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2 3-4 위험한 수술 =========================================================================
3장 위험한 수술-1
그리고 5일 정도가 지났다.
회전에 이어진 추격전, 새롭게 형성된 전선에서의 전투. 극심한 혼란이 지나고, 전장이 안정을 찾아갔다.
야전병원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전투가 잦아들며 부상자들의 발생 수가 줄어든 것이다.
물론 평온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상병은 발생했고, 엘리제를 비롯한 의사들은 잠을 못 이루며 환자를 치료했다.
“데임 클로랜스, 이 복합 상처 감염을 살펴주세요.”
“네, 그레이엄 선생님. 아, 아까 말씀하신 저기 탈구 환자는 치료가 끝나서 부대 복귀하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정신없이 환자를 보던 중이었다.
엘리제는 의외의 초대를 받았다.
“승전 연회라고요?”
“네, 데임.”
전령으로 온 초급 장교가 상기된 얼굴로 그녀에게 답했다.
“오늘 밤, 지난 회전의 대승을 기념하여 연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병사들에게도 고기와 약간의 술을 내려 승전을 기념할 거고요.”
전장에서 술과 고기라.
얼핏 이해가 안 갔지만, 사기진작을 위한 일인 것 같았다.
“그렇군요.”
“네, 데임. 그러면 저녁에 뵙겠습니다.”
초급 장교는 당연히 그녀가 참석할 거로 생각하며 말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못 갈 것 같아요.”
“……네?”
“환자가 너무 많아서요. 초대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하, 하지만.”
초급 장교는 당황했다.
이 승전의 가장 큰 공로자는 다름 아닌 엘리제였다.
즉,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연회에 빠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엘리제는 완고했다.
“제가 승전 연회에 가면 이곳에 있는 환자들은 어떻게 하나요?”
“하지만…… 딱 하루에 불과한데…… 황태자 전하께서 꼭 오시라고 당부하셨는데…….”
“지금도 일손이 모자란 상황이에요. 살 수 있는 환자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의사인 제가 빠지면, 그만큼 죽는 사람이 늘 수밖에 없어요.”
물론 그녀도 승전 연회에 가기 싫은 것은 아니다.
아니, 가고 싶었다.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조금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러면 이곳에서 죽어가고 있는 환자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전하께는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그녀는 단호히 연회 참석을 거절했고, 초급 장교는 힘없이 사령부로 돌아갔다.
옆에서 듣던 제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연회에는 참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데임? 전하께서도 직접 부르셨다고 하는데.”
“괜찮아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환자를 위한 일이다.
사적으로는 늘 차갑고, 딱딱한 전하지만, 이런 공적인 면에서는 관대한 분이니 이해해 줄 것이다.
“데임! 여기 수류탄 손상 환자 왔어요! 빨리 와주세요!”
또다시 닥친 환자에 엘리제는 달려갔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승전 연회의 밤이 밝았다.
군 진영 전체가 모닥불로 밝게 타올랐고, 병사들도 모처럼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의미를 남긴 밤이 시작되었다.
***
“God save the King!”
군영 여기저기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투와 추위에 지친 병사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간만에 고기와 술을 마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황제 폐하 만세! 브리티아 제국 만세!”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병사들은 어깨동무하며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거기에 꼭 빠지지 않는 이름.
“황태자비 만세! 데임 클로랜스 만세!”
그녀가 전장에 도착한 뒤, 이제 4개월 남짓 되었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모든 병사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자신들과 함께하는 등불을 든 여인으로. 모두의 레이디로.
심지어 술에 취해 이렇게 말하는 병사도 있었다.
그녀에게 치료받았던 젊은 병사였다.
“나, 오늘은 꼭 데임께 고백할 거야!”
“이 미친놈아, 황태자비가 될 분한테 무슨 고백이야?!”
“몰라! 나 데임한테 반했단 말이야! 말리지 마!”
“야, 저놈 잡아! 저러다 사형당해!”
그렇게 전장에 흥겨운 밤이 깊어갔다.
한편, 사령부 승전 연회장에서는.
“엘리제가 안 온다고?”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초급 장교는 쩔쩔매며 말했다.
“네, 환자를 돌봐야 해서 갈 수 없다고, 전하께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장군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쉽군요. 이번 승전의 1등 공신이 참석하지 않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데임이 아니었으면, 이런 승리도 없었을 터인데.”
모두 당시 작전 회의를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중앙군은 궤멸당하고 동, 서 양군도 전장에 고립되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어리석은 의견이라 면박 주었었지.’
모두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황태자도 어느 정도 사막의 전갈의 계책을 눈치챘었기 때문에 그런 궤멸적인 피해를 입진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조언이 결정에 큰 도움이 된 것은 확실했다.
왜냐하면 린덴의 경우 짐작만 할 뿐 마음의 확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전하, 예비 황태자비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병사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잠도 거의 주무시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물론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아름다우시지만 몸이 상할까 걱정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날도 쉬지를 않으시니.”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가 늘 하는 걱정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는 엘리제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의 건강을 치료하면서, 도대체 왜 자신의 몸은 챙기지 않는 건가?
‘조금 쉬게 하려고 일부러 불렀건만.’
그도 안다.
그녀가 전장에 온 후, 단 한 번도 제대로 쉰 적 없이 자신의 몸을 혹사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일부러 전령을 보내 불렀다.
오늘 하루라도 편히 쉬도록.
하지만 이런 날까지 환자를 봐야겠다니!
물론 전장의 상황이 급하고, 환자들이 위중한 것은 안다.
그래도 일단 자신의 몸 먼저 챙겨야 할 것 아닌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승전을 축하하며 사령부에서 이런저런 이벤트를 준비했고, 사람들은 흥겹게 박수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나, 린덴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엘리제.’
그녀가 없는 연회 따위.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엘리제가 있는 병원 쪽을 바라봤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
“조금만 더 힘내세요. 금방 좋아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데임. 이런 날 쉬지도 못하시고. 저희를 위해.”
병사가 감동한 눈으로 자신의 상처를 소독하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엘리제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우면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젊은 병사는 화약을 들고 불더미에라도 뛰어들 기세로 말했다.
저 소녀의 부탁이라면! 죽음도 무릅쓸 수 있었다.
“빨리 나으세요.”
“네?”
“정말 고마우면, 빨리 나으세요. 더 다치지 말고,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가족들에게 무사히 돌아가세요. 그게 제 부탁이에요.”
“…….”
그 따뜻한 말에 병사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울컥하며 눈에 물기가 차올라 그는 급히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엘리제는 야전병원 전체를 돌아다니며, 환자를 살폈다.
등불을 든 채 어두운 병실을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말 그대로, ‘등불을 든 여인’이었고, 부상당해 누워 있는 병사들에겐 따뜻한 빛이었다.
‘그래도 새로 부상병들이 안 와서 다행이구나.’
전쟁은 전선이 반도의 수도 심페폴 주위로 교착되면서 잠시 소강상태였다.
그런데 그렇게 병실을 도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데임, 데임.”
어린 소녀 도제, 제이였다.
“네?”
“잠깐만 이쪽으로 와보세요.”
“네? 무슨 일이에요?”
“빨리. 빨리요.”
“……?”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제이는 설명해 주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 제이?”
“빨리요. 늦었어요.”
혹시 안 좋은 환자라도 왔나? 엘리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야전병원에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가진 의사는 당연히 엘리제였다.
그래서 상처가 심각한 환자가 오면 이렇게 급하게 그녀를 찾았다.
‘바로 수술 준비를 해야겠구나.’
그래도 여유가 있어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다행이었다. 환자가 한꺼번에 몰려들 때는 수술 자체를 못할 때도 많으니까.
그런데 제이가 그녀를 이끌고 가는 곳이 이상했다.
부상자가 모이는 야전병원 구호소를 지나쳤던 것이다.
“제이? 환자가 구호소에 있는 것 아닌가요?”
“환자요? 아니에요.”
도대체 뭐지?
제이가 그녀를 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야전병원의 회의실이었다.
‘갑자기 여기에는 왜?’
얼떨떨해하는 그녀를 제이가 뒤에서 밀었다.
“빨리 들어가요.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요.”
“……네?”
그리고 방에 들어간, 엘리제는 왜 제이가 그렇게 자신을 끌고 왔는지 깨달았다.
“와아! 병원장님이시다!”
“빨리 오세요, 데임. 기다리고 있었어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박수를 치며 그녀를 환영했다.
그런 그들 앞에 어디서 구한 건지, 케이크며 디저트, 음료수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건…… 어디서?”
“전하께서 보내주셨어요.”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전하……요?”
“네, 황태자 전하께서 고생이 많다고, 노고를 위로하며 보내주셨어요.”
한 간호원이 감명받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정말 급한 환자가 아니면 이 음식들 먹으면서 쉬라고 친히 명령까지 내리시고요.”
그 간호원은 두 손을 잡으며 몽롱한 표정을 했다.
“저희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걱정돼 그렇게 명령하셨겠죠? 딱딱하신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다정하신 것 같아요.”
그 말에 나이 든 간호원이 피식 웃었다.
“이게 어디 우리를 걱정하셔서 그런 것이겠니? 다 데임을 걱정해서 그렇게 명령하신 거겠지. 그렇죠?”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태자 전하께서 데임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깊으시니까.”
엘리제가 당황해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다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모두를 걱정하시는 마음에 그러셨겠죠.”
“에이, 전령이 보낸 명령에 친히 언급돼 있던 걸요? ‘명령이니 야전병원장 클로랜스 대령도 필히 휴식을 취할 것’이라고.”
“…….”
도대체 그런 명령은 왜 내리셨단 말인가?
엘리제는 다시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려 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된 것, 우리 건배나 해요. 다들 수고가 많은데.”
“네, 좋아요. 데임.”
모두 사령부에서 보내 준 음료를 각자 잔에 담았다.
그리고 카라멜 빛 진저에일을 하늘로 들어 건배하였다.
한 남자 의사가 아쉬운 듯 말했다.
“아, 술이었으면 더 좋을 텐데.”
“가져올까요? 진영에 조금 있던데.”
“됐어. 언제 환자가 올지 모르는데, 술은 무슨.”
제이가 간만에 맛보는 진저에일을 홀짝이며 행복한 표정을 짓더니, 엘리제에게 물었다.
“데임은 술 마실 줄 아세요?”
“네, 좋아해요.”
“네? 좋아한다고요?”
모두 놀라 엘리제를 바라봤다.
생긴 것만 보면 작고 여린 인형처럼 생겨 이슬만 먹을 것 같은 그녀다.
물론 생김새와 실제 내면이 굉장한 괴리가 있는 그녀지만, 그래도 술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엘리제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해요. 저 외과의사잖아요.”
첫 번째 삶을 살 때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석을 더 좋아했지.
하지만 두 번째 삶을 살 때, 밤늦게 수술이 끝난 후 동료들과 한 잔, 두 잔 하다 보니 그 맛을 알게 되었다.
‘해장국집에서 많이 마셨는데.’
잠시 이전 삶이 떠올라 슬쩍 미소를 지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