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론도 대역병 =========================================================================
[2막 : 小和田 雅子???]
[2-6장 : 론도 대역병 (3)]
***
엘리제에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황태자와의 파혼.
이 몸으로 돌아온 후, 가장 강렬히 염원하던 바를 이루는 순간이었으니까.
황제도 쓸쓸히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원하던 바를 이루겠군. 축하하네.”
“…….”
그런데 엘리제의 반응이 이상했다.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리고 감사의 말도, 황송하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딘지 슬픈 표정을 짓더니.
“아닙니다. 전염병을 해결하더라도…… 예정대로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겠습니다. 그리고 황태자비가 되겠습니다.”
“……?!”
그 말에 황제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라고?
“그 말…… 정말인가?”
“네, 폐하.”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아파 보이는 미소였다.
“대신, 폐하와의 내기에 이긴 보상으로 두 가지 조건과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이것만 들어주신다면 황태자비가 되겠습니다.”
“……!”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부탁일 것이라 예감한 탓이다.
“무엇인가?”
“첫 번째 조건은 정식 약혼식은 크림전쟁이 끝난 뒤로 미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건 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기특한 생각이었다.
역병과 확전된 전쟁으로 민심이 안 좋을 때 국가적 축제인 황태자의 약혼식을 거행하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음 조건은?”
“만약…… 황태자 전하가 저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전하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
지난 삶, 엘리제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자신도 그와 결혼해 불행했지만 그도 자신 때문에 불행했을 것이라고.
원하지 않은 이와 살아야 했으니까.
그러니 그에게도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만약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다른 이와 함께할 기회를.
“그건…… 역시 문제 될 것이 없겠군. 그러면 한 가지 부탁은 무엇인가?”
황제는 이 부탁이 소녀가 진정 원하는 내용일 거라 짐작했다.
실제로 이 부탁이야말로 엘리제의 진정한 바람이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황태자와의 파혼도, 의사로서의 삶도 사실상 포기하고 바라는 부탁.
그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며, 아니, 오히려 드높이며 작은오라버니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일단 이렇게 말했다.
“그건 이 전염병을 해결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흠?”
“죄송합니다. 어차피 며칠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황실에도, 이 제국에도 나쁜 부탁은 아니란 것입니다.”
민체스터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엘리제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다.
“허허, 짐을 너무 궁금하게 하는군.”
“송구스럽습니다.”
“아니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3일. 그 안에 전염병을 해결해 짐에게 뭘 원하는지 말해주게.”
그런데 그때 엘리제가 말했다.
“폐하, 그 전에 한 가지만 먼저 청해도 되겠습니까?”
“뭔가?”
“제가 전염병을 해결한 후 한 가지를 부탁하면 그 부탁이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고, 제국의 뜻에 반하지 않는다면 들어주시겠다고 먼저 약속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
생각지도 않은 청에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그러는가?”
“무리한 부탁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
민체스터의 입장에서 무리한 부탁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폐하의 입장에선 굉장히 사소한 부탁입니다. 폐하께, 그리고 이 제국에 동전 1센트의 피해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제 부탁을 들어주면 제국과 이 영광된 황실에 큰 이득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면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클로랜스 가문의 명예에도, 크림에 원정 갈 제국군에도, 황실의 영광에도. 그리고 작은오라버니에게도.
“그러니 제발 부탁합니다. 나쁜 부탁이 절대 아니오니, 들어주시겠다고 먼저 약속해 주십시오. 만약 들어보고서, 폐하께 무리한 부탁이거나 제국의 뜻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황제가 손해 볼 것은 없는 조건이었다.
미리 들어준다 약속을 해도, 만약 무리하거나 나쁜 부탁이면 거절하면 되니까.
민체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 로마노프 황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하지만 영애가 이야기한 대로 제국의 뜻에 반하는 부탁일 경우엔 들어줄 수 없어.”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하기는. 만약 전염병을 해결해 낸다면 오히려 우리 황실과 브리티아 제국이 영애에게 큰 도움을 받는 것인데. 고개를 들게.”
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들어준다 하긴 했지만, 괜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유리한 줄 알고 계약서에 사인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당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엘리제가 전염병을 해결하고, 황태자비로 들어오면 그토록 원하던 바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잠시 쉬고 황태자에게 가보게. 이번 전염병 관리는 황태자의 책임하에 이뤄지고 있으니까. 내가 영애에게 최대한 협조하라고 말해놓지.”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부탁인 것이지?
‘무리하거나, 나쁜 부탁은 아니라고 했으니.’
하지만 이 순간, 황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엘리제가 내건 사항.
제국과 황실, 그리고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란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
엘리제는 장미 정원에 앉아 황태자의 연락을 기다렸다.
붉은 장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원점으로 돌아왔구나.’
비극적인 삶을 겪은 그녀가 이번 삶에서 가장 크게 세운 목표는 황태자와의 결혼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와의 결혼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래서 필사적으로 노력했건만 결국 이렇게 이전 삶처럼 되어버렸다.
‘아니, 그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나빠. 그때는 의사란 소망이 없었으니까.’
그래, 그때보다 지금이 더 최악이었다.
자신은, 외과의사의 영혼을 가진 자신은 이제 의사의 길에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었다.
그 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숨 막히는 긴장.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보람.
그것들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건 화가에게서 붓을 뺏는 거고, 작곡가에서 음악을 뺏는 거고, 삶을 뺏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아직 1년 정도의, 크림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유예 기간이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의사가 아닌 황태자비로서 살아야 하리라.
“오와다 마사코.”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지구에서 오래전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오와다 마사코(小和田 雅子).
현 일본의 황태자비.
그리고……감옥에 갇힌 나비. 황금 새장에 갇힌 공주.
하버드 대학교 학부, 옥스퍼드 대학원을 졸업한 재원인 그녀는 일본 외무성의 가장 촉망받는 외교관으로서 빛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날개가 꺾인 것은 일본의 황태자인 친왕(親王)과 결혼한 이후부터였다.
누구보다 빛나던 그녀는 왕실에 갇힌 나비가 되었다. 그리고 빛을 잃고 날개가 꺾였다.
별것 아닌 이웃 나라 일본 왕실의 이야기.
그냥 오늘따라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어쩔 수 없어.’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 화급히 닦았다.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 이걸로 작은오라버니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거야. 그러니 됐어.’
뭐가 그렇게 서러울까. 닦았으나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마. 따지고 보면 다 네 업보잖아, 엘리제. 그렇게 못되게 굴었으니 이번에 갚는 것일 뿐이야.’
그녀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와의 결혼도. 그래,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야. 난 이전 삶의 엘리제가 아니니까. 내가 못되게 굴지 않으면 그때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그래, 난 달라졌으니까.
‘비록 사랑받지는 못하겠지만, 나도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지난 삶.
보답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그녀는 삐뚤어져 갔다. 원래도 못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약 사랑받았다면 그렇게 극단적으로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삶에는 그와 결혼해도 아프지 않을 거야. 그렇게 혼자만 바라보다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거야.’
이번엔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
혼자만 바라보던 사랑은 지난번만으로도 너무 아팠으니까.
‘그러니 됐어. 그렇게만 하면 돼. 모두 잘됐어. 잘했어, 엘리제.’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 순간이었다.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흑, 흐윽.”
봇물이 터진 듯. 서럽게. 이유도 없이.
모두 다 잘됐으니, 울 이유도 없는데.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 없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론 님.’
갑자기 그가 떠올랐다.
이제 볼 수 없는 그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차가운 얼굴이, 무뚝뚝한 말투가, 재미없는 농담이, 여자에 서툴러 투박하지만 자신을 생각하던 그 태도가.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 하소연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아아, 제발…….’
그런데 하늘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걸까?
이 자리에서 도저히 들릴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엘…… 리제?”
서늘한 음성.
엘리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러나 이 순간 너무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어째서 그가 여기에?’
아니, 있을 수도 있었다. 그도 황실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론…… 님?”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아니었다.
흑발의 금안, 차가운 인상에 조각 같은 외모.
론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전혀다른 사람.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엘리제는 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내가 착각했구나.’
서러운 마음 때문이었을까? 어지간히 론이 보고 싶었나 보다. 이런 착각을 하다니.
“…….”
그런데 황태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엘리제가 예를 올렸음에도, 답도 없이 뚫어져라 그녀를 노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마치 화라도 난 것처럼.
“전…… 하?”
“무슨 일이 있었지?”
“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울고 있느냐는 말이다!”
엘리제는 당황해 눈물을 닦았다.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아무 일도 아니야? 그런데 천하의 그대가 그렇게 울어?”
“저, 정말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마 황태자는 자신과 황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직 못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거지?
어쨌든 그녀는 황태자가 더 뭐라고 하기 전 허겁지겁 몸을 가다듬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흐트러진 옷차림도 정리했다.
그리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퉁퉁 부었을 것 같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랬습니다. 국가적 재난을 논하기에 앞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
흐트러진 모습을 추스른 그녀를 보며,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그녀를 노려보았다.
“따라와라. 부황께 이야기 들었다. 전염병에 관해 이야기하지.”
황태자는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보폭을 따라가기 어려운 빠른 걸음.
그런데 그 배려 없는 모습이 누군가를 다시 떠오르게 했다.
무뚝뚝한 또 다른 남자, 론이었다.
그도 항상 이렇게 그녀를 뒤에 두고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갔었다.
그때는 참 여자를 대할 줄 모른다고 속으로 쿡쿡 웃었는데, 앞으로 못 본다 생각하니 그리웠다.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겠죠? 꼭 조심하세요.’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딘가에 있을 그를 향해 기도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