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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71화 (71/194)

00071  대회전  =========================================================================

3장 대회전-5

“전령의 보고입니다! 적들이 우리 중앙군이 위치한 코프스크 인근까지 접근하였다고 합니다.”

“병력의 수는?”

“30만입니다.”

너무나 어마어마해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숫자였다.

사령부 지휘관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하지만 긴장일 뿐, 두려움은 아니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정말로 데임의 말대로 되었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허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예측을?”

지휘관들은 얼마 전 있었던 작전 회의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시 그녀의 발언을 기꺼워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가 주제넘게 나선다고 불쾌해만 했었지.

하지만 이후 전황은 소녀의 예측에 정확히 맞아떨어져 갔다.

‘만약 예비 황태자비의 말에 따르지 않았더라면.’

모두의 가슴에 서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동, 서 양쪽으로 지원군을 보낸 중앙군은 단 5만의 병력으로 30만을 맞아야 했을 것이다.

5만 대 30만.

결과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중앙군이 무너지면 동, 서에 고립된 동군, 서군의 운명도 풍전등화였을 터.

‘데임께서 이 제국군을 구하였구나.’

어린 소녀가 한 일은 단순히 적의 움직임을 예측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제국군을 궤멸의 위기에서 구원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측 덕에 반격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개전이 코앞에 다가온 그 순간 린덴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곧 크림반도의 운명을 가를지도 모를 대전(大戰)이 시작된다. 제국군을 이끄는 통수권자로서 부담감이 없다면 거짓말일 터.

‘준비는 완벽하지만.’

그는 자신이 마련한 여러 계획을 떠올렸다.

그래, 완벽했다.

변수가 없는 한 공화국군은 올가미에 걸려들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몰라.’

동방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

진인사는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하늘에 달려 있다.

‘제발.’

그는 엘리제가 ‘론’인 자신에게 준 징표를 어루만졌다.

진주로 장식된 낡은 십자가가 손끝에 느껴졌다.

‘엘리제, 너도 반드시 무사해야 한다.’

이번 코프스크 회전은 그녀가 있는 야전병원도 사정권에 든다. 혹시나 몰라 야전병원 쪽으로 두터운 방비를 해두었지만, 계속 걱정이 들었다.

‘엘리제, 네가 손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나는 미쳐 버릴 거야.’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그녀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그때, 한 참모가 그에게 말했다.

“전하, 모두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과 불안 따위는 마음속에 묻으며 그는 철혈의 지휘관의 가면을 썼다.

“오늘을 위해 모두 수고 많았다.”

총사령관 린덴이 장내에 모여 있는 지휘부에게 입을 열었다.

“다들 들었겠지만, 적이 이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적의 수는 무려 30만. 우리 중앙군 15만에 비해 2배나 많다.”

하지만 황태자는 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렵나?”

“아닙니다!”

“그래, 개미 떼 따위 아무리 수가 많아도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 우리가 누군가?”

“대(大)제국군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대제국군이다. 세계를 호령하는.”

그렇다.

제국군. 그것은 적에게는 공포를, 아군에게는 무한한 자부심을 주는 단어였다.

“우리 제국군이 무서워할 적은 없다. 하물며 함정에 들어오고 있는 개미 떼 따위야.”

린덴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장들(My lads).”

그는 차갑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는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모두 풍성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오늘 저녁은 사막의 전갈의 목을 보며 축배를 들자. 알겠나?”

지휘관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네, 전하(Yes, My Lord)!”

그렇게 코프스크 회전이 막을 올렸다.

***

콰앙! 콰앙!

대포 소리와 수류탄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전투 지점과 거리가 제법 있는 야전병원이었지만, 옆에서 터지듯 굉음이 들렸다.

“데, 데임……! 전하께서 승리하시겠죠?”

어린 도제, 제이가 벌벌 떨며 엘리제에게 물었다.

나이만 따지면 어리긴 엘리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제이에게 불안해하지 마라는 듯 차분히 미소를 지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이.”

사실 엘리제도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대비했지만,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몰라.’

완벽한 준비를 했어도, 의외의 결과가 나온 전쟁이 인류사에 얼마나 많았는가?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전쟁은, 그리고 이런 큰 대전의 결과는 하늘에 달려 있었다.

더구나 상대가 루이 니콜라스가 아닌가?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만약 우리 군이 패전하면 곧바로 이곳까지 적들이 밀려들 거야.’

병원의 다른 이들은 괜찮다. 모두 정식 군인도 아니고, 인도주의적 치료를 위해 자원 온 이들이었으니까. 공화국군도 저들을 험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포로로 잡혀 적에게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로마노프 황실의 예비 황태자비였으니까.

‘잡혀가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어쩌면 그냥 눈 먼 총알이나 대포의 파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녀를 못 알아본 병사들에게 궂은일을 당할지도.

어떻게 되든 모두 최악이었다.

‘불안해하고 있어 봤자 바뀌는 것은 없어. 최선을 다했으니 믿자. 그리고 난 내 할 일을 하고 있어야지.’

그녀는 잠시 기원하듯 하늘을 향해 눈을 들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고 있는 야전병원의 의사들과 간호원들에게 말했다.

“여러 선생님들. 지금까지 너무 감사했습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었어요.”

“…….”

“전투가 시작됐으니, 곧 환자가 몰려들 것입니다.”

그리고 소녀는 말했다.

담담하지만 강하게.

저 여리고 작은 몸에서 나왔다고는 생각 못할 의지가 담긴 음성이었다.

“큰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가 할 일은 이전과 같습니다. 환자를 살립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한 명이라도 많은 환자를 살리는 것.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불안에 잠겨 있던 의료진들의 눈에 각오가 깃들었다.

작고, 여린 소녀는 그들에게 선언했다.

“전투와 상관없이 우린 우리의 일을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리고 엘리제는 자신들의 전쟁을 시작했다.

***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제국군을 무찔러라!”

“크악!”

회전은 처음엔 공화국군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5만의 병력밖에 없는 제국군의 본진은 공화국군의 총공격에 속절없이 밀렸다.

그런데 그렇게 수없이 많은 피가 평원을 적실 때, 이변이 일어났다.

동, 서로 떠난 줄 알았던 지원군들이 공화국군 양 허리에 나타나 강력한 공격을 펼친 것이다. 양옆에서 그들을 에워싼 제국군은 각각 5만 명으로 무려 10만의 대군이었다.

“크악!”

“으악!”

정면에는 제국군의 본진. 그리고 양옆에는 10만의 대군.

그 삼면에서 벌어지는 합공에 공화국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몰아붙여라!”

“폐하를 위하여!”

그제야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말도 안 돼!’

여자처럼 고운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의 계책이 완전히 간파당하다니?!

간파당한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 완벽하게 파악당한 것이다.

“모두 전열을 정비해라! 흔들리지 마라!”

급하게 명했으나, 공화국군의 전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병력의 수는 공화국군이 훨씬 많았으나, 허를 찔린 대가는 컸다. 삼면에서 이루어지는 합공에 전열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3황자, 검제 미하일이 이끄는 검기사단도 이들의 붕괴를 가속시켰다.

혼란에 빠진 적 진영을 마치 사자가 토끼 떼 사이에 뛰어든 것처럼 휘저었던 것이다.

그 강맹한 모습은, 제국군에게 저들이 아군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공화국군의 전열은 완전히 흐트러졌고, 전장식 소총 간의 전투, 라인 배틀(Line battle)에서 전열이 무너지면 그대로 끝이었다.

공화국군은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붕괴하였다.

“이, 이럴 수가……!”

루이 니콜라스는 고성을 질렀다.

항상 부드럽게 단장된 그의 머릿결은 흙먼지에 헝클어진 지 오래였다.

‘도대체 누가? 어떤 책략가가 이 계책을 알아챈 것이지?’

공제? 의심은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신중한 그의 성격상 이렇게 전격적으로 동, 서군을 버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포위 작전을 감행하기 어려웠을 텐데?

분명 그의 작전을 간파한 책략가가 따로 있을 것이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수모는 절대 잊지 않으마! 누구인지 반드시 확인해 혹독히 갚아주마.’

그는 손을 부르르 떨며 다짐했다.

“일단 후퇴한다! 후퇴해 전열을 정비하라!”

그리고 그 순간.

피슝!

파공음과 함께 그의 그림 같은 이마 옆으로 피가 튀어 올랐다.

“크아악!”

루이 니콜라스는 손으로 이마 옆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각하!”

놀란 병사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한 치만 깊었어도 목숨을 잃었을지 모를 상처였다.

‘빌어먹을! 기다려라. 이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루이 니콜라스는 정체 모를 책략가에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비트란에 머물러 있던 7만의 서군이 린덴의 밀명을 받고, 공화국군의 뒤를 친 것이다.

정면, 양옆, 그리고 후방까지.

그 삼엄한 포위 공격에 공화국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아침에 시작해, 밤이 되고,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던 전투가 막을 내렸다.

“황제 폐하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황태자비 만세!”

제국군은 총검을 하늘로 찌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완벽한 대승이었다.

공화국군은 기존 전선에서 한참이나 뒤로 물러나서야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도 북부에 머물러있던 제국군은 기세를 몰아 중부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장하였다. 반도의 수도인 심페폴을 다시 가시권에 두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전장의 흐름이 다시 제국군을 향해 넘어왔다.

***

회전은 끝났지만, 엘리제의 진정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환자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여기 진통성 마약 주세요! 이쪽으로 와서 거즈로 지혈 좀 해주세요!”

부상병이 너무 많아 의료진만으로는 손이 모자랐다.

몸이 성한 병사들도 합류해 부상병 처치에 손을 보탰다.

‘다행이야. 그래도 피해가 크지 않아.’

생각보다 병력의 피해가 굉장히 적었다.

수십만의 병력이 충돌한 회전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피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워낙 압도적인 전투를 벌인 탓이었다.

덕분에 군 수뇌부에서는 그녀에 대한 찬사가 자자했다.

예비 황태자비가 사막의 전갈의 계략을 정확히 파악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이번 대승에 대한 1등 훈장은 예비 황태자비가 받아야 한다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상이라니.’

엘리제는 환자를 치료하며 쓴웃음 지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상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괴로운 눈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제국군이 압승한 탓에 공화국군은 대패하게 되었다. 병력 손실도 컸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의 조언 때문에 많은 인명이 상하게 된 것이다. 비록 적군이라 할지라도.

‘아니야. 그건 지나친 생각이야.’

전쟁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공화국의 군인들이 다치는 것이 꺼려져 입을 다물었으면, 그때는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을 것이다.

결국 나쁜 건 전쟁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아군이든 적군이든.’

그녀는 씁쓸히 생각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했다.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 방법밖에 없어.’

죽어가는 모든 환자를 살릴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환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

그렇게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고 환자들을 돌봤다.

============================ 작품 후기 ============================

내일 수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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