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4 3-6 전염병 =========================================================================
6장 전염병 - 3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
며칠 전만 해도 포탄의 굉음이 도시 한가운데까지 울려 퍼졌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제국군이 갑자기 진군을 멈춘 탓이다.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군.”
루이 니콜라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제국군의 피해는 어떤가?”
“현재까지 사망자 100명 정도입니다. 전염병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는 300명 정도이고요.”
파비앙이 답했다.
“그래? 생각보다 사망자가 적군. 검은 대륙에서는 사망률이 80%에 육박했는데.”
“제국의 예비 황태자비 때문인 것 같습니다.”
“흠?”
“여러 치료 방법을 동원해 최대한 사망자의 발생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법이 많아, 내용을 전해 들은 우리 군의 수석 군의(軍醫)가 계속 감탄하고 있습니다. 의학계에 대신 발표하고 싶을 정도로 하더군요.”
“그런가? 등불을 든 여인은 쓸모없는 노력을 하고 있군.”
루이 니콜라스는 비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전염병. 한두 명 치료하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닌데 말이야.”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까요?”
파비앙은 등불을 든 여인이 론도를 3일 만에 대역병에서 구해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파비앙.”
“네, 각하.”
“이 전염병은 론도 대역병과는 달라. 알지 않나?”
물론 안다.
검은 대륙에서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등불을 든 여인이 밝혀낸 것처럼 론도 대역병은 물에 의해 전파되지, 사람 간의 전파는 안 일어났어. 하지만 이 전염병은 아니야. 사람 간에 전파가 일어나지. 그것도 체액으로 쉽게.”
“…….”
“이 전염병의 가장 무서운 점은 높은 사망률이 아니야. 바로 사람 간에 쉽게 전파된다는 점. 그게 제일 두려운 점이지.”
사람 간의 전파. 그건 밀집한 생활을 하는 군대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어쨌든 두고 보자고. 등불을 든 여인이 어떤 대책을 마련하는지.”
루이 니콜라스는 여유롭게 말했다.
***
그 시각, 엘리제는 총사령관 린덴과 만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린덴이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비교적 오랜만에 만나는 그들이었다. 그가 야전병원에 계속 방문했지만, 그녀가 피했기 때문이다.
“그간 많이 바빴나 보군.”
“……네.”
엘리제는 일부러 짧게 끊어지듯 답했다.
중요한 일로 왔으니, 사적인 감정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어떻게 지냈지? 얼굴이 지난번보다 조금 상한 것 같은데.”
“…….”
“환자를 보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몸도 챙기도록 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용무를 말했다.
“전하, 저는 군의 의무를 책임진 의무사령관으로서 군영에 유행 중인 전염병에 대해 논의하고자 왔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그 목소리에 린덴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도 그의 눈을 마주 봤다.
무뚝뚝한 금안의 깊은 곳. 너무나 아득히 깊어, 눈치채기도 어려운 그곳에 선명한 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차라리 못 봤으면 하는 그 감정에 그녀는 가슴이 울렁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래, 전염병 이야기를 하지. 먼저 셋째의 상태는 괜찮나?”
일단 린덴은 전염병을 앓고 있는 3황자의 안부를 물었다.
“아직은 위험합니다.”
3황자는 거의 최초의 감염자다.
그래서인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의 혈소판 수치는 고작 8천!
정상 15만의 20분지 1도 안 되는 수치다. 열도 끝없이 39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만약 그가 신체를 극한까지 단련한 오러 나이츠가 아니었으면, 이미 사망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는 어디서 감염된 것이지?’
3황자는 굉장히 초기에 감염되었다. 어쩌면 그가 최초의 감염자일지도 몰랐다.
‘조사해 봐야겠어. 어쩌면 감염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린덴이 이어 물었다.
“그래, 너는 지금 전염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사실 병사들의 동요를 고려해 말을 아끼고 있긴 하지만, 우리 군은 굉장히 곤란한 상태야. 그래도 엘리제, 너라면 해결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기대를 품은 물음이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은 답이 안 나올 정도로 곤란했다. 사람들 간에 끝없이 전파되는 전염병을 인력으로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하지만! 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소녀라면 해결책이 있을지도 몰랐다.
역시 엘리제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완전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그러면?”
“대신 불완전한 해결책은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많은 사망자가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습니다.”
“……!”
많은 사망자. 그 말에 린덴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느 정도의 사망자를 말하는 거지?”
“정확하진 않지만 1,000명, 아니, 500명은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 1천 명을 언급한 그녀는 500명으로 말을 바꿨다.
500명도 너무 많았다. 어떻게든 이 이상은 죽지 않도록 해낼 것이다.
“500명이라.”
황태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사망자가 많이 나와서가 아니었다.
‘이런 치명적 전염병을 500명의 사망으로 막아낼 수 있으면 그건 완벽한 거지.’
500명의 인명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염병 한 번에 수십만의 사람이 죽는 시대다. 그 정도의 숫자면 희생자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속상해하는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말이다.
‘최악의 경우 군의 전면적인 후퇴도 고려하고 있었는데. 정말 대단하군.’
그는 엘리제를 감탄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른 이도 아닌 그녀가 한 말이다. 그러니 린덴은 무조건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그녀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래, 어떻게 하면 되지? 아니, 무엇이 필요하지?”
그는 전폭적 지원을 할 생각으로 말했다.
“이 전염병을 해결하는 데는 큰 도움 하나와 작은 희생이 하나 필요합니다.”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큰 도움 하나와 작은 희생 하나?
“큰 도움은 뭔가?”
“저에게 계통에 상관없는 전군의 병력 통제권을 주십시오.”
“……?!”
뜻밖의 요구에 린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군의 통제권? 그게 무슨 의미를 뜻하는지 알고 있나?”
전군의 병력 통제권.
어떤 병력이든 움직일 권한을 달라는 것으로, 그녀는 지금 총사령관인 그의 권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무리한 부탁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큰 희생을 막으려면 반드시 필요합니다.”
“…….”
린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요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고민은 잠시. 그는 금세 결정을 내렸다.
“좋다. 그렇게 하지. 너에게 내 권한을 위임해 주마.”
“……!”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단 요구를 하긴 했지만, 너무 큰 부탁이라 정말 들어줄 것인지는 의문이었는데, 이렇게 빠른 승낙이라니?
하지만 린덴은 늘 그렇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난 너를 믿으니까.”
믿는다.
그 말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그래, 그런데 통제권을 가지고 뭘 할 거지?”
“격리 조치를 시행할 예정입니다.”
“격리?”
“네, 역학 조사에 기반한 선제적 격리를 해야 합니다.”
“흠?”
엘리제는 자세히 설명했다.
“이 전염병은 처음에 감기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다 출혈이 진행해 사망하지요. 그 와중에 사람 간의 전염은 현재 환자의 분포 양상을 봤을 때 침이나, 혈액 등 체액이 타인의 몸에 튀었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추정을 말했다.
정확한 진단명은 모르지만, 이 질환은 환자의 체액이 몸에 튀었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공기나 비말(날아 흩어지거나 튀어 오르는 물방울)에 인한 전염보다는 전파 속도가 비교적 느렸기 때문이다.
다량의 환자가 나온 것은 밀집된 군대라는 특성 때문으로 판단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현재 출혈열이 발병한 환자 주변의 접촉자를 모두 조사할 것입니다. 조사 결과 초기 증상인 감기 증상이 있다면 잠재적 환자로 보고 격리 치료를, 없어도 접촉한 경험이 있으면 잠재적 감염자로 보고 모두 따로 격리할 예정입니다.”
“……!”
린덴은 그녀가 왜 병력 통제권을 요구했는지 깨달았다.
이런 일을 해내려면 확실히 병력을 움직일 권한이 필요했다.
“굉장한 규모의 일이겠군.”
“네, 하지만 필요합니다.”
황태자는 속으로 감탄했다.
‘효과는 확실하겠어.’
이렇게 하면 원천적으로 전파를 차단할 수 있다. 혹 추가적 감염이 일어나도 외부로는 퍼지지 않는 것이다.
‘대단해. 정말로.’
그녀가 내세운 대책은 단순해 보이지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질병의 양상에 대한 이해, 전염 경로 추정을 기반으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으로 역학 조사를 해 대규모 격리를 시행하는 일이니까.
현대 지구야 선진국마다 이런 통제를 하는 전문기관이 따로 있지만, 이 시대는 아니다.
오로지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 역학 조사는 그대 혼자서는 무리일 테니, 정보부의 요원들에게 협조토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좋아. 그런데.”
린덴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를 물었다.
“혹시 이 전염병이 공화국의 수작일 가능성은 없나?”
“……!”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첩보원이 알아보길, 공화국군에는 전염병 피해자가 전혀 없다고 해서 말이야. 전장에 전염병이 돌면 보통 양군에 피해가 동시에 있게 마련인데 이상해.”
날카로운 의심이었다.
엘리제는 무겁게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다만?”
“역학 조사를 하며 원인을 밝혀낼 생각입니다.”
“좋아, 만약 미심쩍은 정황이 있으면 나에게 바로 이야기해 줘.”
린덴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정말로 공화국이 연관되어 있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
아무리 전쟁이라도 지켜야 될 선이 있는 법.
정확히 밝혀내기만 할 수 있다면, 공화국에 큰 정치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무엇보다 린덴, 그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가끔은 총보다 펜이 무서울 때가 있지.’
만약 정말로 공화국군이 이런 비인도적인 일을 획책했고, 엘리제가 정확히 증거를 잡는다면.
그때는 공화국군은 크림반도에서 명분을 잃을 것이며, 국내외의 큰 비판에 휘말릴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전장의 분위기가 제국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일은 엘리제에게 달려 있군.’
제국군을 구하는 것도, 진정한 원인을 알아내는 것도 모두 이 작은 소녀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린덴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그녀에게 의지하게 된다. 마음만 같아서는 품 안에만 넣어두고 싶은데.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작은 희생 하나는 무엇이지?”
희생.
말을 꺼낸 황태자는 문득 그 말이 거슬렸다. 혹시?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작은 희생. 그건 의료진의 피해를 의미합니다. 이 병을 해결하는 데는 불가피하게 일부의 의료진들이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
“완벽한 격리가 이루어진 후, 그 격리된 공간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료진도 함께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태자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격리 장소로…… 의사가 들어가야 한다고?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그저 지금처럼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격리 장소에 들어가는 것은 전염의 위험도가 차원이 달랐다.
격리 장소는 전염병 환자만 우글거리는 곳이니까. 전염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들어가 치료하지 않으면 그곳의 환자들은 모두 죽을 테니까요. 하지만 분명 위험한 일이기에 지원자에 한해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황태자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원자? 그러면 엘리제 너는? 설마 너도 들어간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물어보려 했으나, 당연히 정해진 답이 돌아올 것 같아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이기적인 소녀가 자원 안 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이…….’
얼마 전, 그녀가 수류탄 수술을 할 때가 떠올라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미칠 듯이 화가 났다. 이 여자는 왜 매번 이런 식이란 말인가?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엘리제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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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1월 2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