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2-7 가족 =========================================================================
[2-7장 : 가족 (3)]
엘리제는 차일드 가문의 저택에 들어왔다.
우습게도 그녀가 앉아 있던 벤치 뒤에 있는 게 차일드 가문의 저택이었다.
그녀는 차일드 가문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유리엔은 집에 들어가다 그녀를 본 거고.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이랑 코앞이네. 이 정도면 이웃사촌이 아닌가?’
엘리제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나름 이웃사촌이 맞긴 했다. 브리티아 제국의 패권을 다투는 이웃사촌.
‘집 안은 의외로 검소하네. 차일드 가문답지 않게.’
돈놀이꾼이라 조롱받기도 하는 차일드 가문의 정체는 국제 은행 재벌 집단의 수장이었다.
브리티아 제국 은행.
파리스 투자 은행
차일드 은행
프러시엔 중앙은행
시티 앤 모던스 은행
YP 은행
BSTC 은행.
차일드 가문과 서대륙에 퍼져 있는 그 밑의 계열 가문들이 소유한 은행의 명단이었다. 어마어마한 명단이 아닐 수 없었다.
즉, 그들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부자로 그들이 다루는 금화의 양은 웬만한 열강들의 재정을 훌쩍 능가했다.
‘사실상 서대륙의 경제를 움켜쥐고 있는 가문.’
나라를 움직이는 데에는 돈이 든다. 전쟁이든, 건설이든, 투자든, 뭐든 다 돈, 돈, 돈이다.
그런데 그 돈을 모두 세금으로만 충당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은행에 돈을 빌려야 할 때가 많은데, 그 돈을 빌려주는 곳이 바로 차일드 가문의 은행들이었다.
‘어차피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돈은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 만약 못 갚으면 국가 소유의 재산을 헐값에 받아넘기고.’
그렇게 그들은 막대한 금력을 이용해 돈을 빌려주고, 고리의 이자를 받으며 앉아서 헤엄치는 식으로 재산을 불려 왔다. 그래서 생긴 조롱 섞인 별명이 돈놀이꾼이다.
돈놀이꾼 차일드 가문.
하지만 실상은 모든 나라가 눈치를 보는, 어마어마한 금권(金權)의 소유자.
민체스터 황제도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감히 차일드 가문을 손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것치곤 검소해. 집 안이 온통 황금으로 덮여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클로랜스 가문의 저택과 비슷했다.
그런데 그때, 방문이 열리며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유리엔이 들어왔다.
하늘하늘한 옷감 사이로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씻으셨나요, 데임?”
“아, 네. 배려 감사합니다.”
유리엔은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하녀에게 목욕물을 준비시켜 그녀가 씻을 수 있도록 했었다.
“비에 젖었으니, 잘 씻어야죠. 안 그러면 감기 걸린다고요. 그렇지 않아도 맨날 감기에 걸리신다면서요.”
“아, 네. 그런데 제가 자주 감기에 걸리는 건 어떻게?”
유리엔은 코웃음 쳤다.
“요즘 데임이 수도에서 얼마나 인기인 줄 아세요? 피카딜리의 최고 인기 배우보다 더 하다고요. 데임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해 특집으로 올리는 잡지가 있을 정도니까요. 어쨌든 그런 것들 보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되었네요.”
엘리제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옷은 맞으세요?”
엘리제는 홀딱 젖은 옷을 벗고, 유리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좀…… 크네요.”
모델 같은 유리엔의 옷이다 보니, 여자치고도 작은 체구의 엘리제에겐 엄청 컸다.
소매도, 가슴 폭도, 힙도 헐렁헐렁한 모습에 유리엔은 왠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애기네, 하는 표정?
반면 엘리제는 계속 멍한 표정이다.
“데임?”
“아, 네?”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유리엔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따뜻한 차를 마셨는데도, 계속 안색이 하얗다.
“그냥…… 조금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엘리제는 답했다.
열이 올라오는 것이 또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또요?”
“네.”
“정말 자주 걸리시네요. 혹시 면역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에요? 면역이 떨어지면 감기에 자주 걸린다는데.”
엘리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아니에요. 그냥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어요.”
그러면서 엘리제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유리엔이 면역이란 개념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지구에서라면 몰라도, 이 시대에 흔하게 알려진 개념이 아닌데?
그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유리엔이 답했다.
“한번 공부해 봤어요.”
“공부요? 의학을요?”
“네.”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차일드 가문의 공녀가 의학을 왜?
“부러워서요.”
“누구를요?”
그 순간, 유리엔은 그녀를 바라봤다.
“누구긴요. 데임이죠.”
“……저를요?”
“네.”
“……왜요?”
나를? 왜?
유리엔은 씁쓸히 웃더니 말했다.
“데임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가진 분이거든요. 그래서 한번 따라 해봤어요. 저도 영애처럼 의학을 공부하면 같은 행운이 올까 하는,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유리엔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탓이다.
‘그건…… 아마 황태자의 비.’
그래, 그녀는 황태자를 사랑했다.
그것도 가슴 깊이. 이전 삶의 자신에 비해 못하지 않을 정도로.
“뭐, 어쩔 수 없죠. 우리 가문은……. 언감생심 감히 바라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녀의 눈은 갈망으로 젖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향한 마음에 가슴이 아프리라.
엘리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유리엔 공녀라면 아주 좋은 황태자비, 황후가 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기적이 몇 번이고 일어나지 않는 한, 그녀와 황태자는 맺어질 수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엘리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떠올리고, 어두운 얼굴을 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아마 이전 삶과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방법이 없겠지.’
이것만큼은 엘리제도 방법이 없었다.
이미 그들 차일드 가문은 3황자, 미하일과 한배를 탔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태자 린덴은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염원은...
‘하아.’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자신과 다르게 당당하고 멋진, 아름다운 저 여인이 그런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데임께 괜한 이야기를 했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유리엔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푹 쉬세요. 잠자리를 준비해 놓으라 할게요.”
“아, 그렇게는 괜찮은데…….”
엘리제는 손을 저었다.
자신이 적대 가문인 차일드의 저택에서 묵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유리엔은 핀잔을 주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보아하니, 이 밤에 갈 곳도 없는 것 같은데. 비바람에 또 나가서 덜덜 떨게요? 그냥 주무시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거절할 처지가 못 되는지라, 엘리제는 감사를 표했다.
“하늘을 보니 비가 계속 올 것 같은데, 만약 갈 곳 없으면 며칠 더 있다가 가도 돼요. 저택에 방은 많으니까요.”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차일드 가문에 신세를 질 순 없다.
내일 날이 밝으면, 어떻게든 지낼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엘리제는 생각했다.
‘작은 병원에라도 가서 일하며 당분간 숙식을 해결해야지.’
***
하지만 엘리제는 다음 날도 차일드 가문을 떠나지 못했다.
비에 맞으며 감기에 된통 걸렸는지, 고열을 심하게 앓았던 탓이다.
39도를 넘나드는 고열이라서, 침대에서 꼼짝도 못했다.
“나, 나가야 하는데……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침대에 파묻혀 빨개진 얼굴로 말하는 엘리제를 보며 유리엔은 피식 웃었다.
아픈 사람한테 할 생각은 아니지만, 유리엔은 엘리제가 동생같이 귀엽단 생각을 했다.
저렇게 작고 여리면서 그런 일들을 해왔다고? 전쟁에도 참전할 예정이고?
대단하긴 참 대단했다.
“됐어요. 빨리 낫기나 하세요.”
유리엔은 의사까지 불러주었다.
그것도 테레사 병원, 황실십자병원과 더불어 론도 3대 병원이라는 로즈데일 병원의 수석 교수를.
“약을 지었으니, 빠지지 않고 복용하십시오. 2~3일 정도 지나면 좋아질 것입니다, 데임.”
로즈데일의 수석 교수 카일 준남작은 엘리제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제국 의학계의 신성(新星)이자, 황태자비가 될 그녀가 감기로 자신의 진료를 받는 게 신기했던 것이다. 그것도 차일드 가문의 저택에서!
“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쾌차하십시오.”
몸이 낫기 전, 3일 동안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차일드 가문에 머물렀다.
마음이 무척 불편했지만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리엔, 그녀와 조금은 가까워진 것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유리엔은 감기를 앓는 엘리제를 여러모로 많이 돌봐주었다.
마치 친동생을 살피듯.
엘리제는 진심으로 감사해했고, 유리엔은 피식 웃으며 괜찮으니 나중에 식사나 한번 사라고 했다.
‘이렇게 계속 친하게 지냈으면.’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서로의 입장상 편하게 지낼 수야 없겠지만, 엘리제는 유리엔, 그녀가 좋았다.
그리고 몸이 거의 나아갈 무렵 이런 일도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차일드 후작이 그녀를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암셀 드 차일드 후작.’
만찬 테이블에서 그를 마주한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서대륙의 경제를 한 손에 쥔 자!
그리고 아버지와 황태자의 정적(政敵)이자 귀족파의 수장.
마지막으로 현 황실의 공식적 안주인인 1황비의 친오라버니.
그런 대단한 인물이 그녀 앞에서 야채수프를 먹고 있었다. 간이 안 맞는지 싱겁다, 라고 중얼거리며.
“아버지는 건강하신가?”
“아, 네.”
“감기는 괜찮고? 카일 교수가 그러길, 감기가 심하다던데. 쿨럭.”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조심해야지. 의사인 영애가 더 잘 알겠지만, 몸 관리를 잘 안 하면 늙어 고생한다네. 나처럼. 쿨럭. 요즘 기침이 계속 나와 불편해 죽겠어.”
엘리제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천하의 차일드 후작과 이런 일상적 대화라니!
죽을 만큼 불편했다.
‘그나저나.’
엘리제는 샐러드를 깨작거리는 차일드 후작을 조심히 살폈다.
‘생각보다 평범하구나.’
날카로운 눈매는 독사(毒蛇)란 별명 그대로지만, 가족들과 식사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병으로 죽은 장자를 대신해 후계자로 맞은 수양아들인 알버트와 딸인 유리엔에게 간간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뿐, 제국의 패권을 다투는 야심가다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유리엔에겐 이리저리 잔소리하기도 했다.
옷차림이 정숙하지 못하다느니, 매번 너무 늦게 들어온다느니, 파티장에서 술은 적당히 마시라느니.
“알았으니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아버지. 데임께서 보고 계시잖아요.”
평소에도 잔소리가 많은지 유리엔이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일반 가정집에서 아버지와 딸의 투닥거림과 별반 다름없는 모습이어서 엘리제는 의외란 생각을 했다.
‘집에선 가정적인 성격인 건가?’
이렇게만 보면, 그냥 완고한 인상의 왜소한 중년 남자로만 보였다.
평소의 악명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잔소리 많은 가정적인 독사(毒蛇) 차일드 후작이라니.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그런데 한참 식사 중,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쿨럭, 갑자기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 봐야겠군. 초대하고서 먼저 일어나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각하.”
원래부터 건강이 안 좋은지, 차일드 후작은 말을 할 때마다 연신 기침을 했다.
그런데 식당을 나서기 전, 그가 엘리제를 돌아봤다.
“참, 영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부탁…… 말입니까?”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차일드 후작이 나한테 부탁이라니?
“저, 아이.”
그는 손가락으로 유리엔과 닮은 오만한 인상의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차일드 후작의 수양아들로, 엘리제가 비를 맞고 있을 때 유리엔과 같이 있던 남자였다.
“이번에 영애와 같이 2차 원정군으로 크림에 나간다네. 그럴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몸이 상하거든 영애가 잘 봐줄 수 있겠나?”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