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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62화 (62/194)

00062  3-1 크림 반도  =========================================================================

[3-1장 : 크림 반도 (2)]

하지만 그녀는 아들이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본 미하일의 눈이 꿈틀했다.

자해라도 했는지 손등 여기저기에 상처가 가득했다.

“약을 가져와.”

“네, 전하.”

시종장이 약을 가져왔고, 미하일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저 이제 크림반도로 떠나요. 반도의 사람들이 우리 제국민을 학살해 전쟁이 일어났거든요.”

과연 알아들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리엔 황비의 눈은 여전히 초점 없이 흐릿했다.

그래도 미하일은 계속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어머니 기쁘게 공도 많이 세우고요. 그래서 황제가 되어 황태후로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러니.”

그는 어머니를 조심히 껴안았다.

“잘 지내고 계세요. 사랑하는 나의 레이디.”

그렇게 짧은 면담 후, 미하일은 유리궁을 나왔다.

“조심히 갔다 오십시오. 강건하시길.”

시종장이 전장에 나가는 그에게 말했다.

“그래,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하고. 상처는 잘 살펴줘.”

“네, 전하.”

시종장이 들어가자, 미하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에 접어든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답답한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도대체 누구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일까?’

어머니?

아니면 부황 민체스터?

차일드 가문? 그것도 아니면 황후?

글쎄, 모르겠다.

답답했다.

‘황위고 뭐고, 여행이나 가고 싶군.’

그는 신사복 허리춤에 매달린 은색 검을 바라봤다.

동방 청에서 친우였던 협객, 검룡(劍龍) 운학이 가문의 보물이라며 선물로 주었던 비천검(飛天劍).

‘그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고민할 것도 없고. 술도 실컷 마시고.’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참 행복했던 시절이다.

지금이라도 비단길을 타고 달려가고 싶을 만큼.

‘그녀와 같이 가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미하일은 문득 한 명의 인물을 떠올렸다.

자신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밀이라 부르던 소녀.

황태자비로 내정된 주제에 의사가 되겠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며, 그러면서 숱한 일들을 해낸 소녀.

엘리제 드 클로랜스.

그녀가 문득 떠올랐다.

‘황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같이 여행이나 가자고 해볼까. 그녀는 의술 여행하고, 나는 호위무사 하고.’

미하일은 쿡쿡 웃었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런 정권 다툼보다는 한 천 배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은 황제가 되어야 하니까.

“다녀올게요. 잘 지내고 계세요.”

그는 뒤를 돌아 유리궁에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그렇게 3황자 검제(劍帝) 미하일 드 로마노프는 자신만의 출정식을 마쳤다.

***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브리티아 섬 건너, 서대륙 본토 동쪽에 위치한 크림반도였다.

콰앙! 콰앙!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의 인근 평야에서 대규모 회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포가 수없이 불을 뿜었고, 파란 복식의 공화국군이 제국군에 총검을 들고 돌진했다.

“끄아악!”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자유와 평등.

공화국의 기치를 외치며 달려드는 공화국군에 제국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평원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고, 그 피는 대부분 브리티아 제국군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지옥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얕은 산의 중턱에서였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흐음, 역시 신문은 브리티아 제국 것이 재미있다니까. 아버지가 언론을 너무 죽여 놔서 공화국 언론사들은 영. 그런데 제국은 이렇게 언론을 풀어놔도 괜찮나?”

마치 그림처럼 잘생긴,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 남자가 여유롭게 신문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지옥도 옆에서 신문이라니?

하지만 남자의 정체를 알면, 이 기행을 납득할 수 있었다.

사막의 전갈.

남자는 다름 아닌, 검은 대륙의 서북부를 평정한 프랑소엔 공화국 최고의 명장 루이 니콜라스였던 것이다!

이 피로 얼룩진 지옥도를 연출한 것도 바로 그였다.

심페폴을 수비하고 있던 제국군을 교란 작전으로 흔든 뒤, 혼란을 틈타 총공격을 했고,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남자는 다 이긴 전투에 흥미를 잃고, 브리티아 제국의 신문을 읽는 데 열중했다.

“흠?”

그런데 신문의 토픽란에 그의 흥미를 강하게 끄는 기사가 있었다.

“황태자비가 될 여인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고?”

토픽란에는 흑백 사진으로 출정식에서 연설하는 예비 황태자비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제복을 입은 탓일까? 기품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에 루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참으로 아름다운 소녀였지.”

그는 이 소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제국의 탄신연회 때. 사절로 갔다가 춤을 신청했고,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아니, 그것 아니어도 그는 이 소녀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몽셀 왕국을 이용해 제국군의 뒤를 치려던 내 계획을 간파한 게 바로 이 소녀였으니까.”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현명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소녀.

“좋군. 아주 좋아.”

그런데 그때였다.

공화국 장교가 그에게 다가 와 전투 경과를 보고했다.

“각하, 대승입니다. 제국군 추정 사망자 7,000명으로 적군은 북쪽으로 후퇴 중입니다. 이로써 반도 이남은 우리 공화국의 세력권으로 넘어왔습니다.”

“추적해.”

“네?”

“추적해서 최대한 많이 죽이라고.”

“네, 알겠습니다! 충성!”

간단히 명령한 루이는 다시 신문으로, 엘리제의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참으로 아름답단 말이야.”

그는 홀린 듯 말했다.

“가지고 싶을 만큼.”

그러고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곧 제국의 황태자, 공제(空帝)가 이끄는 제국의 2차 원정군이 도착하리라. 이 소녀가 포함된.

“잘됐군.”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제국군을 격파하다 보면 이 소녀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지면 되겠지. 승전의 전리품으로 말이야.”

이 아름다운 소녀를 전리품으로 갖는다라.

저 인형처럼 예쁘고 기품 있는 소녀가 눈물지으면 얼마나 고혹적일까.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공제와의 싸움도 그렇고. 참 재밌는 전쟁이 되겠군.”

그렇게 엘리제, 린덴, 미하일. 루이. 그 밖의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생각과 이유를 가지고 크림반도에 모여들었다.

2차 크림전쟁의 시작이었다.

***

15만의 장병을 태운 브리티아 제국의 함대가 북해를 지나 발토해를 가르고 있었다.

수많은 증기선이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런 규모의 함대는 제국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로열 네이비(Royal Navy)라 불리는 제국의 함대는 세계 최강의 해군 전력이었으니까.

공화국도 해군력만큼은 제국에 한참 못 미쳤다.

서대륙 나머지 열강들이 모두 모여야 비슷한 수준. 그만큼 제국의 해군력은 압도적이었다.

“이런 배 타본 적 있어, 리제? 대단하지?”

3황자 미하일이 친근하게 엘리제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백원의 궁, 혈탑(血塔)에서 만남 후 종종 미하일이 그녀를 찾아가서, 둘은 이제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없어요. 확실히 크네요.”

황태자를 비롯한 그녀와 3황자는 기함인 퀸 엘리자베스호에 탑승해 있었다.

제국 해양 기술력의 결정체인 엘리자베스호는 무척 거대하고 위엄이 넘쳤다.

“리제는 론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지? 이제 멀미는 괜찮아?”

“바람이 잠잠해 지금은 약간 나아요.”

엘리제는 약간 하얀 안색으로 말했다.

배를 처음 타는지라 멀미로 엄청 고생했다.

“이제 곧 로마노프령(領)의 상트부르항에 도착할 거야. 상트부르가 어디인지는 알지?”

“네, 당연히 알죠.”

로마노프령은 로마노프 황가의 개인 영지를 뜻하는 말이다.

제국의 땅이면 그냥 제국이지, 왜 이런 명칭이 붙었느냐면, 로마노프 황가가 원래는 이곳 서대륙 북단의 상트부르 근처를 지배하는 대공가(大公家)였기 때문이다.

멀리 왕족의 피가 섞였을 뿐, 사실 브리티아 섬과는 상관이 없던 가문.

그런데 그 로마노프 가문이 브리티아 섬의 왕가가 된 것은 다소 황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내전으로 왕위 계승자가 모조리 죽어버린 탓이었지.’

약 350년 전, 당시는 왕국이었던 브리티아에 큰 내전이 일어났다.

왕위를 놓고 왕실과 귀족이 두 패로 나뉘어 일으킨 그 싸움은 무려 30년을 끌었고, 왕가의 피가 섞인 사람의 씨를 말려 버렸다.

당시 힘없는 왕족들은 죽지 않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살았을 정도.

그렇게 광란의 내전 후, 정신을 차린 귀족들이 새로운 왕을 모시려고 봤더니 섬 안에는 남아 있는 왕족이 없었다.

‘그래서 무려 왕위 계승 서열 58위였던 로마노프 대공이 왕으로 취임했고.’

반대도 많았지만, 딱히 마땅한 사람이 없어 로마노프 대공은 얼떨결에 대공 겸 브리티아 왕으로 취임했다.

로마노프 왕조(王朝)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반전은 로마노프 가문의 통치력이었지.’

섬기기 위해 지배한다.

지배자의 권위는 신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부터.

이런 파격적인 기치를 가지고 있는 로마노프 가문은 대(代)마다 거듭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래서 100년도 안 돼 브리티아 섬을 통일해 왕국은 제국이 되었고, 번영을 거듭하더니 작금에 이르러서는 세계를 아우르는 최강의 열강이 되었다.

“로마노프령에 도착해서는 육로로 이동할 것이니 각오해야 해. 말은 탈 줄 알지?”

“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 전 렌 오라버니에게 혼나며 배워 이제 어지간하게 탈 줄 안다.

그런데 미하일이 짓궂게 말했다.

“만약 말 타는 게 힘들면, 내 말에 태워줄게. 이래 봬도 서대륙 최강의 기사라고. 승마감은 걱정하지 마. 내 허리만 잘 잡고 있어.”

“뭐예요. 사양할게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인데? 진심이야.”

“됐어요. 전하의 허리를 잡고 말을 탔다가, 론도에서 전하를 기다리는 영애들의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그 말에 미하일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고,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친구로 지냈던 지난 삶의 기억 때문일까? 이번 삶에선 많은 만남을 가지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편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 그런 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황태자 린덴이었다.

‘둘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고 있는 거야?’

2층의 함장실에서 갑판의 엘리제와 미하일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 거지, 저 소녀는?’

미하일과 이야기할 때마다 뭐가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짓는 엘리제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에게는 미소는커녕 그렇게 싫은 티나 내면서!

‘옷은 또 왜 저렇게 입은 거야? 젠장.’

엘리제가 입고 있는 옷은 제국군의 제복이었다.

군사 제복이다 보니 그녀의 백금발과 인형 같은 하얀 얼굴에 어우러져 고결한 기품이 흘렀다.

그런데 붉은 제복이 몸에 딱 달라붙어서일까? 이상하게도 묘하게 고혹적인 느낌이 함께 들었다.

린덴은 다른 놈들이 그녀를 쳐다볼 때마다 열불이 솟구쳐 참을 수가 없었다.

‘육지에 도착하면 바로 전서구를 보내 여성용 제복을 새로 디자인하라고 해야겠어. 최대한 펑퍼짐하고 못나게. 색깔은 화려한 적색이 아닌, 누리끼리한 황토색 정도가 적당하겠군.’

그렇게 세계 최초의 여군 전용 제복이 결정되었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하루에도 몇 번을 하는지 모를 생각을 중얼거리며 린덴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하지?’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엘리제를 대하는 것이었다.

린덴은 출정 전 결심한 것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녀를 지키는 것. 자신은 이 전쟁에서 그녀를 지킬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리고 두 번째는 그녀의 마음을 가지는 것. 아무리 아프고, 상처 입어도 그는 그녀의 마음을 가지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연애는커녕 여자를 불필요한 장식쯤으로 여겼던 그가 여자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알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고민해 봤으나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조언이라도 구해볼까, 고개를 돌렸으나 옆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을 능가하는 벽창호인 렌 남작.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아니다.”

도움이 안 됐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항해 끝에 함대는 로마노프령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크림반도로 진격해 전선에 도착했다.

그런데 전선에 도착한 린덴의 얼굴이 굳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수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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