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3-5 감금 =========================================================================
5장 감금-3
“왜 나가지?”
“그, 그야…… 전하께서…… 오셨으니까요.”
“그냥 있어. 명령이다.”
“……?!”
엘리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그녀는 자신의 바로 옆에 와 있는 린덴의 얼굴을 바라봤다. 냉막한 금색 눈동자.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알 수 없는 갈망.
‘혹시…… 전하께서 내 몸을 바라시고?’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젊은 남녀가 늦은 밤, 단둘이 한 방에 있으니 그런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아, 아닐 거야. 전하는 그러실 분이 아니야.’
그녀는 이전 삶, 그와의 잠자리를 떠올렸다.
둘은 부부였으니 당연히 그와 몸을 섞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행복한 잠자리는 아니었다.
자신은 그를 사랑했으나,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의 관계를 별로 원하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의무로서 황후인 자신을 안았을 뿐이다.
의무에 의한 관계라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슬픈 잠자리였다.
‘어쨌든 전하는 별로 그런 쪽의 욕망이 없으셔. 그러니 아닐 거야.’
한 가지 위로가 되었던 점은 그가 다른 여자를 찾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어른의 욕망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도 아닐 거다.
‘그렇겠지?’
하지만.
저 금색 눈동자에 깃든 알 수 없는 소용돌이를 본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엉클어졌다. 정말 아닌가?
‘혹시 전장에 있다 보니…… 여자의 몸에 대한 마음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가 절대 그런 욕망에 휘둘리는 남자가 아니라 생각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전장이니까. 온갖 감정이 극단적으로 터지는 곳이니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진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마, 만약 정말 내 몸을 바라는 거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결혼한 후에는 그의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겠지만, 아직 그와 그녀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말했다.
“뭘 그렇게 보는가? 안 쉬는가?”
“…….”
“이곳이 쉬기에 가장 편할 것이다. 그간 계속 무리했으니, 며칠이라도 푹 쉬어. 나는 신경 쓸 필요 없고.”
엘리제는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냥 쉬면 되나요?”
“그러면?”
“……아닙니다.”
그녀의 손을 놓은 그의 눈빛은 어느새 평상시로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차갑고, 감정 없는.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전하가 그런 욕망을 가지실 리가 없잖아.’
그녀는 그를 의심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남녀 간의 욕망에 대해선 깨끗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한 방에서 자도 큰 문제 없을,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남자인지도 몰랐다.
“그러면 편히 쉬십시오.”
엘리제는 그에게서 벗어나, 방구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린덴은 커튼을 치더니 갑갑한 제복 상의를 벗고, 편한 내의로 갈아입었다.
‘전하와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게 되다니.’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복잡했다. 물론 낯 뜨거운 일이 일어나지야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많이 화나지는 않으신 것 같구나.’
갈트 준장이 워낙 겁을 줘 걱정했는데, 평소와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엘리제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린덴은 화가 안 난 것이 아니란 것을. 지금도 그는 그때 그녀가 위험했던 사실만 떠올리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저 티를 안 내고 있을 뿐이다.
그가 3황자 미하일을 무리해서 영창에 처넣은 것은, 자신을 폭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엘리제를 위험에 빠뜨린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한편 엘리제는 그런 그의 마음은 짐작도 못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도대체 왜 그렇게 화내셨던 걸까?’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라니.
누가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가?
‘하아, 설마……?’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르려 했으나, 애써 머리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복잡한 기분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물었다.
“왜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지?”
“아…… 여기서 쉬려고 합니다.”
“불편하지 않은가?”
“괜찮습니다. 편합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니 편히 쉬십시오, 전하.”
제발 저한테 더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저는 여기서 쥐 죽은 듯이 있을 테니.
엘리제는 속으로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린덴이 그녀의 바람을 따라줄 리가 없었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편하다고?”
“…….”
“내 곁에 있는 것이 그렇게 싫나?”
“……?!”
갑작스러운 물음.
“아, 아닙니다!”
엘리제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으나, 사실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의 옆에 있기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방 가장 구석에 이렇게 쪼그려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
“네.”
“그러면 이쪽으로 와라.”
“어디로…… 말입니까?”
“여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본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바로 그의 침대 옆자리였다!
“어차피 너도 잠을 자야 하지 않은가? 맨바닥에서 잘 생각인가? 이쪽으로 와서 쉬어라.”
“괘, 괜찮습니다.”
“왜?”
“제가 옆에 있으면 전하께서 불편할 것 아닙니까?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엘리제는 강한 목소리로 둘러댔다.
황태자 옆에서 자라고?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이렇게 말했다.
“안 불편하다.”
“네?”
“네가 옆에 있는데 내가 왜 불편하지?”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붉어졌다.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 그게…… 침대가 좁으니…….”
“하나도 안 좁다.”
하필 침대는 더블 퀸 이상의 사이즈였다. 둘은 물론 셋이 누워도 충분한 크기.
“저, 저는 침대보다 이곳이 훨씬 편합니다.”
“침대보다 맨바닥이 편하다고?”
좌식 생활을 하는 한국이면 모를까, 입식 생활을 하는 브리티아 인 중 맨바닥에서 자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게…… 네! 원래 바닥에서 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
황태자는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허튼짓이라도 할까 그러는 건가?”
엘리제는 화들짝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건!”
그를 믿지 않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는 남자로서 그를 믿었다. 그는 여자의 몸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황태자의 신분으로도 지난 삶, 자신과 결혼할 때까지 동정이었을까?
정확하진 않지만 이번 삶의 그도 지금까지 동정일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그렇게 믿는 것과 옆에서 잠을 청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날 무얼로 보는 건가? 물론 후에 식을 올리면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겠지만, 그전에는 절대 손 하나 건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
린덴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안 되겠군.”
“……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전하?”
“가만히 있어.”
그녀는 앉은 상태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뭐, 뭐하려고?
탁. 엘리제의 등 뒤에 딱딱한 벽이 부닥쳤다. 더는 물러갈 곳이 없어진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하?”
그 순간이었다!
그의 한쪽 손이 그녀의 무릎으로 파고들었다. 반대 손은 허리춤에!
“꺄악! 무, 무슨?!”
그러고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가만히 있어. 손끝도 안 댈 테니.”
소, 손은 이미 대고 있지 않은가?!
무릎 뒤로 느껴지는 그의 손에, 허리에 닿은 그의 감촉에, 얼굴에 맞닿은 그의 탄탄한 가슴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붉어진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두근.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목, 손, 다리 할 것 없이 전신이 타는 듯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침대로 돌아갔다.
그러고 침대 한쪽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거칠게 들어 올렸을 때와 다르게 혹시라도 그녀가 다칠까 부드럽게.
“어차피 침대는 넓으니 여기서 자도 돼. 알았나?”
“……네.”
그녀는 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으나 더는 뭔가를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그저 심장에 문제라도 생긴 것마냥 가슴만 미친 듯이 뛰었다.
“자라.”
“……네.”
황태자가 등불을 껐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그들을 비췄다.
장담한 것처럼 그는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녀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잠을 청할 뿐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터질 것 같은 것은 가슴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한데 왜 가슴이 터질 것 같은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왜? 어째서?’
최근 수도 없이 가졌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설마……?
머리 구석에 한 가지 가정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더 생각하면 이 터질듯 복잡한 가슴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모르겠다. 자자, 자야 해.’
일단 이 순간을 벗어나야 했다. 자고 일어나면 그도 옆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잠을 청했다. 도저히 잠을 잘 상태가 아니었지만, 억지로 눈을 감았다. 마치 현실에서 도피하듯.
***
그렇게 그녀가 눈을 감고 달빛 속 시간이 흘렀다.
“…….”
얼마나 지났을까? 옆에 누워 있던 황태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리제.”
“…….”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자나? 엘리제?”
그녀는 어느덧 잠든 건지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바라봤다.
“잘도 자는군. 난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 건가.”
본인이 손끝 하나 안 건들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 주제에 린덴은 그렇게 투덜댔다.
‘방금.’
그는 아까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녀가 씻고 나올 때 방에 들어와 그녀의 몸을 봐버렸다.
목욕 타월에 가려진 하얀 나신을 본 순간, 그의 머리는 하얗게 비어졌다.
얇은 다리, 타월에 드러난 허벅지, 그리고 작은 어깨에 도드라진 쇄골.
잠시였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끝없이 떠오르며 그를 괴롭게 했다.
만지고 싶었다. 안고 싶었다.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이라 새겨두고 싶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타는 듯한 욕망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르겠지.’
날 믿으니, 아니, 남자로 생각도 않으니 이렇게 옆에서 편하게 자는 것이겠지.
그는 이 순진한 소녀를 대상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계속 떠오르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도 너무 괴로웠다.
“엘리제. 넌 왜 이렇게 날 미치게 하는 거냐?”
이 소녀를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녀가 자신을 바라만 봐준다면, 한 번만 진심으로 웃어준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를 바랐다.
‘내가 미쳤지.’
린덴은 본인의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오늘도 그렇고.’
원래 그는 그녀가 머무는 동안, 이 방에 올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지만,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도저히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얼굴만 보려고 왔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얼굴만 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처음엔 그랬지.’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감정이 요동쳤다. 같이 있고 싶다. 함께 더 있고 싶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서 잠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잠시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30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Ps. 지금까지는 일일 연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슬슬 연재 주기를 조정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제 곧 타 플랫폼에도 올라갈 예정이라서요. (사실 어느 플랫폼에 언제, 어떻게 올라갈지는 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출판사에 전적으로 맡기고 있고, 각 업체들과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라서요.)
이번주까지는 매일 연재를 유지하지만, 다음주, 1월 첫주부터는 주5회 월화수목금 연재로 바뀔 것 같습니다. 1월 2일부터 며칠 동안은 연참... 을 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ㅠㅠ
어쩌면 1월 1일도 쉴지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ㅠㅠ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