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53화 (53/194)

00053  론도 대역병  =========================================================================

[2막 : 小和田 雅子???]

[2-6장 : 론도 대역병 (2)]

‘하지만 그러면 내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해.’

가슴이 차가워졌다.

간단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남은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새장 속의 새가 되리라. 영혼을 잃은.

‘작은오라버니.’

엘리제는 그의 부드러운 얼굴을, 따뜻한 목소리를, 자신을 향한 사랑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전 삶, 그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도 떠올렸다.

영혼을 잃은 새장 속의 새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작은오라버니가 다시 죽으면? 난 견딜 수 있을까?

엘리제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

그날, 엘리제는 밤늦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 안에서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고민을 하십니까?”

가문의 호위기사인 벤톨 경이 물었다.

“한 사람 생각을 했어요.”

“누구 말입니까?”

“오와다 마사코(小和田 雅子).”

낯선 이름에 벤톨 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지구에서 읽었던 기사가 잠시 떠올랐을 뿐, 그녀도 잘 아는 인물은 아니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지?’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오로지 이 방법인 걸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저택에 들어가는 순간, 두 명의 인영이 그녀를 맞았다.

“엘리제! 왜 이렇게 늦었느냐?!”

“리제!”

아버지 엘 후작과 작은오빠 크리스였다.

“지금 론도에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 이렇게 늦게 들어오고! 내일부터 병원에는 출입금지다, 엘리제!”

“그래, 리제. 내 생각에도 병원엔 가면 안 될 것 같아. 전염병이라도 옮으면 어떻게 하려고. 네가 환자를 생각하는 것은 알지만, 이번엔 절대 양보 못해.”

자신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둘은 보니 엘리제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 걸까?

“아버지, 그리고 작은오라버니.”

“응?”

“사랑해요.”

“……?!”

뜻밖의 말에 아버지와 오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제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래, 새장에 갇힌 새는 영혼을 잃을 뿐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이들을 잃는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가족들을 사랑했다.

“아버지, 오라버니.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주세요.”

“오냐, 말만 하렴. 무엇이든 내가 다 들어주마. 대신 병원에 나가는 것은 안 된다. 당분간 출입금지야!”

“그래, 리제. 말만 해봐.”

그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의 그녀는 너무나 착하고 사랑스러워 무슨 무리한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서 나온 부탁은 다소 의외의 것이었다.

“제가 앞으로 한 가지 잘못을 해도 용서해 주세요.”

“……?!”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이라니? 무슨?

“엘리제,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

착해진 딸이 이전처럼 못된 일을 저지르진 않겠지만 의아했다.

“더 묻지는 말아주세요. 그냥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만약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 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그냥 할 테니까요.”

“……!”

그러고 그녀는 크리스를 바라봤다.

“작은오라버니.”

“으, 응?”

“고마웠어요.”

“……?!”

그리고 미안했어요. 지난 삶, 나 때문에 그렇게 되어서. 너무나.

고개를 갸웃하는 작은오라버니를 보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래, 이번엔 내 차례야.’

지난 삶, 작은오라버니는 자신 때문에 죽었다.

그러니 이번엔 자신이 희생할 차례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엘 후작은 딸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잔잔히 웃고 있지만, 그의 사랑하는 딸은 어딘지 위태로워 보였다.

“내일 아침 일찍, 황궁에 가겠어요. 그래서 황제 폐하를 뵈어야겠어요.”

“……무슨 용무가 있길래? 폐하는 원한다고 알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을 다투는 일이에요. 아마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

엘리제는 짧게 선언하듯 말했다.

“이 론도에 돌고 있는 전염병을 없애겠어요.”

***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녀는 정복을 입고, 곱게 단장을 하였다. 평소 거의 치장을 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

“와아, 아가씨, 너무 예뻐요.”

어린 시종 마리가 감탄을 터뜨렸다.

엘리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마리의 감탄처럼 오늘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클로랜스 가문의 정복을 입은 탓일까? 일반적인 귀족 영애들의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절제되면서 차분한 아름다움.

검은 정복에서 감히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기품이 흘러나왔다.

가문의 기사 벤톨 경이 그녀에게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아가씨.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고마워요.”

밖으로 나가던 중 그녀는 저택의 홀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향해 기도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목 아래로 백금발이 차분히 떨어져 내렸다.

‘부디 저와 함께 해주소서.’

엘리제는 아버지, 엘 후작과 함께 클로랜스 가문의 마차를 타고 황궁에 입궁했다.

“아침에 미리 연락을 드렸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다.”

“네, 감사해요.”

“그런데 엘리제. 정말로 이 전염병을 없앨 수 있는 것이냐?”

이렇게 빠르게 황제를 독대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재상의 딸이면서 황제에게 총애받는 황태자비 후보여서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전염병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림 없는 대답.

하지만 엘 후작은 걱정이 들었다.

“네가 위험한 것은 아니지? 혹시라도 그렇다면 난 절대 네가 나서는 것을 찬성할 수 없다.”

딸이 해결 못할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걱정은 단 하나.

딸이 병원에서처럼 환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나서다 몹쓸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할까였다.

만약 딸이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면 그는 절대 그녀가 나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전염병은 사람 간에 전파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어전에 도착한 엘리제는 잠시 대기 후 황제와 독대할 수 있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황제가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최근의 악재들 때문인지, 민체스터는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래, 데임 클로랜스. 이번 전염병에 대한 방책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한 치의 주저도 없는 대답.

그 확신에 찬 목소리에 황제는 그녀가 진실로 해결책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행정부의 공중보건부도, 의학연구원도 실마리를 못 잡는 중인데?’

다른 이가 저렇게 말했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소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제’였다. 고작 몇 달 사이에 제국 의학계를 뒤흔들고 있는 희대의 천재.

근거 없이 저런 확언을 하는 것이 아닐 테다.

“이 전염병은 독기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걸 아는가?”

“문헌에서 이 질환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이 질환은 동방의 힌디, 그중에서도 뱅갈에서 유래한 전염병입니다.”

“……!”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힌디는 먼 동방에 자리한 청과 더불어 제국의 최대 교역국이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 데임 클로랜스?”

“네, 그렇습니다. 힌디에 장기간 거주한 윌리엄 경의 천축견문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전염병과 똑같은 증상의 역병이 여러 차례 발병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건 엘리제가 따로 공부한 사실이었다.

지구에서도 동방에서 이 전염병이 유래했으니, 이곳도 비슷하지 않을까 확인했던 것이다.

“허허, 힌디라. 정말 대단하군. 그런 사실을 알아내다니.”

황제는 크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그 어떤 의사도 짐작 못하던 병의 정체를 단번에 간파해 내다니.

아무리 엘리제가 의사가 되길 바라지 않는 황제이지만, 그녀의 재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독기가 아니면 도대체 이 질환의 정체가 무엇인가?”

엘리제는 진단명을 말했다.

“콜레라(Cholerae)입니다.”

***

“……콜레라?”

낯선 이름의 병이었다.

“네, 폐하. 설사와 구토를 심하게 일으키는 역병으로, 동방의 영을 다녀온 로우랜드(Low-Land) 상인들의 기록을 보면 이 콜레라란 병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허허, 콜레라. 콜레라라.”

황제는 엘리제에게 물었다.

“그런데 질병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해서 전염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해결책은 있는 건가?”

정확한 지적이었다.

정체를 안다고 해서, 모든 전염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만약 그렇다면 현대 지구에서는 전염병이 모두 사라져야겠지만, 실상은 감기의 유행도 예방하기 어렵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콜레라의 경우는 차단이 가능했다.

방법만 알고 있다면.

“역학조사를 통해 가능합니다.”

“역학조사?”

“네, 폐하.”

역학조사(Epidemiologic survey).

전염병 차단의 기본이 되는 기술.

“만약 저에게 권한을 주신다면, 3일 안에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

민체스터의 눈이 커졌다.

3일?

말도 안 되는 기간이었다.

20년 전, 1차 론도 대역병이 유행했던 기간이 수개월이었는데, 고작 3일이라니.

아무리 엘리제, 그녀라도 이 장담은 허풍처럼 들렸다.

“겨우 3일 안에 해결할 수 있다고?”

“어렵더라도 그 안에 해결해 내야 합니다.”

엘리제는 그렇게 답했다.

그래, 무조건 3일 안에 해결해 내야 했다. 그녀에게는 사실 그 시간도 길었다.

오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하루하루가 더 지나갈 때마다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테니까. 3일이 지나면 사망자는 500명을 넘어, 1,000명에 육박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늦어도 3일 안에는 해결해야 했다.

“허허, 그래. 내 영애에게 권한을 위임해 주지.”

그녀의 강한 눈빛을 본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엘리제 말고는 다른 대안도 없었다. 모두 악취네, 나쁜 공기네 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런데 폐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엘리제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진정한 용건을 이야기했다.

“제가 정말로…… 3일 안에 이 전염병을 해결해 낸다면, 지난번 폐하가 말씀하신 조건을 충족한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제와 황제의 내기.

그것은 황태자비,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가치 있는 일을 해내면 약혼을 파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황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클로랜스 영애가 이 전염병을 해결해 낸다면…… 내기는 짐의 패배구나.’

최소 수만 명, 어쩌면 수십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정말 전염병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이 내기의 승리자는 엘리제였다.

‘허허.’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 오히려 그녀가 해결해 내길 간절히 기원해야 했다.

‘과연 이 아이가 해결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

하지만 민체스터는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는 확신에 차 있었다.

민체스터는 왠지 그녀라면, 이 소녀라면 이 전염병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허허. 그래, 영애가 만약 전염병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내기는 당연히 영애의 승리지.”

황제는 씁쓸히 웃었다.

“그런데 영애.”

“네, 폐하.”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 아니, 린덴과의 결혼이 그렇게나 싫은 건가?”

엘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그 답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영애와 한 가족이 되기를 바랐지만 어쩔 수가 없군. 이 민체스터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이니 지키겠네. 영애가 전염병만 해결한다면 황태자와의 약혼은 없는 것으로 처리하겠네. 이 민체스터의 이름을 걸고 집행할 것이니, 안심해도 좋아. 영애에게는 어떤 불이익도 가지 않을 것이야.”

============================ 작품 후기 ============================

내일 수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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