런 속임은 멈추어야지, 몇 번이고 다짐해도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술이나 먹어야겠군.”

술 상대는 렌 남작이 좋겠다. 렌은 술을 싫어하지만 상관없었다.

잔뜩 먹여 동생에게 당한 울분을 그에게라도 대신 풀어야겠다.

“하아.”

그는 소녀가 자신에게 준 징표를 바라봤다.

진주로 꾸민 십자가. 옆면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여, 당신의 가호가 임하소서.

만들어진 지 너무 오래돼, 장신구라기보단 골동품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십자가를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히 품 안에 집어넣었다.

***

한편 저택에 돌아온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가라앉은 느낌. 정확히는 슬픔에 잠긴 분위기였다.

“어머니?”

그녀는 놀라 새어머니를 불렀다.

항상 밝던 새어머니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엘리제, 흐윽.”

“어, 어머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리고 상상도 못했던 소식을 들었다.

“……뭐라고요?”

엘리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큰오라버니와…… 크리스, 작은오라버니가……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고요?”

와장창.

그녀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

그 뒤 얼마나 울었는지,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엘리제는 자신의 방에서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푸른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안 돼. 어째서? 왜?”

뭐가 잘못된 걸까? 왜 크리스 작은오라버니가 전쟁에?

“귀족 가문당 2명씩 자발적 명예 참전이라고?”

말이 자발이지, 강제 징병이다.

이전 삶에선 이렇지 않았다.

일반적인 전쟁 때처럼 각 한 명씩만 참전하였다.

그럼에도 당시 작은오빠가 참전했던 것은 자신이 가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했던 작은오빠는 그 실수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명예로 갚기 위해 전쟁에 자원했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전사자 : 크리스 드 클로랜스.]

저택에서 그 전보를 받았을 때의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사랑하는 오빠를 죽음으로 밀어 넣다니.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울어도 그 슬픔이 잊히지 않아 지구에서까지 그를 그리워했다.

“안 돼. 절대로. 이렇게 또 오라버니를 잃을 수는 없어!”

엘리제는 부르짖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건 자신의 잘못을 갚기 위해 나가는 자발적 참전이 아니었다. 프랑소엔 공화국에 맞서기 위한 국가의 부름이었다.

귀족 자제로서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안 돼, 오라버니. 아아!’

그녀는 침대에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슬픔을 다시 겪어야 한다고? 작은오라버니를 또 이렇게 잃어야 한다고?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가족을 잃는 그 고통을 다시 겪는다면 자신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리제, 리제? 자니? 들어가도 되겠니?”

“……!”

작은오빠 크리스였다!

끼익.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부드럽게 말했다.

“많이 놀랐지, 우리 동생?”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둑이 터지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크흑. 흐윽. 어엉! 오라버니! 오빠!”

크리스가 동생을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 묻히는 순간, 엘리제는 펑펑, 말 그대로 펑펑 울었다.

“가지 마요. 응? 제발. 제발…….”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제는 빌었다.

“우리 동생. 착하지? 울지 말고. 오빠 잘 다녀올게. 너무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안 돼, 흐윽. 제발…….”

물론 이번 삶은 다르니까. 지난번처럼 꼭 오라버니가 전사한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중요한 운명적 사건은 어김없이 다가온다는 것을. 그저 시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만약 전쟁에 나간다면, 작은오라버니는 이번에도 전사할 것이다.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닌 확신이지만 너무나 불안하고 생각만으로 괴로웠다.

“리제. 오빠가 하나 부탁이 있어.”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작은오빠가 말했다.

“오빠에게 징표를 줄래? 네 징표를 받으면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반드시 돌아와 돌려줄 테니, 부탁해.”

엘리제는 그 말에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싫어요.”

“리제.”

“절대 싫어! 징표 따위! 절대로 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마치 못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악을 쓰고는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리제!”

작은오빠가 불렀으나 멈추지 않았다.

복도를, 현관을, 정원을 벗어나 저택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통곡했다.

‘아아! 안 돼! 절대로!’

작은오라버니의 죽음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

막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난 삶에선 자신 때문에 죽었으니, 이번 삶에선 반드시 막아내고야 말겠다.

그렇게 그녀는 울며 다짐했다.

‘하지만 어떻게?’

결연한 다짐과 별개로, 그의 참전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작은오빠가 징병을 회피해 도망하는 것.

하지만 작은오빠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그는 차라리 명예롭게 죽으면 죽었지, 절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제발!’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 잔혹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그녀는 좌절했다.

그렇게 슬픈 밤이 지나갔다.

***

날이 밝았다.

늘 새벽같이 병원에 출근해 환자를 돌보던 그녀였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

그레이엄이 이른 아침부터 클로랜스 가문의 저택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데임…… 클로랜스?”

그는 퉁퉁 부은 엘리제의 눈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냥 부은 게 아니다. 지금도 얼핏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엘리제는 다급히 눈가를 닦고 물었다.

“네, 선생님. 무슨 일이신가요?”

“…….”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레이엄은 그 모습에 무어가 답답한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데임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

하루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다 취합을 한 듯했다.

그레이엄답게 빠른 일 처리.

그런데 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저택에 직접?

“직접 오신 것 보니 뭔가 문제가 있나 보군요.”

<다음편 바로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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