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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63화 (63/194)

00063  3-2 Lady with the Lamp  =========================================================================

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었다.

1차 원정대였던, 2군단은 반쯤 궤멸하여 있었고, 로마노프령에서 미리 출발한 본토 소속 15만의 지원군은 크림반도 북단까지 몰려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모두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 때문이었다.

***

총사령관인 린덴은 먼저 병력을 추렸다.

제국의 병력은 브리티아에서 지원 온 15만과 로마노프령에서 지원 온 15만. 그리고 궤멸된 2군단의 패잔병을 합쳐 대략 32만이었다.

“수적으로 열세군.”

“네, 적들은 약 40만이 넘으니까요.”

백전노장 맥가일 원수가 답했다.

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으로 군부의 원수까지 오른 그는 제국군의 전설과도 같은 노장이었다.

“몽셀군 2만, 크림군 1만에 무어군 7만, 스위센 용병 3만, 그리고 공화국군 30만이 맞나?”

“네.”

10만이 넘는 병력 차이.

하지만 린덴은 이렇게 말했다.

“해볼 만하겠군.”

맥가일 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는 대(大)브리티아 제국군이니까요.”

그들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브리티아 제국군은 세계 최강의 군대.

크림군, 무어군, 스위센 용병 따위 적수가 아니었다.

문제는 공화국군과 기만술의 달인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였다.

“사막의 전갈이 거슬리는군요. 어떻게 계책이 들어올지 모르니.”

맥가일은 하얀 눈썹을 찌푸렸다.

황태자 린덴은 짧게 답했다.

“교활한 계책을 상대하는 법은 간단하다. 정공법으로 간다.”

“정공법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그는 검은 대륙에서 앙젤리의 패권을 두고 사막의 전갈과 전쟁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자신의 미세한 판정승. 공화국과 제국은 화평 조약을 맺고, 앙젤리를 중립국으로 두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라 볼 수는 없지.’

당시 제국의 피해는 막심했다.

1황자인 지펠이 사망했고, 수많은 병사가 죽었다. 모두 루이 니콜라스의 계책에 휘말린 탓이었다.

그때 깨달은 것.

“계책을 따라가려다 기만술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그저 정공법으로 나간다. 우리는 대(大)제국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邪)에는 정(正)으로.

그게 그가 사막의 전갈에게 내놓은 답이었다.

그렇게 린덴은 전선을 정비했다.

여러 요충지를 기반으로 서와 동으로 부대를 나누었고, 맥가일 원수와 또 다른 장군, 라이트 후작에게 각 부대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중앙의 사령부에서 중앙군을 이끌며 양 부대를 지휘 및 지원하였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기울던 제국군과 공화국군의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리고 그때 엘리제는 종군 의사로서 야전 후방 병원에 배치되었다.

야전 후방 병원은 황태자가 자리한 사령부 지척에 위치해 있었다.

“이쪽입니다, 데임. 발걸음을 조심하십시오.”

“네, 감사해요. 얼마나 남았죠?”

“거의 다 왔습니다.”

명을 받은 병사가 그녀를 안내해 주었다.

병사는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여인이자, 론도를 구한 의술의 성녀 엘리제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다.

마음만 고운 게 아니라 얼굴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분이 우리 제국의 황태자비.’

병사의 마음에 사기가 올라갔다. 저런 퍼스트레이디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더 걸은 후, 병사가 말했다.

“다 왔습니다.”

그 말에 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

“……다 왔다고요?”

“네, 데임. 이곳입니다.”

엘리제는 병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분명 건물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저곳은…….

“저곳이…… 병원이라고요?”

“네, 저곳이 사령부 휘하 후방 야전병원입니다.”

다 쓰러져 가는 회색의 건물.

사람이 머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더러운 저 건물이 야전병원이라고?

‘말도 안 돼.’

엘리제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길 바라며 다시 한 번 바라봤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폐가보다도 못한, 다 쓰러져 가는 저 건물이 대(大)제국군의 생명을 책임지는 야전병원이었다.

***

“으아아!”

“죽고 싶지 않아……!”

“아아……!”

내키지 않은 마음을 삼키고 건물에 들어가 보니, 곳곳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맙소사.’

엘리제는 비명을 삼켰다.

부상병들의 상처가 끔찍해서가 아니었다.

총탄과 화약에 짓이겨진 상처는 차마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긴 했지만, 그녀는 지구에서 외과의사를 하면서 웬만큼 끔찍한 상처에는 면역되어 있었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누워 있는 환경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마치 더러운 공중화장실을 연상시키는 비위생적인 방에 수십 명의 부상자가 한데 뭉쳐 있었다.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닌, 물건을 쑤셔 넣듯, ‘말 그대로’ 뭉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에 대충 붕대 정도만 감긴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테레사 병원의 빈민 병실도, 아니, 론도의 슬럼가도 이렇진 않다.

지상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란 생각이 들 정도.

‘이런 상황이면 오히려 병이 생길 거야. 살 사람도 모조리 전염병에 걸려 죽겠어.’

엘리제는 치를 떨었다.

사실 그녀가 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뭇 사람들의 오해와 다르게 큰 뜻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그저 작은오라버니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마음을 차갑게 식게 하였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한 명의 의사로서, 이들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이건 그냥 부상병들을 방치해 둔 거나 마찬가지야. 죽든지, 알아서 살아나든지. 아니, 방치보다 더 나빠. 밖에 버려두면 전염병은 안 옮겠지만, 이건 부상병들끼리 서로 병이 옮아 다 죽을 상황이잖아!’

사실 당시 군대 야전병원의 이런 참상은 브리티아 제국뿐 아니라, 서대륙 어느 열강이나 마찬가지였다.

군대가 병사들 개개인의 부상을 회복시키는 데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구에서도 군 병원이 실제로 의료시설다워진 것은 근현대에 가까워서였다. 그전에는 이곳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한 명, 두 명을 치료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기본적인 시스템을 개선해야 해.’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분히 누군가를 치료할 환경도 아니고, 이런 환경에선 그녀가 한 명을 살릴 때 100명이 죽어갈 것이다.

‘책임자를 만나자.’

***

야전병원의 책임자는 엘리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을 뿐이니까.

사실 지금 군에서 그녀의 위치는 조금 모호했다.

원정군으로 참전했으니, 민간인은 아닌데 군인으로서 정확한 계급과 위치가 없었다.

그저 뛰어난 의사이자, 황태자비로 내정된 여인으로 대우받을 뿐.

뭔가를 요구할 제대로 된 권한과 직위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 황태자비 후보란 이름 덕에 곧바로 책임자를 만날 수 있긴 했었다.

“존귀한 데임 클로랜스를 뵙습니다. 야전병원의 책임자인 헤인츠 대위라고 합니다.”

약간은 과장된 인사.

헤인츠 대위는 배가 나온 30대 후반의 남자였는데, 살집에 묻힌 눈이 게으른 인상을 주었다.

한편 그와 인사를 나눈 엘리제는 속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게서 이상한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이건 알코올 냄새인데? 설마?’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국군 대위가 전장에서, 그것도 대낮에 술을 마실 리가 없지 않은가?

“병사들을 위해 참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곳이 야전병원이니 환자들을 돌보시면 됩니다. 많은 병사를 살려주시기를 부탁합니다.”

헤인츠는 말했다.

예의 바르긴 하지만, 관심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저랑 상관없이 당신이 알아서 치료하면 됩니다란 느낌?

실제로 그는 그녀가 부상병들을 돌보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는 배배 꼬인 마음으로 생각했다.

헤인츠 대위는 원래 병원의 책임자가 아니었다.

원래 직위는 포병대의 중대장.

하지만 몇 번이나 거듭된 실책으로 좌천을 거듭해 한직 중의 한직인 이곳까지 쫓겨 온 것이다.

곧 강제 전역당할 것이 분명한 상태로, 그는 자신의 유배지인 이곳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든 큰 관심이 없었다.

“헤인츠 대위님.”

“네, 데임.”

“이곳 환자들을 위해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엘리제는 귀찮은 그의 안색을 보고, 이야기가 안 풀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일단 말했다.

“병사들의 치료를 위해 환경 개선이 시급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제는 자신이 느낀 점과 의사로서 시급히 개선해야 할 점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환경이 그런 걸요.”

“……!”

“론도에서만 자란 고귀한 데임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원래 전쟁이란 것이 다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그 관심 없는 반응에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밑에서 환자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책임자는 관심도 없다니.

“전장의 환경이 열악한 것은 저도 압니다. 그래도…… 그런 상황 속에서라도 부상병들이 가능한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아닐까요?”

그래도 엘리제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요. 하지만 그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저는 그냥 이 병원을 관리하라는 명만 받았거든요. 정 데임께서 환경 개선을 하고 싶으시면 다른 계통에 건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게으른 공무원과 군인의 특기인 책임 돌리기였다.

결국,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상의하려면 어느 쪽으로 찾아가야 할까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병원에 물품을 보급하는 사령부의 보급처에 한 번 문의해 보십시오.”

그 말을 듣고, 엘리제는 등을 돌렸다.

저치와 더 이야기해 봤자, 얻을 게 없을 것 같다.

“조심히 가십시오.”

엘리제는 곧바로 병원을 빠져나와 사령부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헤인츠 대위는 비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사령부도 이곳 야전병원 따위 큰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자신같이 끝난 군인을 처박아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야전병원은, 정확히 말하면 군 의료는 사령부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끝난 군 생활. 이 할 일 없는 곳에서 적당히 있다가 적당히 전역하면 되지.’

헤인츠 대위는 그렇게 생각했다.

***

엘리제는 사령부로 향했다.

다행히 야전병원과 린덴이 있는 사령부는 지척이어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데임 클로랜스?”

엘리제를 알아본 한 장교가 말했다.

그녀는 사정을 설명하고, 병원의 보급 계통 책임자와 면담을 요청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도 그녀의 신분 때문일까.

금방 담당자와 면담할 수 있었다.

“충성! 황태자비를 뵙습니다!”

경례하는 존 소령은 야전병원을 비롯한 중앙군에 보급을 담당하는 영관급 장교였다.

보급 업무의 핵심을 맡고 있어서인지, 좌천을 거듭한 낙오자 헤인츠 대위와는 예의와 기강이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직 황태자비가 아니니, 그렇게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편하게 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앉으십시오. 커피 드십니까?”

“네.”

존 소령은 그녀에게 차를 대접했다.

“전장이라 질 나쁜 커피밖에 없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야전병원 문제로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헤인츠보다 훨씬 호의적인 태도에 엘리제는 희망을 품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해 주십시오.”

“부상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환경 개선이 필요합니다. 의약품의 보급도 원활하지 않고요.”

엘리제는 헤인츠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음…….”

존 소령은 턱을 쓰다듬었다.

<바로 다음 편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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