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0 2-7 가족 =========================================================================
[2-7장 : 가족 (4)]
“……!”
혹시라도 아들이 부상을 당하면 잘 치료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남자가 얼굴이 살짝 붉어져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제 실력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의 도움을 받을 바엔.”
“알버트.”
차일드 후작이 가만히 말을 끊었다.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지펠, 그 아이도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거늘.”
“……!”
지펠.
2년 전, 전사한 1황자를 말한다.
1황자는 1황비 태생으로, 1황비의 오라비인 차일드 후작에게는 조카가 된다.
참고로 3황자인 검제(劍帝) 미하일도 1황비 태생으로, 차일드 후작의 조카였다.
“전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 그리고 뛰어난 실력의 의사는 네 생명을 한 번 더 연장해 줄 수가 있어.”
“……네.”
알버트는 뭔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영애.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잘 봐줄 수 있겠나?”
그런데 그 순간, 엘리제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전 삶에서 내가 알버트 경을 만난 적이 있었나?
없었다.
크림전쟁 이후, 차일드가(家)의 차기 당주(當主) 후계자는 공녀인 유리엔이었다.
그 말의 의미는 단 하나.
현 후계자인 수양아들 알버트가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이다. 멀쩡히 건강한 그가 물러날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크림전쟁 때 전사했구나. 아니면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나.’
엘리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내색하진 않았다.
대신 이렇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의사입니다. 그런 부탁하지 않으셔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만약 저 아이를 도와준다면 나, 암셀과 차일드 가문은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거야.”
그렇게 차일드 후작은 기침하며 식당에서 나갔고, 그날의 만찬은 끝이 났다.
***
차일드 가문의 저택에 온 지, 4일째 되는 날.
엘리제는 완전히 몸이 나았다.
‘정말 나가야겠구나.’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는 더 신세 질 수 없었다.
‘집에 갈 순 없겠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쫓겨나 있으니 아버지, 오라버니, 새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무리였다. 벌써 화가 풀리셨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저택의 하녀가 엘리제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 데임. 찾아오신 분이 계세요.”
“네, 저를요?”
엘리제는 놀란 얼굴을 했다.
차일드 가문에 머물고 있는 나를 찾아?
‘혹시?’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찾아올 만한 이는 단 하나다.
“클로랜스 가문에서 오셨어요.”
역시!
그녀의 가슴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누가 오셨지? 작은오라버니? 혹시 아버지? 용서해 준다는 뜻일까? 아니면 더 화를 내시려고?’
손님은 차일드 가문이 불편한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저택의 입구에 있다고 했다.
엘리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녀를 맞았다.
“엘리제.”
“큰…… 오라버니?”
차가운, 마치 보도(寶刀)를 벼린 듯한 아름다운 남자.
렌 드 클로랜스 남작이었다!
“…….”
왜 큰오라버니가?
엘리제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큰오라버니, 렌은 동생의 쫓겨남 같은 사소한(?) 일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늘 그렇듯 못마땅한 시선으로.
“……왜 그렇게 보세요?”
“마음에 안 들어서. 이제 사고 안 치나 했더니. 역시나 사고뭉치는 영원히 사고뭉치구나.”
뭔가 발끈하게 만드는 말투였으나, 뭐라 대답할 말은 없었다. 대박 사고를 치긴 했으니까.
렌은 한숨을 내쉬더니 툭 말했다.
“따라와라.”
“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따라와. 가르칠 게 있으니.”
“가르쳐요? 뭘요?”
렌은 동생의 눈을 바라봤다.
“죽이는 법.”
“……네?”
“정확히는 자신을 지키는 법이다. 따라와라.”
***
타앙!
귀가 찢어지는 듯할 굉음이 사방에 울렸다.
“……!”
엘리제는 난생처음 듣는 그 소음에 잔뜩 몸을 움츠렸다.
렌이 혀를 찼다.
“뭘 이런 소리 가지고 놀라는 거냐? 전장에 나가면 매일 듣게 될 텐데.”
“…….”
그가 엘리제를 데려온 곳.
그곳은 다름 아닌 총-기사단의 사격장이었다.
“저…… 오라버니. 여기는 왜?”
“왜? 2차 원정군으로 간다며. 총 쏘는 법 배워야지.”
“하지만 전 의사로 참전할 예정인데.”
그녀는 일반 보병이 아닌 의사로 참전할 예정이니, 직접 전투에 참가할 일은 없다. 그러니 사격을 배울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렌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이 전장에 가겠다고?”
“……!”
“물론 의사인 네가 전투에 휘말릴 일은, 후방 병원까지 전선이 무너지지 않는 한 없겠지. 그래도 전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러니 잔말 말고 받아라.”
그러고 렌은 천에 둘러싸인 물건을 건네었다.
“이건?”
물건을 건네받고 묵직한 무게에 엘리제는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천을 풀어보니 차가운 회색의 금속이 나타났다.
권총, 최신식 7연발 리볼버였다.
“…….”
처음 만지는 총의 감촉에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간이 많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자. 총 장전하는 법, 쏘는 법 다 모르지?”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이게 약실이고, 탄알이 들어가는 부위다. 최신식이어서 옆으로 뺄 수 있게 되어 있고. 발사 방법은 간단하다. 공이를 뒤로 당겨 장전 후.”
그러면서 큰오라버니가 시범을 보여주었다.
“이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다.”
타앙!
굉음에 엘리제는 다시 한 번 움찔 놀랐다. 총의 소음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컸다.
“봐라.”
오라버니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50m 밖 과녁의 한가운데가 정확히 관통되어 있었다.
사거리가 짧은 리볼버 권총으로 50m의 표적을 정확히 뚫다니. 총기사단의 부단장다운 대단한 사격 솜씨였다.
“너한테 이 정도의 실력을 바라진 않는다. 의사인 너한테 필요도 없고. 20미터, 아니, 15미터 앞의 과녁만 맞혀라. 그러면 합격점을 주지.”
“15미터요?”
엘리제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15미터면 바로 코앞이다.
그 거리만 맞추면 된다고?
한 번도 총을 쏴본 적은 없지만, 그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렌은 비웃음을 지었다.
“쉬워 보이지? 한번 해봐라. 참고로 합격점을 받을 때까지는 여기서 못 나간다. 밥도 안 먹일 거야.”
완전 강압적인 큰오라버니였다.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총을 들었다.
‘15미터. 그 정도는.’
고난이도 수술도 척척하던 자신이다. 고작 그 정도 거리 사격을 못 할까 보냐?
그런 생각으로 총을 쐈으나, 결과는 놀라웠다.
7발 중 한 발도 못 맞혔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과녁 근처에 떨어진 것도 없었다.
“뭐하는 거냐?! 집중해서 제대로 쏴! 가늠자를 정확히 봐야지!”
렌 남작은 마치 견습 기사단원을 가르치듯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총을 들었다.
타앙! 타앙!
하지만 이번에도 한 발도 못 맞혔다.
“방아쇠를 당길 때 손끝이 움직이잖아! 그러면 당연히 안 맞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 눈과 어깨와 총의 가늠자가 일직선이 되게! 그렇지 않으면 절대 안 맞으니!”
렌은 엘리제가 잘못할 때마다 호되게 혼냈다.
그러나 아무리 쏴도 맞지 않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한 발도 안 맞잖아. 똑바로 해!”
결국, 엘리제는 총을 내려놓았다.
“못하겠어요.”
“뭐?”
“못하겠다고요! 아무리 해도 안 맞아요. 손도, 어깨도, 허리도 너무 아프고요!”
엘리제는 강하게 항의했다.
사격을 시작한 지 벌써 2시간째다. 무거운 금속 권총을 들고 뻣뻣하게 손을 뻗어 사격하니, 너무 힘들었다.
평소에 관심도 없다가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큰오라버니도 서운했고.
“애초에 의사로 참전하는 제가 사격을 잘할 필요가 없잖아요!”
하지만 렌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하는데 총 다시 들어.”
“……!”
“넌 겨우 이 정도의 각오도 없이 전쟁에 나간다고 한 거냐?”
그가 말을 이었다.
“사격술. 그래, 의사인 네가 총을 쏠 일은 거의 없겠지. 나도 네가 총을 쏠 일이 전쟁 내내 한 번도 없었으면 좋겠다. 후방 병원에서 일할 네가 총을 쏘게 된다는 것은, 우리 군이 패전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큰오라버니는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그 만약의 경우! 네가 위험할 때 이 한 발이 너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어! 그걸 왜 몰라?! 그러니 너를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와 크리스,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총 들어!”
“……!”
그 순간, 엘리제는 깨달았다.
큰오라버니가 왜 자신을 이렇게 몰아붙이는지.
그건 걱정이었고, 사랑이었다.
전쟁에 나가는 동생을 향한.
만약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조금이라도 동생의 생존율을 높이고자 하는 바람이리라.
그 생각이 들자, 그녀는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됐고. 총이나 들어. 내가 참전 준비로 시간이 많이 없어, 너를 오래 봐줄 수가 없다. 그러니 집중해.”
“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며 총을 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각오로.
‘그래, 무슨 일이 생겨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어.’
그래서 아버지와 오라버니, 어머니를 다시 만날 거다. 걱정시켜서 죄송했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줄 것이다.
타앙! 타앙!
그녀는 마치 처음 수술을 배울 때처럼 집중해 렌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이윽고.
탕!
과녁의 한가운데가 뚫렸다.
타앙! 타앙!
다시 연이어 명중!
‘됐어!’
엘리제는 오라버니를 돌아보았다.
“저 잘했죠, 오라버니?”
하지만 렌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잘하긴? 양심이 있어봐라. 수백 발을 쏴서 겨우 3발 맞췄는데.”
역시 렌다운 답변에 엘리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칭찬 좀 해주면 덧나나?
그런데 그때, 렌이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제 조금. 아주 조금 낫긴 하군. 아직 한참 멀었지만.”
“……!”
엘리제가 물었다.
“오라버니, 그거 나름 칭찬하신 거죠?”
“칭찬은 무슨. 아직 멀었으니, 더 열심히 하기나 해.”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큰오라버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왠지 모르게 즐거웠다.
“네, 더 열심히 할게요.”
“그래, 이제 난 기사단에 들어가 봐야 하니, 혼자 더 연습하고.”
그리고 렌이 말했다.
“참, 엘리제.”
“네?”
“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냐?”
“……!”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들어가고 싶지만…… 아버지랑 오라버니 화가 안 풀리셔서.”
“쓸데없는 이야기 말고, 지금 당장 돌아가.”
“……!”
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크리스 그 못난 놈도 다 네 걱정만 하고 있다. 밖에서 뭐 하고 있는지, 괜찮은 건지. 미운 네가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다들 그러는 건지, 원.”
“…….”
“어차피 아무리 가족들이 말려도 전쟁에 참전할 거잖아?”
“……네.”
“그러면 돌아가서 싹싹 빌고 잘해. 출전하기 전이라도 효도하고 가.”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그녀는 쫓겨난 지, 4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
엘 후작과 작은오라버니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다들 며칠 만에 얼굴이 굉장히 상해 있었다. 걱정이 심했던 것 같다.
엘리제는 뭐라 할 말이 없이 고개를 숙였다.
“엘리제.”
“네, 아버지.”
“이리로 와라.”
“…….”
그녀는 머뭇거리며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그녀를 끌어안은 것이다.
“아, 아버지?”
“엘리제.”
엘 후작이 조용히 말했다.
“사랑한다, 내 딸.”
“……!”
“그러니…… 꼭 조심해야 한다.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 짧은 말에, 그 안에 담긴 사랑과 걱정에 엘리제는 마음이 울컥했다.
“네…… 아버지.”
엘리제는 그렇게 답했다.
뭐라 하고 싶은 말이 더 맴돌았지만, 가슴이 울렁거려 더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저 오랜만에 느껴지는 아버지의 품에 더 안겨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엘리제 드 클로랜스의 2차 크림원정군 참전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어떤 일들을 겪을지.
그래서 종군 의사로 참전한 자신이 어떤 일들을 해낼지. 어떤 이름을 얻게 될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2막 : fin>
<3막 : Lady with the Lamp - start>
============================ 작품 후기 ============================
내일 월요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