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2-7 가족 =========================================================================
[2-7장 : 가족 (2)]
하지만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안 그러던 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전 삶에선 항상 이성적이고 냉철하기만 했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후에 약혼이 예정되어 있긴 하나, 아직 전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 말을 들은 황태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실제로 그녀의 말은 그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전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이 그의 마음을 산산이 찢어놓았다.
“그래, 그대와 난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황태자의 입에서 비틀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흥분해서 잊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녀가 전쟁에 나간다는 사실에 너무나 걱정되고, 속이 상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잊고 있었다.
“미안하군. 언성을 높여서. 제국의 황태자로서 클로랜스 가문의 딸인 자네가 상할까 염려되어서 그랬던 것이니 잊어주길 바란다.”
“……아닙니다, 전하.”
“그러면 이만.”
그렇게 인사 후 황태자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일까? 저렇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그녀도 이상하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
자신의 방에 돌아가 책상에 앉은 황태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전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녀의 말이 옳았다.
시간이 지나 약혼식을 올리면 모를까? 부황이 억지로 맺은 인연일 뿐, 그녀와 자신은 아직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그런데 그 말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이 덜 아플 만큼. 너무나 아팠다.
도대체 얼마나 더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걸까?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젠장.”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나 싫어하니, 물러나야 하는 걸까?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하지만 입술 사이로 비틀린 말이 흘러나왔다.
“웃기지 마. 이 내가. 이 린덴 드 로마노프가? 절대 물러나지 않아. ‘그날’ 이후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생겼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말한다.
황태자는 모든 것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그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왔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가 가진 것 중, 그 어느 것 하나 거저 얻은 것이 없었다.
15년 전의 ‘그날’. 그 비극으로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싸늘한 주검 앞에서 부르짖으며 외쳤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반드시 황제가 되어 이 비극을 일으킨 자들을 단죄하겠다고.
오로지 그 하나의 염원(念願)을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저 어미, 누이와 놀기 좋아하던 순진한 소년은 검을 들었고, 책을 펼쳤다. 제왕학을 익혔고, 경제, 경영, 정치, 문화 등 모든 것을 익히고 또 익혔다.
오로지 제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니, 그건 노력이라 부를 영역이 아니었다. 집념이고 독기였다.
그 집념과 독기 덕에 그는 모든 이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독기를 가진 자신이다.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엘리제.’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녀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아파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뭐?
아무리 아파도 놓지 않겠다.
‘그날’ 이후 유일하게 생긴 바람이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낸다 해도, 그래서 자신의 가슴이 너덜너덜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그녀의 마음을 가지질 것이다.
‘그러니 제발 다치지 마라, 엘리제. 제발.’
***
론도의 대귀족들이 모여 사는 화이트 거리.
그곳에 위치한 클로랜스 가문의 저택이 발칵 뒤집어졌다.
엘리제의 참전 소식을 들은 것이다.
심약한 새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충격으로 기절해 버렸다.
“엘리제! 너!”
엘 후작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이가 딱딱 부닥쳤다.
“네 오라비를 대신해 참전한다고? 절대! 절대 안 된다!”
“죄송해요, 아버지.”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너……!”
작은오라버니도 불같이 화를 냈다.
이전과 이번 삶을 통틀어 그가 이렇게 화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전장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치료하고 싶어요. 그래서 폐하께 참전을 요청했어요. 죄송해요.”
그녀는 그렇게 거짓말했다.
작은오라버니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엘리제의 지금까지 행적을 봤을 때, 일견 그럴싸해 보이는 거짓말이긴 하다.
물론 엘 후작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거짓말은 오히려 그의 분노를 더욱 불태웠다.
“절대 안 돼! 전염병도 모자라, 이제는 전장의 환자를 치료한다고?!”
엘 후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염병을 치료한다고 나섰을 때도 걱정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다행히 별일 없이 끝났지만, 도대체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전염병도 모자라, 이번엔 전쟁이라고?
“내 너를 처음부터 병원에 보내지 말아야 했다! 전쟁은 무슨? 이제부터 넌 병원에도 출입금지다!”
“……죄송해요.”
엘리제는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단 말만 반복했다.
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고집을 굽히진 않았다.
결국, 그런 그녀를 보며 엘 후작은 폭발했다.
“아비 말을 이렇게나 안 듣다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생각도 않는 거냐?! 이제부턴 넌 내 딸도 아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 저택에서 나가라!”
“……!”
“생각을 바꾸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마!”
엘리제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녀에게 불같이 화내는 아버지의 눈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건 작은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 역시 걱정으로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버지…… 작은오라버니 사랑해요.’
그런 그들을 보며 엘리제도 눈이 시큰거렸다.
사랑한다. 저들을.
너무나도.
하지만 그러므로 자신이 가야 했다. 가족의 죽음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절대로.
다치더라도, 혹시나 잘못되더라도 그건 자신이어야 했다.
“아버지, 작은오라버니.”
엘리제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죄를 빌 듯 깊게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란 말은 삼켰다.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와, 이 말을 다시 저들에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
그렇게 엘리제는 한밤중에 집에서 쫓겨났다.
가주인 엘 후작은 완강히 선언했다.
‘참전을 취소하지 않는 한, 절대 집에 들이지 않겠다!’
한마디로 참전을 취소하란 이야기였다.
물론 엘리제는 그럴 수 없었다.
“어디로 가지?”
대귀족의 저택들이 모여 있는 화이트가(街)에 한복판에서 엘리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테레사 병원을 떠올렸으나, 거기는 안 됐다.
아버지가.
‘병원에서도 해고다! 의사는 무슨? 앞으로 병원 근처에 올 생각도 하지 마!’
했으므로. 졸지에 그녀는 실업자가 되었다.
“하아.”
엘리제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집 근처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콜레라와 싸우느라 몸을 혹사했다.
그런데 오늘 황제와의 면담, 황태자와의 다툼, 그리고 가족들과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로가 너무 심했다.
“머리 아파. 춥네…….”
엘리제는 중얼거렸다.
벌써 가을이 깊어, 날씨가 쌀쌀했다. 찬바람을 맞으니 머리가 아팠다. 이마가 뜨뜻한 것이 조금 열이 있는 것 같기도.
‘또 감기가 오나…… 졸려…….’
그렇게 엘리제는 멍하니 있었다.
피곤하고, 아프고, 졸렸다.
‘따뜻한 침대에 눕고 싶은데…… 따뜻한 차와 함께…….’
그런데 그때였다.
뚝. 뚝-
어두운 밤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아, 비가…….”
두둑. 드득-
한 방울씩 내리던 게 곧 줄기를 이루고, 장대처럼 쏟아졌다.
엘리제는 피할 생각도 못하고 순식간에 홀딱 젖었다.
“…….”
갑자기 한 방울 눈물이 흘렀다.
왠지 자신의 처지가 기구하게 느껴졌다.
‘전쟁에 나가는 것은 괜찮아. 내 지난 삶의 죄를 갚는다 생각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냥.’
그냥 다 궁상맞게 기구하다 느껴졌다.
이렇게 쫓겨난 것도, 갈 곳 없이 비에 맞는 것도, 전쟁에 나가는 것도, 황태자와 다시 결혼해야 하는 것도. 모두.
“…….”
그렇게 그녀는 말없이 비를 맞았다.
비가 오면 딱 하나 좋은 게, 눈물을 숨길 필요가 없다.
온몸이 홀딱 젖고, 찬 기운에 하얀 입김이 나오며 몸이 살짝 떨렸지만,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맙소사? 데임 클로랜스? 맞죠?”
“……?!”
고음의 음성.
놀라 고개를 돌리니,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도대체 뭐 하고 있으세요?”
모델같이 큰 키.
당당함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얼굴.
귀족파의 수장인 차일드 가문의 공녀, 유리엔 드 차일드였다!
유리엔 옆에는 한 젊은 남성이 우산을 들고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형제인지, 친척인지 유리엔과 똑 닮았는데, 왠지 인상이 오만하고 독선적이게 보였다.
“맙소사,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얼굴 하얗게 질린 것 봐.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뭐 하세요?”
유리엔은 엘리제의 몰골을 보고 놀라 말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못 들어가요.”
“네?”
“……쫓겨났어요.”
유리엔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뭐? 쫓겨나?
엘리제는 풀죽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크게 잘못한 게 있어서. 그래서 쫓겨났어요.”
“…….”
유리엔은 그녀가 농담을 하나 살펴봤다.
하지만 저렇게 덜덜 떨며 비를 맞고 있는 것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론도를 구한, 의술의 성녀로까지 불리는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데임 클로랜스. 기적 같은 의술로 론도를 구한 성녀.’
유리엔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채 반년.
아니, 반년도 안 됐다. 그녀가 변한 시간은.
그 짧은 시간 만에 그녀는 완전히 다른 이가 되었다. 못된 공녀에서,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로.
지금 저 소녀는 론도의 어떤 귀족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냥 작아 보이는걸.’
하얗게 질려,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동정심을 자극했다.
적대 가문의 딸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황태자와 결혼할 예정인 소녀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게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소녀는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어디 갈 곳은 없어요? 이러고 밤새 비 맞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갈 곳…….”
엘리제는 고민했으나, 딱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황궁?
황제 폐하도 만만치 않게 화난 상태라 무리였다.
그때 순간 떠오른 얼굴.
‘론 님…….’
론, 그라면 자신을 받아줄지도.
하지만 그녀는 그가 어디 사는지커녕, 정확한 성도 모른다. 신분을 밝히는 걸 꺼리는 듯해 자세히 묻지 못했던 탓이다.
‘보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었다.
‘전쟁에 나가면 만날 수 있을까?’
그럴지도. 하지만 엘리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서는 안 만나는 게 좋을 듯했다.
의사인 자신을 만난다는 건 그가 다쳤다는 뜻일 테니까.
“…….”
유리엔은 말없이 엘리제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
“갈 곳 없으면, 우리 집이라도 올래요?”
“……예?”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유리엔, 그녀의 집은 귀족파의 수장인 차일드 가문의 저택을 뜻한다.
옆에 말없이 있던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유리엔, 저 소녀는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야.”
차일드 가문과 클로랜스 가문은 사이가 안 좋다 못해, 원수와도 같았다. 서로 암살자를 안 보내는 게 신기할 정도로.
하지만 유리엔은 이렇게 답했다.
“알아요. 그게 뭐 어때서요?”
“…….”
“지난번 탄신연회 때, 같이 차나 한잔하기로 했었죠, 데임 클로랜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제가 차나 한잔 대접할게요. 초대를 받아주시겠어요?”
그렇게 엘리제와 유리엔. 그녀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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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요일 09시 7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