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64화 (64/194)

00064  3-2 Lady with the Lamp  =========================================================================

[3-2장 : Lady with the Lamp (2)]

뭔가 곤란한 표정.

“그런가요.”

그러며 조심히 입을 여는데, 목소리는 예의는 발랐지만 골자는 헤인츠 대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데임.”

“네?”

“정말 죄송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이곳은 군대입니다. 병사들이 열악한 치료를 받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건 전장이니 당연한 것입니다.”

존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데임께서 론도에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 명의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이해합니다. 병사들을 책임지는 지휘관으로서 그런 마음에 감사하고요.”

“……!”

“하지만 이곳은 전장입니다. 부상을 당하고, 총탄에 죽는 것이 당연한 곳이지요. 전장이라서 부족한 치료는 병사들 개개인이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엘리제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존 소령의 말은 이 시대 군 지휘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병사들이 열악한 치료를 받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여겼다.

이 최악의 환경을 조금만 개선해도 사망자가 획기적으로 줄 수 있다는 발상은 하지도 못했다.

“론도에서처럼 최고의 치료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엘리제는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의 환경 개선이면 돼요. 큰 지원이나 자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조금의 도움만 있으면, 지금처럼 최악의 사망률을 훨씬 떨어뜨릴 수 있어요.”

하지만 존 소령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데임의 말씀이시니 고려해 보겠습니다.”

“고려해 보시겠다는 말은?”

“기회를 봐서 윗선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존 소령은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중앙군에 탄약과 포탄 보급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요.”

그렇게 엘리제는 밖으로 나왔다.

사령부까지 왔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윗선과 상의한다고? 도대체 언제?’

자신이 한 부탁이니 언젠가 상의를 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태도를 볼 때 적극적으로 건의할 것 같긴 않다.

만약 이야기가 잘 풀린다 해도, 지원이 올 때까지는 또 얼마나 오래 걸릴까?

지금 이 순간도 부상병들은 끔찍한 환경 속에서 부상이 악화하고 있는데.

‘너무 만만히 생각했어. 단순히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엘리제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자만했다.

현대 지구의 의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장의 환자들을 숱하게 살려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마치 론도에서 해냈던 것처럼.

하지만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지금 이 전장에서 필요한 것은 기적적인 의술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력. 힘이 필요해.’

이 끔찍한 병원 환경을 개선하고 미개한 군 의료를 개선할 정치력. 그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는 고민했다.

자신은 일개 원정군에 불과했다. 뛰어난 의사이긴 했지만, 제대로 된 직위도 없었다.

따라서 그저 이렇게 메아리 없는 건의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물론 황태자비. 퍼스트레이디가 될 여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존경의 사유이지, 권한을 가진 직위가 아니었다. 명예로운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란 것도 마찬가지.

‘제국군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의 집단. 아무리 황태자비라 해도 근거 없이 마음대로 권한을 사용할 수는 없어.’

황태자비. 아니, 황후, 황자가 오더라도 적합한 절차와 근거에 따른 명이 아니면 저들은 꿈쩍도 안 할 것이다.

‘어떻게 하지?’

순간 무력한 마음이 들었으나,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자. 해내야 해, 엘리제. 그래야 부상병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어.’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엘리제? 사령부엔 무슨 일이지?”

“……!”

깜짝 놀라 돌아보니 차가운 조각 같은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예는 됐다. 무슨 일로 사령부에 왔지? 야전병원으로 배치된 것 아니었나? 용무가 있나?”

엘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 말씀드리면?’

황태자는 원정군의 총사령관이다.

다른 사람을 통할 것 없이 황태자만 설득하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녀는 고민했다.

‘전하께 이야기해볼까?’

물론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것이 꺼려지긴 한다. 개인적인 부탁을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민체스터 황제에 의해 강제로 결혼이 예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뿐이다.

약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황태자와 그녀는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밑져야 본전인데,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그녀가 주저할 때였다.

황태자가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용무로 온 거지? 혹시 용무가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도 된다.”

“그게...”

그녀가 주저하자 황태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괜찮으니 이야기해라. 빨리.”

결국, 그녀는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야전병원에서…….”

병원의 환경이 열악해, 개선이 필요할 것 같다. 지원 요청을 하러 왔다.

“그래서? 지원은 받기로 했나?”

“아니요. 존 소령께서 윗선과 상의를 해본다고는 하셨는데, 확답은 안 주셨습니다.”

엘리제는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의외의 말을 하였다.

“잘됐군.”

“네?”

“그 윗선의 꼭대기가 바로 나야. 그러니 나한테 이야기해라.”

“……!”

“따라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

황태자의 방은 사령부 건물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전장임에도 그의 방은 평소 성격처럼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면은 이전 삶과 똑같으시네.’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녀는 방을 깨끗이 정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지구에서도 그녀의 기숙사 방은 이리저리 어지럽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글씨도 이전 삶처럼 똑바르시고.’

자신이 워낙 악필인지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액자로 보관해 후세에 물려줘도 좋을 만큼 명필이었다.

“앉지.”

하지만 이전 삶과 똑같은 건 그것 두 개였다.

최근 그는 기이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자, 한 잔 들어.”

“……!”

지금 그는 그녀에게 차를 달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직접! 저 황태자가!

“괘, 괜찮습니다. 어찌 제가.”

엘리제는 화들짝 놀라 사양했다.

“왜? 싫은가?”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황송하여.”

“싫지 않으면 마셔.”

엘리제는 어색한 마음으로 차를 마셨다.

그가 직접 내려준 차를 마시다니. 엄청 불편했다.

그리고 불편한 것뿐 아니라 맛도 없었다.

“…….”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린덴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맥가일 원수. 이야기가 다르잖아?’

평민에서 군부의 원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위인, 맥가일.

총사령관인 린덴과 부총사령관인 맥가일은 자연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린덴은 우연히 맥가일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껄껄! 전하! 저만 믿으십시오! 제가 이래 봬도 왕년에 론도에서 알아주는 쾌남이었습니다!’

황태자의 생각지도 못한 고민에 맥가일이 호언장담했다.

연애하면 자신이 박사라고! 자신만 믿으라고!

왠지 별로 믿음이 안 갔지만, 그래도 린덴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자는 부드러움에 약합니다. 전하께서 데임께 부드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데임은 사르르 녹아내릴 것입니다.’

그 말에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드러움.

젠장, 그가 제일 자신 없는 거였다. 그런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말로 하시기 어려우시면,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어떻게?’

‘둘이 단둘이 있을 때 차를 달여 주신다거나 하는 겁니다. 분명 감동할 것입니다!’

그러며 맥가일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러다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아져서 크림에서 공주님이라도 태어나는 것 아니냐고.

‘좋기는. 무슨. 개뿔.’

차를 마신 엘리제는 전혀 감동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냥 불편해 보였다.

그가 끓인 차가 너무 맛없어서였지만 그는 몰랐다.

황태자는 입맛을 쓰게 다시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 자세히 이야기해 보지. 야전병원의 환경을 개선해야겠다고?”

“네, 현재 상태에선 부상병들의 치료가 제대로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치료는커녕 환경이 너무 안 좋아 없던 병도 생길 지경입니다.”

“환경을 개선하면? 개선하면 우리 제국군이 어떤 이득을 기대할 수 있지?”

황태자는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그 이득을 위해 제국군이 투자해야 하는 자원은? 만약 비율이 맞지 않는다면 지원해 줄 수 없어.”

사실 그는 엘리제가 요청하는 거는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설사 다이아몬드 광산을 통째로 달라는 것일지라도. 그냥 이유 없이 다 들어주고 싶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빠져 있으니까. 여자 때문에 나라를 망친 얼간이 폭군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 지경.

하지만 그는 이 제국군의 통수권자다.

아무리 엘리제, 그녀의 부탁이라도 정확한 기준을 통해 판단을 내려야 했다.

“…….”

한편 엘리제는 그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지원이 결정되리라.

짧은 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현대 의학 지식에서 산출된 결론이 도출되었다.

“기대할 수 있는 이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상자의 사망률을 지금보다.”

그녀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10배 낮출 수 있습니다.”

“……!”

어지간한 린덴도 그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배? 확실한가?”

“네.”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축소한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군 병원의 환경을 개혁 후 부상병 사망률이 42%에서 2%로 20배나 떨어졌으니까.’

부상병 사망률 42%는 현재 크림반도의 야전병원 사망률과 정확히 일치했다.

‘정말이군.’

린덴은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하긴 저 소녀는 엘리제다. 론도를 죽음에서 구해낸. 거짓말 따위를 할 리가 없다. 진실일 것이다.

“제국군이 투자해야 하는 자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수처리를 비롯한 쾌적한 환경. 그리고 본국으로부터 원활한 의약품의 보급. 필요한 인력의 지원입니다.”

큰 것들은 아니다. 모두 어렵지 않은 것들.

아니, 다른 걸 떠나 사망률을 2배도 아닌 10배나 낮출 수 있다지 않은가?

아무리 큰 비용이 들어도 할 만한 투자이다.

‘당장 시행해야겠군.’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바로 승낙하는 것보단 그게 낫겠군.’

자신에게 떠오른 생각에 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묘책. 그야말로 묘책이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며, 어쩌면 한 가지를 더 이룰 수 있는.

“좋다. 네 이야기는 잘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네 이야기에 흥미가 가서 지원을 해주고 싶어.”

“감사합니다, 전하!”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런 사안은 나 혼자 듣고 독단으로 결정할 수가 없다. 위급하거나, 중대한 사안이면 총사인 내가 결정하겠으나, 그런 것은 아니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

엘리제는 이해했다.

군부에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리라. 확실히 그러면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의 신뢰를 잃을 수도 있고, 자신도 일의 진행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건 엘리제의 오해였다.

2년 전, 앙젤리 전쟁에서 탁월한 공을 세운 린덴의 군 장악력은 고작 이런 걸로 흔들리지 않는다. 엘리제에게는 그냥 거짓말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지.”

“……?”

“이틀 뒤, 사령부 주관 전체 회의가 있다. 그 자리에 참석해서 네 주장을 나에게 설득해 보아라.”

“……!”

“다른 사람 앞에서 내가 듣기에 네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면 네 요청을 들어주겠다.”

“알겠습니다. 깊은 배려에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전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말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웠다.

‘그가 날 배려했기 때문에 가능한 최고의 기회야.’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없었으리라.

아마 그녀 홀로 힘겨운 투쟁을 해야 했을 것이다. 기약도 없이.

그런데 그때 그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말로만?”

“네?”

“말로만 고맙다고 하는 것이냐?”

============================ 작품 후기 ============================

내일 목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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