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82화 (82/194)

00082  3-6 전염병  =========================================================================

6장 전염병 - 1

“데임.”

“네, 제이?”

제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뭐가요?”

“요즘 무리하는 것 같아서…….”

그러며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론 평소에도 항상 무리하긴 하시지만…….”

엘리제는 부드럽게 웃었다.

“전 괜찮아요. 평소와 다른 것 전혀 없는 걸요.”

“하지만…….”

제이는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들의 대화처럼 평소에도 무리는 했다. 아니, 워낙 환자가 많다 보니 엘리제가 무리하지 않는 날이 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 지금의 그녀는 뭔가 달랐다.

평소에는 진짜 환자를 위해 노력하는 느낌이라면, 지금의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듯 일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일부러 몸을 혹사시키는 듯한 느낌.

이상한 점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계속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환자를 보는 틈 사이, 엘리제는 그녀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고 무언가에 깜짝 놀라 고개를 젓곤 했다.

그런 이상한 모습이 하루에 몇 번이고 목격되었다.

‘도대체 왜 저러시지?’

그때, 한 간호원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클로랜스 병원장님.”

군인들은 그녀를 데임이나 대령님으로 부르지만, 의료진들은 주로 그녀를 야전병원의 원장으로 불렀다.

“네? 무슨 일이죠?”

간호원이 웃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어요.”

“……!”

엘리제의 눈이 평소와 다르게 크게 흔들렸다.

“환자를 보러 오신 건가요?”

“네.”

“그러면 그레이엄 선생님께 말씀드려 안내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데임?”

그 말에 간호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데임께서 안내하지 않으시고요?”

황태자는 주기적으로 야전병원에 방문했다. 표면적인 이유야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라지만, 엘리제를 제외한 병원의 사람 중 그렇게 여기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누가 봐도 그녀를 보러 온 건데, 그레이엄보고 안내하라니?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저는 지금 환자를 봐야 해요.”

“하지만…….”

간호원은 그녀가 돌보는 환자를 살폈다. 상처가 크긴 했지만, 활력 징후가 정상이고 출혈도 없어 별로 급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 환자 말고도 처치해야 할 환자가 많아요.”

“…….”

“그리고 꼭 병원장이 총사령관을 마중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군법에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굳이 따지면 그건 그렇다.

결국, 간호원은 곤란한 얼굴로 그레이엄에게 갔고, 제이는 엘리제를 살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볼 생각으로.

하지만.

“……?!”

그녀의 얼굴을 본,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데임……?’

환자를 살피는 엘리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빨간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강하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얼굴로.

***

‘그렇게 웃으니 예쁘지 않으냐. 가끔 내 앞에서도 그렇게 웃도록 하여라.’

‘생일 축하한다. 제대로 못 챙겨서 미안하다.’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왜 너는 네 생각만 하는 거야?! 이 이기적인!’

그에게 들었던 말들이 끝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리 환자에게 집중하려고 해도, 어느 순간 다시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뒤에서 안았어.’

그 밤.

린덴이 그녀를 처음으로 안은 그 날.

그녀는 자고 있지 않았다. 아니, 처음엔 잠들어 있었지만 중간에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그것도 그가 뒤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데 어떻게 계속 잠들어 있었겠는가?

‘어째서? 왜?’

그녀는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이전 삶, 그는 관계를 가졌어도 그런 식으로 자신을 안은 적은 없었다.

그저 의무적으로 관계를 마친 후, 씻고 각자 잠을 잤을 뿐이다.

그런데…… 왜?

왜 그렇게 따뜻하게……?

그녀는 그때 등 뒤에 닿았던 그의 느낌을 떠올리고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싫었나?

아니, 싫지는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뿌리치지 못했어.’

아직 약혼도 하지 않은 남자가 자신을 등 뒤에서 안고 있었다. 손끝 하나 건들지 않겠단 약속을 어기고.

그러면 당연히 뿌리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왜?

‘싫지 않았으니까.’

그래, 싫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렇게 냉대에 지쳐 망가졌으면서도. 파국 끝에 단두대에 처형당했으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하아…….”

그래, 잘 모르겠다.

그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말들을 하는지, 이런 행동들을 보이는지. 전혀 모르겠다.

‘아니, 거짓말하지 마. 엘리제.’

그녀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그가 그러는 이유. 짐작 가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보가 아니니까. 그저 외면하고 있을 뿐.

그래, 정확히 말하면 알고 싶지 않은 거다. 진실을 마주하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소녀처럼 그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하지만…….’

그녀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진실이 어떻듯.

자신은 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삶처럼.

그녀는 그게 두려웠다. 너무나.

***

다음 날, 야전병원으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여, 리제! 잘 지내고 있었어? 형님이 괴롭히진 않았어?”

“전하?!”

싱그러운 웃음. 검제 3황자 미하일이었다!

엘리제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그녀에게 그는 항상 반가운 친구였다.

“밀.”

“네?”

“전하라 말고, 밀이라 하라 했잖아.”

“아, 미안해요. 밀.”

엘리제는 웃으며 말을 바꿨고, 미하일도 마주 웃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아…… 아파서.”

“네?”

엘리제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아프다고? 최강의 오러 나이츠인 그가?

“아, 별건 아니고. 감기에 걸린 것 같아서.”

“감기요? 밀이요?”

“응, 으슬으슬 춥고 기침 나오네.”

엘리제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러 나이츠인 그가 감기에 걸렸다고?’

물론 걸릴 수 있었다.

오러든 초상 능력이든 질병 면역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하지만 오러 나이츠는 단순히 특수 호흡으로 자연의 줄 에너지(Jule energy)만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도 일반 기사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극한의 무술 단련을 한다. 그런 만큼 일반인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체력이 좋았다.

즉, 오러 나이츠들은 건강 체질 중의 건강 체질이라 할 수 있었고, 3황자는 그런 오러 나이츠의 정점에 서 있는 자인데?

“크림반도의 겨울이 길어서인 것 같아. 원래도 겨울이 길고, 봄 없이 바로 더운 여름이 오는 지역인데, 도대체 이번 겨울은 언제 끝나려는지 모르겠네.”

미하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다른 서대륙은 슬슬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지만, 크림반도는 여전히 추웠다. 마치 봄이 영원히 안 올 것처럼.

“그냥 안 오려다가, 네 얼굴이나 볼까 하고 겸사겸사 왔어. 약이나 대충 지어줘.”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진찰을 받아봐야 할 것 같아요.”

“응? 그냥 감기라니까. 열이랑 기침 말고는 아무런 증상도 없어.”

그녀도 그가 단순한 감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환자를 보며 쌓인 육감이었다.

“제이, 체온계를 가져오세요.”

“네, 데임!”

그리고 체온을 재본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39.3도! 엄청난 고열이었다!

“아니, 괜찮아요? 열이 엄청 높아요.”

“어…… 괜찮은데? 39.3도라고? 잘못 잰 것 아니야?”

다른 부위에서도 재봤지만, 이번엔 39.4도! 여전히 높았다.

그녀는 고민하다 말했다.

“안 되겠어요. 입원해야겠어요.”

“엥? 무슨 감기 가지고 입원이야. 나, 이래 보여도 검제라고!”

그의 말이 옳았다.

고작 감기 가지고 입원이라니.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의사의 감은 기이하게 정확한 면이 있었다. 따르는 것이 좋았다.

“검제든, 서대륙 최강검(最强劍)이든, 동방 오존(五尊)이든 다 안 돼요. 뭔가 이상해요. 입원하세요.”

“필요 없는데…….”

미하일은 투덜거렸으나, 그녀는 강제로 그를 입원시켜 버렸다.

다행히 당장 검기사단은 작전이 예정되어 있지 않아, 그는 입원할 수 있었다.

“오래 안 있으셔도 돼요. 열 떨어질 때까지만 있으세요.”

“그래, 알았어. 그런데 리제.”

“네?”

“이거 나 걱정해서 그러는 것 맞지?”

능글맞은 물음에 리제는 살짝 당황했다.

“그…… 그건 아닌데…….”

“아니야? 그러면 나 서운한데. 내가 이렇게 아픈데 걱정도 안 해주는 거야?”

“아, 아니, 걱정은 되는데…….”

당황해 더듬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미하일은 쿡쿡 웃었다. 이 소녀는 이런 농담에 무척 약했다. 그래서 더 놀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가만히 엘리제를 돕던 제이가 말했다.

“저…… 데임.”

“네, 제이?”

“혹시…… 전하를 제가 진료해도 될까요?”

응? 놀라 제이를 보니, 어린 소녀는 앵두 같은 얼굴로 손을 저었다.

“아, 아니……! 데임께서는 항상 바쁘시니까. 감기 정도는 제가 보면 데임께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엘리제는 소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이가 미하일을 보는 눈은 선망 그 자체였으니까.

‘미하일 전하의 팬이었구나.’

엘리제는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3황자 미하일.

론도 최고의 바람둥이. 그리고…… 서대륙 최강의 무인.

3년간의 가출 동안 그가 청에서 벌인 모험은 전설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찌나 대단한 일들을 해냈는지, 콧대 높은 청 사람들이 양이(洋夷)인 그를 동방 오존 중 하나인 검제라 높여 불렀고, 청 황실에서 브리티아 황실에 감사의 선물을 보낼 정도였다.

그런 그의 모험은 여러 극 작가들에 의해 편집돼 론도에서 인기리에 공연 중이었고, 젊은 영애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그의 팬이 되었다.

“네,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데임!”

제이는 크게 기뻐했다.

“대신 만약 무언가 변화가 있거나 이상이 있으면 저한테 곧바로 말해주셔야 해요. 알았죠?”

“네!”

그러며 엘리제는 3황자를 흘겨봤다.

‘하여튼 지난 삶도 그랬지만, 참 바람둥이라니까.’

그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에 3황자가 항변했다.

“왜? 왜 그렇게 봐? 그 눈빛은 뭐야?”

“제이는 아직 어려요.”

“그래서 뭐?!”

“그냥요. 어리다고요.”

3황자에겐 퍽이나 억울한 말이었다.

***

그렇게 3황자를 입원시킨 후 엘리제는 잠시 그를 잊고 있었다.

심페폴 인근에서 다시 공방이 거세지며 부상자가 몰려들었던 것이다.

정신없이 환자를 처치하며 엘리제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힘들구나.’

몸도 힘들었고, 다친 부상병들의 신음이 그녀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래도 정신없이 바쁘니 딱 하나 좋은 것이 있었다. 너무 바빠 딴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좋았다.

그렇게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환자 처치에 열중했다.

황태자도 잊고, 지난 삶도 잊고. 그저 목각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반응하며.

그래서일까?

그녀는 이상점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제이?”

“네, 데임?”

“얼굴이? 괜찮아요?”

엘리제는 놀라 어린 소녀를 바라봤다. 주근깨가 있는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못해도 38.5도 이상의 고열이었다.

아니, 언제부터?

“오늘 아침부터 그랬어요. 기침 나오는 것 봐서 감기인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데임.”

엘리제의 얼굴이 굳었다.

‘아침부터 그랬다고? 고열에 기침?’

물론 감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발열, 기침을 나타내는 질환 중 가장 흔한 병이 감기이니까.

하지만 왜일까?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

병원에서의 경험상 이런 육감은 항상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치명적 결과를 안고.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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