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6 3-4 위험한 수술 =========================================================================
4장 위험한 수술-5
“수술은 무슨! 지금 당장 병원. 아니, 숙소로 돌아가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나올 생각도 하지 마!”
그런데 그때였다.
“형님.”
황태자의 등 뒤에서 미하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가 분노한 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뒤로 가 있었던 것이다.
“미하일……! 너도……!”
황태자가 고개를 돌리며 노호성을 토하는 순간이었다.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잠시 진정하세요.”
파앗!
미하일의 손가락이 황태자의 뒷목을 강하게 누른 것이다!
“……너…… 너……?!”
아찔하게 머리가 울려 황태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미하일……!”
린덴의 동공이 선명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서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로마노프 가의 인물에게만 이어져 내려오는 초상 능력을 발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퍼억!
3황자는 태연한 얼굴로 손날로 린덴의 뒷목을 다시 내려쳐 버렸다.
린덴은 머리가 울리는 충격에 비명도 못 지르고 기절해 버렸다.
“저, 전하!”
엘리제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미하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 뭐, 정신만 잃게 힘을 조절했으니, 걱정은 안 해도 돼. 한 8시간 정도 푹 자고 일어날 거야.”
그녀는 급히 황태자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동공을 확인하고 기초 반사를 확인하고. 다행히 미하일의 말대로 이상 소견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갑자기 폭력이라니! 위험할 수도 있다고요! 특히 머리는!”
“미, 미안. 그나저나 형님을 때렸네. 이거 총사령관 폭행죄로 또 영창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지난번 영창(군대 내 감옥)에서 며칠 지내보니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던데.”
미하일은 걱정된다는 얼굴을 했다.
“어쨌든 일어나시면 내가 싹싹 빌 테니 넘어가자고.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하아.”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3황자는 지난 삶과 바뀐 게 없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 방금 황태자의 말이 떠올랐다.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두근. 그녀의 가슴이 자신도 모르게 흔들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가 나를 걱정한다고? 저렇게 화낼 만큼?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수술에만 집중하자.’
온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란 수술이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전하와의 일은 수술이 끝난 후. 그때 다시 생각하자.’
그렇게 그녀는 애써 황태자와의 일을 머리 구석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생각이란 것이 억지로 밀어 넣는다고, 밀어 넣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 황태자의 말들은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괜찮겠어, 리제? 갑자기 얼굴이 안 좋은데? 무리일 것 같으면 그냥 수술하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
늦은 밤, 알버트의 응급수술이 시작되었다.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병원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비웠다. 아무리 소형이라도 수류탄의 위력은 끔찍했으니까.
“장갑 먼저 끼세요. 복강 안으로 균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요.”
엘리제는 3황자에게 소독 장갑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소독약으로 알버트의 복부를 소독했다.
“…….”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를 수술을 하기 전이건만 담담한 모습.
미하일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리제.”
“네, 왜요?”
“두렵지 않아?”
“…….”
엘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답했다.
“당연히 두렵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3황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 수술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왜 수술을 시도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만약 네가 수술을 포기해도 알버트, 이놈은 천국에서 이해할 거야.”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을 잘못 선택한 탓이에요.”
“응?”
“전 의사니까요.”
“……!”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저도 이 수술하기 싫어요. 하지만…… 살릴 수 있는데, 어떻게 외면하겠어요? 나밖에 살릴 수 없는데.”
그래, 그녀도 이 수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쪽으로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어.’
그녀는 지구에서의 일들을 떠올렸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의사는 위험에 노출될 때가 종종 있었다.
전염병에 감염될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를 치료하거나, 에이즈에 걸린 사람을 수술하거나, 악천후 속에서 추락 위험을 무릅쓰고 헬기로 환자를 이송하거나.
모두 크고 작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이런 위험을 기꺼워하는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과하고 의사들이 크고 작은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치료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폭탄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것은 많이 극단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구에서도 전쟁터에서 이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고.’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바로 시작할게요.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니, 빨리 진행해야겠어요. 전하께서는 꼭 제가 이야기한 대로 움직여 주셔야 해요.”
“그래.”
엘리제는 수술대 앞에 섰다. 그리고 메스를 든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작고 부드러운 소녀에서, 철혈(鐵血)의 외과의사로.
머릿속을 흩뜨리던 황태자의 일은 잊었다. 그저 그녀는 눈앞에 환자와 수술만 생각했다.
“……!”
3황자는 돌변한 그녀의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오픈하겠습니다.”
오픈(Open).
수술을 시작하는 단어.
그녀는 곧바로 수술칼을 움직였다.
찌익.
아래 갈비뼈 바로 밑으로 기다란 피 길이 생겨나며 살이 벌어졌다. 부신에 접근하기 위한 늑골 밑 절개였다.
벌어진 살 사이로 울컥 피가 쏟아졌고 수류탄에 짓이겨진 장기가 드러났다.
어지간한 지옥도는 다 경험한 3황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
하지만 작은 소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부 장기를 살폈다.
“…….”
3황자는 그런 엘리제를 말없이 바라봤다.
하얗고 여린 소녀가 철혈의 얼굴로 수술에 열중하는 모습은 모순적인 느낌을 주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서…… 어울렸고, 여린 외모와 다르게 강인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마치 전장에 선 신화 속 여전사, 발키리처럼 말이다.
‘형님께서…… 왜 그렇게 빠지셨는지 알겠군.’
그는 그녀가 수술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미하일은 엘리제를 그저 마음이 끌리는 소녀로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여린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런 강인함이라니?
모순된 아름다움.
수없는 여인과 만나본 그이지만, 이런 매력은 처음이었다. 아찔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거 위험한데? 그렇지 않아도 끌렸는데 너무 욕심나잖아.’
그런데 그때였다.
“전하.”
“응?”
“집중해 주세요. 전하가 실수하면 알버트 공자는 물론 저희도 죽어요.”
따끔한 질책에 미하일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응, 미안.”
“여기 간을 잡아주세요.”
미하일의 손에 간이 잡혔다. 단단하면서도 살짝 물컹한 게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조심히 위로 당겨주세요. 먼저 간을 고정하는 인대를 잘라낼 거예요.”
첫 번째 단계. 삼각 인대를 제거해 간을 위로 젖혀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평소라면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지만, 수류탄이 걸렸다.
‘최대한 조심해서.’
그래도 탄이 간을 피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부신이 아니라 간에 박혀 있었다면 그녀는 수술을 시도도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도 수류탄을 건들지 않으며 간을 절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전하, 그런데 이 수류탄은 어느 정도의 충격에 터지는 거예요?”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정해진 게 없어. 사실 이 총류탄은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진 불량품에 가까운 놈들이라. 안 터지기도 하고, 그냥 툭 건드려서 터지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 제국군은 안 쓰는 물건인데, 이딴 거를 공화국 놈들은 왜 쓰는 건지.”
“그러면 조금만 건드려도 터진다는 가정하에 수술해야겠네요.”
이럴 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수술해야 한다.
그녀는 수류탄에 어떤 충격도 가지 않게 심혈을 기울여 삼각 인대를 잘라냈다.
툭!
그런데 가위에 인대가 잘리는 순간이었다. 간과 인대에 연결된 장기가 움찔 흔들렸다!
“……!”
엘리제와 3황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수류탄을 바라봤다. 다행히 수류탄은 미동도 없었다.
“하아, 이거 조마조마하고만.”
미하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는 그 말에 동의했다.
잘못 건드리면 죽을 수도 있다니. 아무리 그녀라도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침착하게 하면 돼. 갈색 세포종 수술해 봤잖아? 그 수술과 다를 것 없어.’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추스르며 수술을 진행했다.
‘일단 출혈을 막기 위해 혈관 먼저.’
부신과 콩팥 일부를 절제하기 위해선 먼저 혈관을 모두 막아야 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철제 집게를 들었다.
그리고 조심히, 최대한 부드럽게 수류탄 바로 옆에 위치한 부신 동맥에 집게를 가져갔다.
달칵!
금속성을 내며 집게가 닫혔다.
이번에도 수류탄은 미동도 없었다.
‘다음.’
엘리제는 다음 목표인 부신 정맥을 바라봤다. 이번엔 조금 더 깊어 철제 집게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타이, 실로 묶어야 해.’
타이(Tie).
수술용 실로 혈관을 묶어 결찰하는 방법이었다.
단 문제가 있다면 손가락을 직접 깊숙이 밀어 넣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수류탄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괜찮아. 최대한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그녀는 수술용 실을 들었다.
“뭐하려고, 리제?”
“이 실로 저 안에 있는 혈관을 묶을 거예요.”
“혈관을 묶는다고? 위험할 것 같은데?”
미하일이 놀라 물었다.
“부드럽게 하면 괜찮아요.”
그 대답에 미하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말리진 않았다. 이미 그녀가 하는 걸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대신 이렇게 했다.
“잠깐만.”
“……?”
탁.
그의 손이 그녀의 왼손을 움켜잡았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그의 딱딱한 감촉에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전하?”
“그거 오른손으로만 하는 거지? 왼손은 내가 잠깐만 잡고 있을게.”
“어째서?”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내가 널 지켜주려고.”
엘리제는 그의 말을 이해 못했다. 어차피 수류탄이 터지면 다 끝인데, 무슨 지켜주고 말고 할 게 있는가?
하지만 미하일의 표정은 진지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왼손을 빼낸 후, 곧바로 타이를 했다.
그림 같은 원 핸디드 타이!
손가락들이 허공에서 수를 놓자, 매듭이 생겨났고, 곧 기다란 검지가 일직선으로 파고들었다.
부신 동맥을 피해, 수류탄 옆에 위치한 부신 정맥으로!
질끈.
실이 묶이며 정맥이 결찰되었다! 이번에도 수류탄은 전혀 건들지 않았다.
‘됐어. 이제는 콩팥 위쪽으로 오는 혈관을 묶은 후, 부신을 복강에서 박리 해내면 돼.’
콩팥의 혈관을 묶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류탄이 박힌 부신과 비교적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류탄이 박혀 있는 부신을 후복막에서 박리해 내는 일이었다.
‘메스와 철제 도구로 떼어내야 하는데.’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복막과 연조직에 쌓인 부신을 박리 하는 것은 본드에 붙은 물건을 면도칼로 살살 긁어내 떼어내는 것과 비슷하다.
과정 자체가 어려울 것은 없지만, 역시 문제는 수류탄이었다.
‘수류탄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모든 과정을 마쳐야 해.’
생각만 해도 까마득한 일이긴 했다.
메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하니까. 그러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수류탄은 잊자. 긴장하면 더 안 돼.’
그녀는 메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히, 부드럽게.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 작품 후기 ============================
내일 27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