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78화 (78/194)

00078  3-5 감금  =========================================================================

5장 감금-1

“어디로 여행 가고 싶은데?”

“글쎄요. 전 론도 밖으로 나가본 적이 거의 없어 잘 몰라서…… 동방의 려(麗)는 가보고 싶긴 하네요. 어디가 좋아요?”

엘리제는 부신(좌우의 콩팥 위에 있는 내분비샘)을 철제 집게로 찌익 뜯어내며 물었다.

“검은 대륙은 아무래도 덥고. 난 동방의 청이 좋았어. 서대륙과는 문화가 완전히 다르거든.”

“려는 안 가보셨어요?”

“거기까지는. 그래도 려도 매우 조용하고 예쁘다고 하던데? 한번 가볼래?”

“신대륙은요? 동부 해안가에 커다란 다섯 개의 호수와 폭포가 있다고 하던데. 거의 우리 브리티아 섬만 한.”

“안 가봤어. 그것도 같이 가보자.”

그렇게 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수술을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으로 손상당한 콩팥 일부를 절제하기 직전이었다. 미하일이 말했다.

“리제.”

“네?”

“나보고 전하가 아니라 밀이라 불러줄래?”

“……!”

그 말에 엘리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밀. 그녀에게는 깊은 의미가 있는 이름이었다.

첫 번째 삶, 유일한 친구였던 그를 부르던 명칭이었으니까.

“……네.”

그녀의 승낙에 미하일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겠다 한 거지? 그러면 지금 바로 말해봐. 밀, 밀이라고.”

“……밀.”

“그래! 앞으론 그렇게 부르라고.”

탁.

이윽고 그녀의 메스를 따라 손상당한 콩팥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이 끔찍한 수술의 대단원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아, 끝났어. 아무도 안 죽고.’

알버트는 무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무사했다.

‘다시는 이런 수술 안 해. 절대로.’

그녀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수술 중 쌓인 긴장이 한 번에 풀리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미하일도 기쁘긴 매한가지였다. 죽을 거로 생각했던 알버트가 살았다. 리제도 무사하고, 이제 자신을 밀이라 부를 것이다.

이것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하하! 이런 수류탄 따위!”

그는 그녀가 수술 중 빼놓은 소형 수류탄을 집어 들었다. 마치 총알처럼 날렵하게 생긴 모습.

“밤하늘의 별이나 되어라!”

마치 포환던지기 선수처럼 수류탄을 창밖으로 멀리 집어 던졌다. 제국군 부대가 없는 야산 쪽으로.

서대륙 최강검답달까? 그들을 애먹였던 수류탄은 정말 별이라도 될 것처럼 쭉쭉 날아갔다.

그리고 한참을 날아간 뒤에야 야산에 떨어졌는데…….

콰앙!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터져 버렸다!

멀리 떨어져서 터졌음에도 땅이 진동하듯 울리는 굉음이었다.

“……?!”

3황자와 엘리제는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불발탄이 아니었어?”

“그, 그러게요?”

“아까 전은 그러면 왜 안 터진 거지? 분명 신관이 작동했는데?”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하늘 위에 계신 분이 도우신 건가?”

미하일의 얼빠진 물음에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그러게요. 그런가 봐요.”

어쨌든 좋았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인근 부대가 난리가 나서 달려갔지만 사소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혈을 마무리하고 굵은 실로 배를 닫았다.

다 잘 끝났다.

***

“으아,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진짜 힘드네.”

수술장을 나서며 3황자는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 알버트, 저놈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이곳에서 조금 더 치료 후 본국으로 이송될 거예요. 더는 전투를 수행할 상태가 아니니까요.”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부상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알버트의 진짜 싸움은 이제야말로 시작이었다. 부상의 회복부터 재활까지.

‘재활할 수 있을까?’

복부의 상처야 수술이 성공적이니 괜찮다. 부신과 콩팥은 몸에 2개씩 있어서 하나를 떼어내도 큰 문제 없으니까.

하지만 왼쪽 발목의 절단이 문제였다. 이제 그는 몸이 회복되어도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

‘차기 당주(當主)로 복귀하기는 어렵겠지?’

엘리제는 이전 삶처럼 유리엔이 차일드 가문의 차기 당주 후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리제 너도 가서 잘 쉬라고. 오늘 무리했으니까.”

“네, 전하.”

미하일이 고개를 저었다.

“밀. 밀이라 하기로 했잖아?”

“아…….”

“밀이라 해봐.”

“네, 밀.”

미하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은 밤. 내 꿈 꾸고.”

“제가 왜 밀 꿈을 꿔요?”

“그냥. 그냥 내 꿈 꿔.”

그런데 그렇게 둘이 싱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저벅저벅. 차가운 군화 소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누구지? 우리가 나갈 때까지 이 건물 비워 놓으라 했는데?”

미하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나타난 군인들의 명패를 본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MP(Military Police.)

제국군 내의 경찰. 헌병대였다!

헌병대가 왜?

선두에 선 중년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경례를 올렸다. 남자의 어깨에는 선명한 별 계급이 수놓아져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미하일 각하.”

“갈트 준장.”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미하일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갈트 준장. 크림반도에 주둔하는 제국군 헌병대의 수장으로 이전 미하일과 악연이 있었다.

“또 뵙는군요.”

“무슨 일이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각하를 뵈러 올 일은 단 하나란 것을.”

그러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뵙고 싶지 않았는데.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우면 그냥 못 본 걸로 하면 안 될까? 영창 또 가기 싫은데.”

영창. 군대 내 감옥을 뜻한다.

“그건 곤란합니다. 저도 받은 명이 있어서. 죄목은 아시죠?”

“설마 그거?”

“네, 맞습니다. 총사령관 폭행죄.”

미하일은 뒷목을 부여잡았다. 설마 했더니 정말로?! 형제끼리 때릴 수도 있지! 이 소심한 형님 같으니라고!

미하일은 힐끗 옆을 바라봤다. 3층 건물 창문. 이 정도면!

하지만 그의 꿍꿍이는 시도도 전에 가로막혔다.

“애들아.”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뒤에 병사들이 라이플을 3황자에게 겨누었다.

미하일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이봐. 나 이렇게 보여도 나름 황자라고. 계급은 검기사단의 단장으로 중장이고. 진짜 쏘려고?”

“총사령관께서는 여차하면 쏘라고 하시긴 했습니다만. 뭐, 그건 곤란하겠죠. 어쨌든 따라오십시오.”

“영창 보낼 거지? 영창 싫은데!”

“당연하죠.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러십니까? 며칠 쉬다 나오십시오.”

“바퀴벌레 나오잖아!”

“뭐, 어쩔 수 없죠. 몸에 해롭진 않으니 너무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3황자는 헌병대의 병사에게 질질 끌려갔다.

이번엔 갈트 준장은 엘리제를 바라봤다.

“클로랜스 대령.”

“아, 아. 네!”

“귀관도 우리와 같이 가줘야겠습니다.”

“……!”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자신이?

갈트 준장은 곤란히 웃었다.

“죄목을 아십니까?”

“자, 잘…….”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 죄입니다.”

“……!”

엘리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설마 이 수술을 한 것 때문에?

갈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데임.”

“……네.”

“저는 개인적으로 데임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전장에 와서 저희를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남들이 못 듣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도대체 전하께 무슨 잘못을 하신 것입니까?”

“……!”

“황태자 전하를 옆에서 모신 지 꽤 되었는데, 이렇게나 분노하시는 것은 처음입니다. 도대체 데임과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갈트는 혀를 찼다.

“뭐, 설마 데임께서 진짜 큰 잘못을 하진 않으셨겠지만, 전하께서 워낙 분노하셔서 걱정이군요.”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그렇게 화내고 있다고? 자신이 수술한 것 때문에?

“어쨌든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시길.”

그렇게 그녀는 헌병대에 끌려갔다.

***

며칠 뒤,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

공화국군이 사령부로 사용하고 있는 시청에서 한 뚱뚱한 중년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는지요, 각하? 제국 놈들이 심페폴 코앞까지 치고 들어왔는데…….”

지극히 조심스러운 말투.

중년 남자의 이름은 쥬페르 백작으로 이 크림반도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던 군주였다.

그리고 그런 쥬페르 백작 앞에는 그림처럼 잘생긴 젊은 남자, 루이 니콜라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물론 각하께서 다 복안을 가지고 계시겠지만, 시민들이 너무 불안해하고 있어서…….”

쥬페르 백작은 루이 니콜라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루이 니콜라스는 장미처럼 붉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시민? 시민이 아니라 백작. 당신이 불안한 것 아닙니까? 겁이 너무 많은 것 같군요. 아니면 우리를 믿지 못하거나.”

일국의 군주에게 하기에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쥬페르 백작은 불쾌한 빛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화들짝 놀라 이렇게 둘러댔다.

“아, 하하. 아닙니다. 제가 왜 불안해합니까? 각하께서 친히 대 공화국군을 이끌고 계시는데. 공제든 검제든 뇌제든 모두 각하의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가십시오.”

“네?”

“전쟁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겁먹은 꼬리 말고 이만 꺼지라고요.”

“……!”

그 모욕에 쥬페르 백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래로 내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으나, 역시 화를 내지는 못했다.

공화국군과 루이 니콜라스는 집 안에 들어온 호랑이였으니까. 호랑이를 자극하면 물려 죽는다.

“죄, 죄송합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뒷걸음질로 방에서 물러났다.

방문이 닫히자 옆에서 기립해 있던 또 다른 젊은 청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이 너무 심하셨던 것 아닙니까?”

“뭘?”

“그래도 반도인들에게 영향력이 큰 자인데…….”

루이 니콜라스는 코웃음 쳤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치울 놈이야.”

“…….”

“제국군을 물리치면 이곳에 우리 공화국의 괴뢰정부를 세울 거니까.”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저 쥬페르 백작은 공화국이 군을 파견한 것이 제국을 크림반도에서 무찌르기 위해서라고 여기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공화국의 진짜 목적은 이곳 크림반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대륙 북부의 로마노프령(領)을 견제하고, 흑해의 제해권을 손에 쥐는 것.

그런 목적이 없었으면 아예 군을 파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나저나 우리 모루 작전을 간파한 책략가가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루이 니콜라스는 눈썹을 꿈틀했다.

눈썹을 꿈틀하자 그의 그림 같은 이마 곁으로 난 깊은 상처가 같이 꿈틀했다.

이번 코프스크 회전의 패전 시 퇴각하며 입은 상처였다. 한 치만 깊었어도 두개골이 함몰돼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흉측한 흉터로 남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통증에 그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등불을 든 여인.

제국의 예비 황태자비.

그리고 그의 계책을 두 번이나 간파한 책략가.

“이 빚들은 반드시 갚아주마.”

개전 초기, 몽셀 왕국을 이용하려는 계책을 간파한 것도 그녀였다.

그녀 때문에 당시 공화국은 막심한 손해를 입었다.

몽셀 왕국을 뒤에서 지원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는데,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번 모루 작전 때 그녀 때문에 입은 피해는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꼭 생포해야겠어. 반드시.”

포로 교환? 그딴 건 필요 없었다.

전리품으로 삼겠다.

그래서 처절히 농락해 망가뜨릴 것이다. 그 순백함이 더러움에 물들 때까지.

그러기 위해선 일단 제국군을 무너뜨려야 했다.

“파비앙.”

“네, 각하.”

“검은 대륙에서 ‘그 물건’은 어디쯤 도착했지?”

“아마 며칠 안에 도착할 것입니다.”

“‘제물’로 사용할 검기사단(劍騎士團)의 포로들은?”

“영관급 포로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명령한 대로 무어인 시종들도 붙였습니다.”

“그래, 그들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면 안 돼. 알겠나?”

“네, 주의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파비앙은 잠시 주저하며 루이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사막의 전갈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저…… 각하.”

“왜?”

파비앙은 역정을 각오하며 말했다.

“……꼭 이 방법을 사용하셔야겠습니까?”

“……!”

“너무 비인도적입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자국 내에서도 비난 여론이 클 것입니다.”

<바로 다음편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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