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1 3-1 크림 반도 =========================================================================
[3막 : Lady with the Lamp]
[3-1장 : 크림 반도 (1)]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워낙 대규모의 군이 출정하는 것이라, 곧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 군인도 모집하고, 장비도 점검하고, 보급 체계도 세워야 했다.
그래도 브리티아 제국은 세계 최강국답게 2차 원정군 출정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리제, 꼭꼭 조심해야 해. 가서 만약 무서우면 곧바로 돌아오고.”
크리스가 몇 번이나 당부하며 걱정을 했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같이 출정해야 하는데.”
크리스는 자신도 같이 출정하겠다고 주장해 모두를 곤란하게 했다.
엘리제는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의 출정을 원하지 않았다.
이미 큰아들, 딸까지 전쟁에 나가는 판에 작은아들까지 전쟁에 나가는 걸 누가 원하겠는가?
한참을 싸운 끝에 그의 출정을 간신히 말릴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정말 곧 출정이구나. 내일이 출정식이라고?”
“네.”
“성인식을 전장에서 치르게 생겼네.”
크리스는 자신이 속상한 듯 말했다.
“성인식이야 괜찮아요.”
첫 번째 삶, 두 번째 삶을 포함해 성인이 되는 것만 3번째이다. 그러니 성인식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일 출정식 잘 마치고. 연설 준비는 잘했지?”
“네, 여러 번 연습했어요.”
엘리제는 출정식 때 연설을 맡았다.
굉장히 중요하고 영광된 역할이었는데, 이는 그녀가 황태자비로 내정되어 있고, 현재 론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의 출정 소식은 론도, 아니, 제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태자비로 예정된 데임 클로랜스! 크림원정군으로 참전 결정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 할 수 있어.]
[론도를 구한 의술의 성녀, 성(St.) 엘리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원정군으로 참전!]
솔직히 민체스터 황제는 그녀의 참전 소식을 선전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큰 사건(?)을 언론에서 놓칠 리가 없었다.
군부에서도 병사 모집과 사기 진작을 위해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뜨렸고 효과는 예상대로 최고였다.
“데임 클로랜스를 위하여!”
“황태자비를 위하여!”
제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될 지고한 여인. 그것도 론도를 죽음에서 구해낸 데임 클로랜스가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에 참전한다니!
시민들은 크게 감동했다.
“우리도 가자!”
“황태자비를 지키자!”
“공화국 놈들을 무찌르자!”
모두 사기충천하여 외쳤고, 젊은이들의 입대 문의가 빗발쳤다.
덕분에 병사 모집은 조기마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대거 탈락시키는 믿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져, 시민들의 엘리제를 향한 지지와 인기를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출정식 날이 밝았다.
브리티아 섬에서 출전할 15만의 병력이 론도 인근의 항구, 바킹항에 집결했다.
특유의 붉은 제복을 입은 제국군이 오열을 맞춰 정렬해 있는 모습은 엄정하기 그지없었다. 세계 최강의 군대란 말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모습.
군악대의 음악과 함께 3명의 인물이 단상에 올라왔다.
황제인 민체스터.
그리고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
마지막으로 연약한 여인의 몸, 그것도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으로 참전을 결정한 엘리제 드 클로랜스였다.
“로마노프 만세!”
“브리티아 제국의 승리를 위하여!”
그들을 보고 병사들이 큰 환호성을 질렀다.
“전체 차렷!”
부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백전노장의 맥가일 원수가 부대를 지휘해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전 부대! 위대한 황제 폐하께 받들어 총!”
15만의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충!”
빈틈없는 제식(制式).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총검이 하늘을 찌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급하게 모집했지만, 이들은 경험이 없는 병사들이 아니었다.
브리티아 제국의 남자들은 누구나 일정 기간, 최고 수준의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맥가일 원수가 명했다.
“부대! 세워 총! 쉬어!”
다시 총검이 절도 있게 움직였고, 15만의 병사가 부동자세로 황제를 바라봤다.
“자랑스러운 제국의 병사 여러분.”
민체스터가 입을 열어 연설을 시작하였다.
제국군의 승전과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연설.
기나긴 연설 끝에 민체스터가 축복을 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가호가 여러분께 임하길 기원합니다.”
이어 총사령관인 린덴의 차례였다.
그의 연설은 성격답게 짧았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우리는 승리한다. 프랑소엔 놈들에게 이 위대한 제국을 도발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도록 하자. 제군들과 함께라면, 이 브리티아 제국의 자랑스러운 군사인 제군들이라면 연약한 프랑소엔 놈들 따위 몇이 달려들어도 상관없다. 한걸음에 짓밟을 것이다. 그리고 조국으로 돌아와 개선식을 올리자. 온 제국 시민들이 제군들의 이름을 높이고 기억할 것이다!”
“와아아!”
“브리티아 제국 만세!”
사기를 진작하는 그 연설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마지막은 드디어 엘리제의 차례였다.
장교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긴장하지 말자, 엘리제. 잘할 수 있어.’
단상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앞으로 나오는 순간.
“와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장내가 떠나갈 것 같았다.
“데임 클로랜스! 마이 레이디(My Lady)!”
“황태자비 만세!”
“퍼스트레이디(First Lady)! 마이 레이디!”
모두가 그녀에게 열광했다.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임에도, 자신들을 위해 전장에 나서는 여린 소녀.
모두의 마음속에 그녀는 단순한 황태자비를 넘어 누구보다 존귀하고, 지켜야 하며, 자신들과 함께하는 마이 레이디였다.
“친애하는 병사 여러분.”
이윽고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을 빠짐없이 듣기 위해서다.
엘리제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가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저들의 오해처럼 숭고한 뜻을 위해 전장에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참전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생명을 걸고 싸울 저들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왜냐면 그녀가 의사이기 때문에.
“다른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 중 누군가는 다칠 것입니다. 죽는 사람도 나올 것입니다.”
그 말에 병사들이 숙연해졌다.
그래, 자신 중 누군가는 다치고 죽을 것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의사로서 여러분과 함께 가지만 모두를 살릴 것이라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여러분과 주님께 약속하겠습니다.”
엘리제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여러분이 다쳤을 때, 상처로 고통받을 때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한 명이라도 많은 분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무도.”
그래,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럴 능력은 없다.
하지만.
대의명분보다는 작은오라버니 때문에 나가는 전쟁이지만.
그래도. 한 명의 의사로서.
“아무도. 그 누구도 홀로 덧없이 스러지는 분이 없도록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약속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와아아!”
짧지만 진심이 담긴 연설에 제국의 병사들은 다시 한 번 환호했다.
“데임 클로랜스!”
“성(St.) 엘리제!”
“황태자비 만세! 마이 레이디!”
15만의 병사가 한마음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황태자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엘리제는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왜 손을?
그러나 곧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전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병사들은 둘이 다정히 손을 잡은 것을 보고 더욱 열렬히 환호했다.
“황태자 전하 만세! 황태자비 만세! 로마노프 만세!”
“제국의 승리를 위하여!”
엘리제는 붙잡힌 손이 신경 쓰였지만, 병사들을 위해 웃어 보였다. 잡힌 손이 왠지 모르게 뜨거웠다.
한편 황태자는.
‘엘리제.’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제국군의 사기를 위해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나를 미치게 한단 말인가.’
그저 그녀를 향한 갈망이 들어, 그 갈망을 참을 수 없어 잡았을 뿐이다.
‘결국, 참전을 막지 못했지.’
그간 그토록 노력했지만, 황제가 황실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 때문에 그녀의 참전을 막을 수 없었다.
참고로 민체스터 황제는 그날 이후 자신의 경솔했던 약속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 어쩔 수 없어.’
린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내가 지킬 수밖에.’
그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걱정만으로도 이렇게 괴로운데 그녀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가슴이 멎어버릴지도 모른다.
‘중간에 본국으로 쫓아내려 해도, 이 고집불통 여자가 말을 들을 리 없으니.’
그러니 방법은 단 하나다.
자신이 지킬 수밖에.
그렇게 출정식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찰칵!
커다란 렌즈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최근 개발돼, 서대륙 신문사들에 처음 도입되기 시작한 사진기란 발명품이었다.
신문사들은 출정식에서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의 다정한 모습을 흑백 사진으로 보도했다.
한편, 출정식이 한창인 그때.
론도 황궁의 깊은 곳에 자리한 비처. 엉겅퀴가 우거진 유리궁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긴. 전쟁에 나가기 전, 어머니를 뵈러 왔지.”
금발, 금안. 꽃처럼 화사한 얼굴의 남자.
론도 최고의 바람둥이이자, 서대륙 최강의 오러 나이츠.
동시에 황태자의 정적인 3황자 검제(劍帝) 미하일이었다!
그는 검은 신사복에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춤에 은색 검이 이질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오늘은 출정식 아니십니까?”
“어차피 부황의 잔소리나 들을 텐데 가서 뭐해. 대신 부단장 보냈어.”
부단장.
3황자가 단장으로 있는 검기사단(劍-騎士團)의 부단장을 뜻한다. 전원 오러 나이츠로 이뤄진 검기사단은 서대륙 최강의 돌격 기병대였다.
유리궁의 시종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그냥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
“……아시지 않으십니까.”
항상 밝은 3황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웃으며 말했다.
“어미, 아들 사이인데 뭐 어때. 오늘 못 보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못 본다고. 얼굴만 보고 가지, 뭐.”
“……알겠습니다. 황비 마마께서 상태가 불안정하니, 오래 있지는 마십시오.”
시종장은 어쩔 수 없이 건물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3황자의 어머니이자 현 황실의 안주인인 1황비가 머물고 있는 유리궁은 작은 저택만 했다.
궁 내부는 관리는 잘되어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3황자는 씁쓸히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꺄아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랄 소리였지만, 3황자와 시종장 모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익숙했던 것이다.
그저 미하일의 표정만 조금 더 어두워졌다.
“꺄아악! 아악! 안 돼!”
방 앞에 선 시종장이 조심히 문을 열었다.
미하일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들 왔어요.”
그 순간!
퍼억! 파창!
무언가 날아와 그의 이마를 때리고 산산이 깨져 나갔다.
유리잔이었다.
“어머니.”
미하일은 이마와 어깨에 묻은 유리들을 털어내며 그녀를 불렀다. 서대륙 최강검답게 자동적으로 오러가 발동해 다치진 않았다.
“어머니, 저 왔어요. 미하일…… 아니, 밀이에요.”
그는 방 안에서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중년의 여인을 바라봤다.
마리엔 드 차일드.
아니, 이제는 마리엔 드 로마노프가 된, 황후가 없는 현 황실의 안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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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화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