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3-5 감금 =========================================================================
5장 감금-2
비인도적.
루이는 자신의 부관이자 친우인 파비앙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확실히 비인도적인 계책이긴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전쟁. 결과적으로 이기기만 하면 된다. 이기기만 하면 무슨 수단을 썼든 모두 정당화돼.”
“하지만…… 혹시라도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여론을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랬다.
계책이 성공하면, 그래서 대승을 거두면 승리로 잘못을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비인도적인 방법을 썼는데, 심지어 실패했다? 그러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30년간 공화국을 독재한 니콜라스 가문의 반대파를 비롯한 공화국 내 여러 지식인이 벌 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의 대패로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있을 텐데, 그때는 감당이 안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계책은 실패하지 않아.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어.”
“하지만…… 제국군에는 데임 클로랜스가…….”
파비앙은 등불을 든 여인의 다른 별명 하나를 떠올렸다.
그 데임 클로랜스라면, 어쩌면 자신들의 계책을 무산시킬지도 몰랐다.
하지만 루이는 불쾌히 고개를 저었다.
“그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 너는 계획이 차질이 없도록 검기사단의 포로들이나 보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
헌병대에 끌려간 엘리제는 즉결 판결을 받았다.
그녀가 받은 판결은 다름 아닌 ‘자택 근신’.
명령이 있을 때까지 무기한 자택에서 대기해야 하는 벌이었다.
‘그래도 큰 처벌은 아니구나.’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명령 불복종은 군대에서 다루기에 따라서 한없이 엄하게 처벌할 수 있는 죄였다.
물론 당시 그녀의 상황은 일반적인 명령 불복종과는 거리가 있긴 했다.
그래도 황태자가 워낙 크게 분노했다길래 어떤 벌이 떨어질까 걱정했는데, 자택 근신이면 굉장히 약한 처벌이었다.
“그런데…… 저는 자택이 없는데 어디서 근신해야죠?”
엘리제는 헌병대의 갈트 준장에게 물었다.
그녀는 다른 고위 장교와 다르게 개별 숙소가 없었다.
낮이고, 밤이고 주구장창 야전병원에서 환자만 봤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병원에서 대기하면 될까요?”
하지만 갈트 준장은 고개를 저었다.
“숙소는 없지만 데임께서 머물 곳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네?”
“아직 정식으로 식을 올린 것은 아니라 예법상 사소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뭐, 명령이니 큰 문제는 없겠지요. 다른 방을 마련해 드리면 좋겠지만, 사정상 어려워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예?”
엘리제는 그의 말을 이해 못하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어쨌든 따로 머물 곳이 있다는 건가?
“이쪽으로 오십시오.”
갈트 준장을 따라간 엘리제는 자신이 머물 방을 보고 입을 벌렸다.
“이곳은?”
“네, 데임께서 근신하실 곳입니다. 추가적인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면 됩니다.”
“하, 하지만…….”
엘리제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라도?”
“……방이 너무 좋은 것 아닌가요?”
그렇다.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방은 근신 장소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깔끔하고 단정했다.
전장이니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론도나 파리스 시내의 호텔이라 해도 믿을 만한 수준.
“총사령관의 명령입니다.”
“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데임께서 이 방에서 근신할 수 있도록 하라고.”
“…….”
도대체 또 왜 그런 명령을?
다시금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려 해,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요. 그러면 이곳에서 대기하면 되는 거죠?”
“네, 식사는 병사들이 방으로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 방 안에 욕조와 화장실이 연결되어 있으니, 편하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
욕조와 화장실이 딸린 방이라니!
이 방은 정말 호텔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럼 저는 이만.”
“……네, 조심히 가세요.”
“참, 데임.”
갈트 준장은 나가기 전, 그녀를 돌아봤다.
“이런 속담 알고 있습니까?”
“……?”
“Nothing is so unpalatable as a lovers' quarrel.”
“……!”
엘리제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갈트 준장이 말한 속담은 한국어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였다.
“저, 저희는 아직 그런 관계가…….”
하지만 갈트 준장은 듣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모쪼록 잘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뭐…….”
그러곤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알고 보면 나름 귀여운 분이니까 말이지요.”
“……!”
악어나 상어가 귀엽다면 모를까? 그 황태자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에 갈트 준장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 어렸을 적에 전하는 참 귀여우셨습니다.”
“이전에 뵌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전 황궁 근위대 출신이었거든요. 그 당시, 어렸을 시절의 전하를 자주 뵈었었는데, 정말 귀여우셨지요.”
“.......”
“정말입니다.”
“......네.”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갈트 준장은 사라졌다.
‘하아, 뭐가 뭔지.’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왜 전하께서는 이런 호화로운 방에 나를 근신시킨 거지?’
벽에 걸려 있는 장을 열어보니 심지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여성용 파자마도 걸려 있었다.
급하게 구한 것인지 사이즈는 훨씬 컸지만, 방금 세탁한 듯 깨끗했다.
마치 근신이 아니라, 휴가라도 온 느낌.
‘설마?’
문득 그녀의 머리에 얼마 전 황태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대체 그렇게 일해서 언제 쉬는 거지? 조금은 쉬어야 할 것 아닌가. 왜 본인의 몸은 생각하지 않는 거지?’
살짝 짜증이 섞였던 목소리.
“설마…… 나보고 쉬게 하려고 일부러?”
아니다. 아니다. 고작 설마 그런 이유로 그가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자꾸만 드는 의문.
‘왜…… 나를 걱정하는 거지?’
알버트를 수술하기 전의 분노.
그건 분명 걱정이었다.
“하아.”
목숨을 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건만,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 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 정말로.’
그녀는 침대에 털썩 엎드렸다. 전장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폭신한 감촉이 몸을 감쌌다.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피곤했다. 아니, 피곤하지 않아도 그냥 자고 싶었다. 그래서 잠에 빠져 이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녀는 강제적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근신 생활은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갇혀 있을 뿐 너무나 편안했다. 전장에서 이런 편안함을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물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먹고 씻고, 자는 것에 불편함이 없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전장에서는 지나친 호사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데임.”
“감사해요. 매번 이렇게 가져다주셔서.”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병사는 진정으로 영광이란 표정으로 경례했다.
엘리제는 민망하게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병사들이 매번 자신 때문에 음식을 가져다 나르는 게 미안했다.
‘이런 건 내가 가져와도 되는데. 미안하게.’
하지만 엘리제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식사 당번을 하기 위해 병사들이 어마어마한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들의 정신적 레이디이자, 등불을 든 천사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는 영광을 누리는 일이다.
병사들은 식사 당번을 한 번이라도 해보기 위해 웃돈을 주고 거래하기까지 해 장교들이 단속에 나설 정도였다.
‘오늘은 등심 스테이크. 또 고기구나.’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식을 주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사육하려는 것인지 나오는 음식마다 영양가 만점이었다.
한 번은 남기려고 했으나, 식사 당번 병사가.
‘안 됩니다. 모두 드셔야 합니다.’
‘네?’
‘전하의 명령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명령을...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 걸까? 너무 오래 쉬었는데. 병원은 잘 돌아가고 있을까?’
사실 그렇게 오래 쉬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으로 삼 일도 안 쉬었으니까.
여태껏 노동 강도를 생각해 보면 며칠은 더 쉬어야 몸의 피로가 씻길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걸.’
지구에서도 자타공인 워커 홀릭이었던 그녀는 이런 휴식이 불편했다.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 일해야 할 것 같았다.
‘알버트 공자는 잘 회복되고 있겠지?’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순조롭게 회복 중인 것 같았다.
귀족파의 영식들이 몰래 와서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언제나 콧대 높던 그들은 그녀가 알버트를 목숨을 걸고 살려준 것에 크게 감동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나저나.’
엘리제는 시선을 돌려 벽장을 바라봤다.
‘저기에 왜 남자 잠옷이 있는 걸까?’
자신의 펑퍼짐한 파자마가 걸려 있던 곳 옆에 남성용 잠옷이 같이 걸려 있었다.
‘그냥 걸려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재질이 최고급 실크였다. 그것도 동방 청, 광주(廣州)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고가라 저 실크로 잠옷을 만들어 입는 것은 황족이나 론도의 고위귀족들밖에 없다.
‘도대체 누구 것이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
그날 깊은 밤, 엘리제는 방에 연결된 욕조에서 미리 받아놓은 물로 몸을 씻었다.
아직 겨울인데 물이 차가웠지만, 그래도 씻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녀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얀 살결을 물로 닦았다.
목욕을 마친 후,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그녀는 방 안에 들어가려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벌컥 문을 열려던 그 순간이었다.
왠지 싸한 느낌이 들어 잠시 멈칫했다.
‘뭐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느낌, 느낌이 이상했다.
‘별것 아니겠지?’
그러며 끼익 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방 안을 들여다본 순간!
그녀는 얼음처럼 얼어버렸다.
방 안에 한 남자가 서 있었던 것이다!
“꺄아악!”
“……?!”
“누, 누구세요?!”
그녀는 허겁지겁 몸을 가렸다. 목욕 타월로 감싸긴 했지만, 가슴 위며 허벅지며 맨살로 드러난 곳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나, 나다.”
“……?!”
“진정해라. 나다.”
놀라 남자를 보니,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황태자도 자신이 목욕 타월만 감싸고 나온 것에 놀란 눈치였다.
평소와 전혀 다르게 시뻘게진 얼굴로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고 있었다.
“미, 미안하다. 씻고 있는 줄 모르고 막 들어왔다.”
“저, 전하가 여긴 어째서……?”
엘리제는 커튼 뒤로 몸을 숨기며 물었다.
“여기? 내 방이니까 들어왔지.”
“……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지금 뭐라고?
“크흠, 크흠.”
황태자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여긴 내 방이다.”
“……!”
엘리제는 당황해 물었다.
“하, 하지만…… 저는 여기서 근신을 하라 들었는데…….”
“알고 있다.”
그 답에 그녀는 더욱 당황했다.
알고 있다고?
“내가 지시했다. 네가 내 방에서 근신하도록.”
“……!”
***
그녀는 급히 파자마를 입었다. 제복을 입고 싶었지만, 마침 세탁한 상태다.
‘하루만 있다가 세탁할걸.’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황태자 앞에서 파자마라니.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파자마도 문제가 있었다.
사이즈가 너무 큰 탓에 가슴이 푹 패여 보였던 것이다.
“어, 어째서 제 근신을 전하의 방에서 하라고 하셨는지요?”
엘리제는 그와 멀찍이. 방의 끝에서 끝까지 떨어져 물었다.
황태자는 붉은 조끼를 벗으며 답했다.
하얀 셔츠 사이로 탄탄한 살결이 비쳐, 그녀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방이 없어서.”
“네?”
“네가 머물 방이 없었다. 그래도 레이디이고, 황실의 일원이 될 너인데 창고에 머물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새로 방을 꾸며줄 수도 없고. 그래서 내 방에 근신하라 한 것이다. 어차피 난 전장 지휘로 방에 거의 돌아오지 않으니까.”
“…….”
나름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아니, 납득이 가는 설명이 맞나?’
엘리제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제 황태자와 관련해서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 어쨌든 전하께서 오셨으니 전 나가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덥석.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
그 차가운 감촉에, 그러면서도 화끈 뜨거운 느낌에 엘리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작품 후기 ============================
내일 29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