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73화 (73/194)

00073  3-4 위험한 수술  =========================================================================

4장 위험한 수술-2

첫 번째 삶의 기억을 가지고 ‘엘리제’로 살고 있지만, 그녀의 정체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두 번째 삶, 외과의사 송지현의 것이었다.

“헤에, 그러네요. 론도 로즈데일 병원에서도 수술하시는 교수님들은 모두 술을 좋아하시던데.”

제이가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데임은 어떻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신 거예요?”

그 물음에 사람들이 엘리제를 바라봤다.

모두 궁금해하는 내용이었다.

저 ‘엘리제 드 클로랜스’, 희대의 천재, 론도를 구한 영웅, 등불을 든 여인은 어떻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까?

“그건…….”

엘리제는 진저에일이 든 잔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뭐라고 이야기하지?

사실 그렇게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두 번째 삶에서 의사를 선택한 것은 첫 번째 삶을 속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엘리제로 돌아오고 나서도 의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좋아서요.”

“네?”

“좋아서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뭔가 숭고한 이유를 기대했던 이들은 그 간단한 답에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에이, 데임. 거짓말하지 마세요.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 기도하다가 갑자기 무슨 소명을 느꼈다거나.”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좋아서예요. 너무 좋아서. 그래서 선택했어요.”

그래, 다른 이들의 오해와 다르게 숭고한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녀가 다시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단지 이 일이 좋아서였다.

‘만약 내가 다른 일에 빠졌다면 그 길을 택했겠지.’

만약 그림에 빠졌다면, 화가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음악에 빠졌다면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고.

그녀는 그저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빠졌을 뿐이다. 수술할 때 차가운 메스의 느낌에, 긴장감에, 사람이 살아나는 보람에.

그저 푹 빠졌을 뿐이다.

그러니 숭고하다느니, 성인이라느니 하는 말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저 이 일을 좋아할 뿐이니까.’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행복. 그건 중독이었다. 도저히 이 길을 떠나선 살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의사의 삶을 사는 것도 오래 남지 않았지.’

엘리제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그녀는 작은오라버니를 위해 이 전쟁에 참전하려고, 황태자와의 결혼을 약속했다.

전쟁이 끝나고, 황태자비가 되면 새장에 갇히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턱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런 엘리제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레이엄 남작이었다.

그는 구석에 기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거운 눈동자에 소용돌이치는 것은 짙은 갈망이었으나, 아무도 그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선생님?”

엘리제는 그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쳐다보시지?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데임.”

“네?”

그레이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음성이 하나의 의미를 이루려는 순간이었다.

서늘한 목소리가 장내에 내려앉았다.

“잘 쉬고 있는가?”

“……!”

그 익숙한 목소리에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총사령관인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그래, 모두 앉지.”

생각지도 못한 그의 출현에 모두 엉거주춤했다. 황태자 전하가 이곳에 왜?

엘리제가 그 마음을 대표해 조심히 물었다.

“저…… 전하, 야전병원엔 어인 일이십니까?”

황태자는 말했다.

“그대들이 잘 쉬고 있는지, 살피러 왔다.”

“가,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잘 쉬고 있는지 보러 왔다고? 고작 자신들을? 저 지고한 황태자께서 친히?

그들의 의문 섞인 시선을 피해 황태자가 눈을 돌리며 말했다. 뭔가 궁색한 목소리였다.

“뭐…… 그대들이 늘 고생이 많으니까 말이야.”

여전히 이해 불가능한 설명이었다.

물론 병원의 그들이 고생하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전쟁에서 고생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투 부대원들도 그들 이상으로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왜 오신 거지?’

엘리제는 당황해 그를 바라봤다.

심지어 그는 금방 돌아갈 생각도 없는지, 그녀 바로 옆의 의자에 턱 하니 앉았다.

그러고 그들 사이에 마련된 음식을 보며 물었다.

“음식들은 입에 맞는가?”

질문을 받은 남자 의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네, 네! 전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다행이군.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대들끼리 편히 먹고 마시고 즐기게.”

“…….”

린덴의 친절한 말에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총사령관이자 황태자인 그가 떡하니 옆에 앉아 있는데!

“엘리제.”

“네, 네?”

엘리제는 놀라 답했다.

“너도 편히 쉬어라. 늘 고생이 많은데.”

“아,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그를 보자 최근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웃으니 예쁘지 않으냐. 가끔 내 앞에서도 그렇게 웃도록 하여라.’

그녀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화악 붉어졌다.

그뿐 아니라 생일을 맞아 장미꽃을 받았던 것도 떠올랐다.

그 일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어마어마하게 불편해졌다. 도대체 그의 의중을 모르겠다.

‘오늘은 어떤 이유로 오신 거지? 정말로 우리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다른 이유가 있을 턱은 없지만 그래도 이상했다.

노고를 위로할 것이면 의무대보다는 목숨을 걸고 싸운 전투 부대에 가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더구나 오늘은 중요한 승전 연회 날. 훨씬 중요한 일이 많을 텐데?

어쨌든 그렇게 황태자와 엘리제는 나란히 앉아서 입을 다물었다.

“…….”

한편 사람들은 황태자가 엘리제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알아차렸다.

바보가 아닌 한, 모를 수가 없었다.

“크흠, 저는 이만 환자를 돌보러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선생님! 저도 같이 가요!”

한 명, 두 명 황태자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가? 수고하게.”

“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전하!”

그렇게 사람들은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회의실에서 빠져나갔고, 황태자는 그들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엘리제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환자를 살피러…….”

그러고 그녀는 등을 돌려 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마음이 불편해 빨리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탁!

차가운 감촉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잡았다.

“……!”

황태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나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남아 있어.”

“어, 어째서요?”

엘리제가 당황해 물었다.

그에게 잡힌 손등이 화끈거렸다. 분명 차가운 감촉이거늘 뜨거웠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냐고?’

린덴은 그녀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늘 그렇듯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그녀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을 뿐이다.

조금 더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조금 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왕이면 단둘이.

“그냥.”

“……네?”

“중요한 환자라도 있는 건가? 네가 직접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건…….”

그런 건 아니다. 지금 딱히 급한 환자는 없었다.

“아니면 그냥 있어. 명령이다.”

엘리제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차라리 환자라도 왔으면.’

그녀는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이 불편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이가 없나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아까 전 벅적거리던 게 거짓말인 것마냥 회의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가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어머나! 하며 다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 그사이에 다 어디 간 거야?’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에 유일하게 회의실을 떠나지 않았던 이가 들어왔다.

그레이엄이었다!

그는 아까 전 자세 그대로 벽에 기대 그녀와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불만이 가득 찬 눈으로.

“그대는?”

황태자도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레이엄을 보았다.

“그레이엄 드 팰론 남작이라 합니다, 전하.”

“팰론?”

어디서 본 얼굴인데? 황태자는 미간을 좁혔다.

“네, 전하. 이전 첼트넘 지방을 봉토로 황가를 섬겼었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팰론 남작가가 이전 첼트넘 지방의 영주였든, 아니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단 하나, 저 남자가 어째서 아직도 회의실에 남아 있느냐는 것이었다. 눈치도 없이.

“그대는 돌볼 환자가 없는가?”

눈치껏 빨리 꺼지란 뜻으로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네, 지금 급한 환자는 없습니다.”

그러며 그는 전혀 자리를 비킬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서 있었다. 시선을 그들, 정확히는 엘리제에게 향하며.

‘이놈……? 설마?’

황태자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났다. 저놈을 어디서 봤는지. 테레사병원에서 엘리제의 선생이라 했던가?

‘감히……?’

갑자기 황태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특별히 그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녀를 바라만 본 것이지만 속이 뒤집혔다.

저건 단순히 스승이 제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자신이 그런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보기에 느낄 수 있었다.

‘감히 엘리제를 저런 눈으로 바라봐?!’

그녀를 저렇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린덴은 당장에라도 권총을 꺼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드럽게’ 명했다.

“나가.”

“…….”

“귀가 안 좋은 건가? 지금 내 말 안 들리나? 당장 나가라고.”

그레이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러면 이만.”

그러고 그는 등을 돌려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린덴은 입술을 비틀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딜 감히.’

물론 그가 특별한 감정을 담고 그녀를 바라본 것인지는 정확하진 않다.

하지만 마음만 같아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자신만 보고 싶은 그녀거늘, 저런 눈빛이라니.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닳을까 불쾌감이 들었다.

‘엘리제, 정말 어딘가에 가둬놓고 싶군. 진심으로.’

린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만 그녀를 볼 수 있고, 그녀의 눈도 나에게만 향하고. 그렇게 그녀를 독점할 수 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릿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 아직 마음도 얻지 못했으면서.’

현실을 떠올린 린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직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얻기는커녕 그녀는 자신을 볼 때마다 항상 화들짝 놀라며 거부감을 보인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아무리 거부해도 기필코 그녀의 마음을 얻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싫은 눈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싫어하는 눈빛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아팠다.

“저…… 전하, 손을 그만…….”

“……!”

“조금…… 아파서…….”

엘리제가 떠듬떠듬 말했다.

린덴은 놀라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생각 없이 계속 잡고 있었다.

“미안하다. 많이 아픈가?”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만 그보다 더 이상하게 화끈거렸다.

그렇게 황태자와 엘리제는 단둘이 회의실에 남았다.

엘리제는 그의 바로 옆에 혼자 앉아 있으니 불편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불편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환기하고자 입을 열었다.

“저…… 전하.”

“왜 그러지?”

“……어째서 저보고 남으라 하셨는지요?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할 말? 물론 많았다. 지금 이 순간이라도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감정이 수도 없이 가슴에서 요동쳤다.

============================ 작품 후기 ============================

내일 24일 09:07분에 올라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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