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3-6 전염병 =========================================================================
6장 전염병 - 4
“그래서 조금이라도 감염 위험을 낮추기 위해 보호구 제작을 도와주였으면 합니다.”
“보호구?”
“네, 체액성 전염을 막는 걸 도와주는 복장으로…….”
그녀는 현대 지구의 기억을 더듬어 설명했다.
마치 우주복처럼 전신을 감싸는 보호구. 물론 이런다고 현대 지구처럼 완전히 차단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감염 확률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열심히 설명하였지만 린덴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보호구? 그딴 것 만들면 되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격리 공간으로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녀가 들어가, 다시 위험에 노출되면 이번에야말로 자신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단호히 말했다.
“그래, 네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들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네가 격리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지 않겠다. 절대로.”
“……!”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테니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이건 총사령관이자 황태자로서의 명령이다.”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네가 그곳에 들어가 병에라도 걸리면, 그래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하지만 소녀는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딱딱하게 말했다.
“저는 이 전염병 대책의 책임자입니다. 그런 제가 격리 공간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그래도 안 돼.”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격리 대상자들을 정확히 분류하고 치료하려면 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대 안 된다고!”
“……?!”
갑작스러운 고성!
린덴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질렀고, 엘리제는 흠칫 놀랐다.
황태자는 불길처럼 타오르는 금안으로 말했다.
“절대 안 돼. 네가 격리 공간에 들어간다고? 그 위험한 곳에? 웃기지 마!”
“…….”
엘리제는 그 분노와 격정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가요?’
그래, 그가 왜 이러는지 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저렇게 선명한 감정을 내뱉고 있는데.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에게 다시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전하.”
엘리제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전하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공적인 일입니다. 전하의 개인적인 이유로 필요한 일을 막지 말아주십시오.”
“하, 공적인 일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린덴은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싫다고.”
“네?”
“정말 모르겠나? 싫다고! 네가 또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게! 혹시라도 네가 잘못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이 이기적인!”
울컥.
엘리제는 다시 가슴이 울렁했다.
그의 말을, 그 걱정을 듣기가 너무 힘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우며 현기증이 났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뱉었다.
“전하의 그런 공적이지 못한 말씀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뭐?”
“솔직히 조금…… 거북합니다.”
“……!”
아.
그녀는 말을 내뱉은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린덴의 눈이 고통으로 물들었던 것이다. 도저히 외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리게.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그녀도 아팠다.
“그렇군. 거북하군.”
씁쓸한 목소리.
“미안하다.”
“……!”
그녀는 뭐라 말하려 했으나,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야기한 것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주겠다.”
“전하…….”
“그러면 이만 나가보도록. 오늘 수고했다.”
엘리제는 입술을 물며, 그를 바라봤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으나,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만 울렁했다.
결국, 뒤돌아서 나갈 때 그가 말했다.
“엘리제”
“…….”
“하나만 약속해 주겠는가?”
엘리제는 그를 돌아봤다.
잔인한 말을 들은 그의 눈에는 여전히 아픔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프지 말아주겠는가? 제발. 부탁이야.”
“……!”
엘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괴롭혔다. 손끝이 떨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그날 밤, 사령관저로 돌아온 린덴은 술을 마셨다.
“……빌어먹을.”
그는 평소 술을 즐기진 않는다. 특히 총사인 자신이 전장에서 술이라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팠다.
‘솔직히 조금…… 거북합니다.’
거북하단다, 내가.
난 그녀를 이렇게나 바라는데.
“하아.”
얼마나 더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걸까? 아니, 안 아플 날이 오기나 할까? 그녀가 날 보며 웃어주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젠장.”
더 빌어먹을 일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가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보고 싶었다.
하얀 얼굴이, 푸른 눈동자가. 웃는 얼굴도, 환자에 열중하는 얼굴도,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도, 모두. 모두 보고 싶었다. 같이 있고 싶었다.
“하아.”
그런데 그때였다.
똑. 똑.
“들어와도 되겠습니까, 전하?”
“들어오게.”
린덴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몇 잔 마시긴 했으나, 원체 술이 강한 편이기에 흔들림은 전혀 없었다.
“충성! 보급처의 로든 중령입니다.”
“그래, 어서 오게. 지시사항은 잘 전해 들었나?”
“네, 전하! 빠짐없이 면밀히 작성에 들어갔습니다.”
지시사항.
그건 엘리제가 부탁한 의료진을 보호할 보호구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전하께서 지시한 보호구는 특별한 문제 없이 곧바로 제작돼 보급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 때문에 저를……?”
로든 중령은 총사령관이 왜 따로 자신을 불렀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잘하라고.”
“네?”
“보호구 완벽하게 만들라고.”
“……!”
“그 어떤 의료진도 감염되지 않도록 제국군의 모든 기술력을 집약시켜 최선을 다해 만들어.”
그러며 린덴은 무겁게 말했다.
“만약 보호구에 문제가 있어, 그로 인해 한 명이라도 전염된다면 너에게 책임을 물겠다.”
“……!”
로든 중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총사령관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충성!”
그러고 로든 중령이 돌아가고 홀로 남은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닦달한다고 해서 전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저 불안하기에 그러는 것이다. 그녀가 혹시라도 병에 걸려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엘리제.’
그는 탁자에 내려놓은 진주 장식 십자가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아니, ‘론’에게 준 징표.
‘신이여.’
린덴은 당시 대부분 브리티아 인들이 그렇듯, 신의 존재를 믿긴 믿었다.
하지만 좋아하진 않았다.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날’ 모든 것을 잃었던 자신이 어떻게 신을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성서의 교리는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제, 그녀가 제발 무사하기를. 이 전염병 속에서도 아무런 탈 없기를.
<주여, 당신의 가호가 임하소서.>
그렇게 그는 목걸이 옆의 문구를 간절히 읽었다.
***
이후, 엘리제는 전격적으로 조처에 나섰다. 일단 정보부의 요원들과 함께 접촉력을 조사했다.
서대륙을 통틀어 군대에서 처음으로 행해진 역학조사였다.
그러고 조금이라도 감염 가능성이 있는 이들은 모조리 따로 격리했다.
기준은 그녀가 정한 프로토콜에 따랐다.
대상자는 많았다.
일단 검기사단의 단원들 전부. 그리고 중앙군의 부대 다수가 산발적으로 포함되었다.
“이런 격리는 무리입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격리하면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가 없습니다.“
몇몇 이가 반대를 표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강력히 밀어붙였다. 이런 전염병 통제는 어설프게 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구멍이 나기 시작하면, 마치 댐에 난 구멍처럼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고 그건 아웃브레이크, 대유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끝이었다.
전쟁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만, 어쩌면 십만이 넘는 사람이 죽을 것이다.
“어쩔 수가 없어요. 지금은 일단 제 지시에 따라주세요.”
“하지만…….”
“그리고 지금은 공화국군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에요.”
그렇다고 엘리제가 앞뒤 사정 안 가리고 무작정 격리를 강행한 것은 아니었다.
‘공화국군은 기다릴 거야. 우리 군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그 전에 괜히 대규모로 공격했다가 오히려 전염병만 옮으면 더 손해니까.’
그리고 다른 면도 생각했다.
‘차라리 군의 운영 측면에서도 잠재적으로 감염 가능성 있는 자들은 빼는 것이 나아. 전염병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정확한 판단이었다.
상당한 병력을 격리를 위해 빼내야 했지만, 잠재적으로 불안한 인원들을 제외하니, 오히려 남은 병력의 운영이 자유로워졌다.
전염병의 위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탓이었다.
사령부의 많은 사람이 그런 엘리제의 전격적 조처에 감탄하고 환영했다.
“역시 데임 클로랜스. 론도 대역병을 3일 만에 해결한 영웅답군요.”
“과연 이렇게 하면, 전염병을 확실히 차단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대로 군이 괴멸하나 걱정했었는데, 데임 클로랜스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이거 예비 황태자비가 아니셨으면 어쩔 뻔했소이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 엘리제를 감탄하며 바라봤다.
하지만 사람들의 감탄과 다르게, 엘리제의 진정한 전쟁은 지금부터였다.
격리 공간에 환자들을 따로 분류 후, 치료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환자가 몇 명이죠?”
“총 750명입니다. 야전병원에서 치료 중입니다.”
“격리 인원은요?”
“일만 명에 가깝습니다. 따로 격리 공간을 마련해 관리 중이고, 만약 중간에 초기 증상인 감기가 생기면 곧바로 병원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엘리제는 공간을 두 개로 나누었다.
첫째는 실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는 야전병원. 이곳에는 엘리제를 비롯한 자원 의사들이 머물며 치료를 했다.
두 번째는 환자와 접촉한 인원을 격리하는 공간. 이곳에서 머물다 의심 증상이 생기면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다.
두 공간 모두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했다. 전염병이 외부로 퍼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조치다.
기존의 야전병원은 새로운 전선인 프라바 근처로 옮겼다.
전선이 심페폴 근처로 남하함에 따라 애초에 병원 이전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질은 없었다.
‘이제 군 전체에 전염병이 퍼질 위험은 크게 줄었어.’
일단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상황, 일단 군 전체에 전염병이 퍼지는 대재앙은 막았다.
위험 요소가 있는 인원을 모두 격리한 덕분이었다.
만약 조사에 구멍이 있어 산발적으로 환자가 생기면, 지체없이 격리 공간으로 이송하고 접촉자를 추가로 격리했다.
그녀의 이런 조치들 덕에 전염병은 더 이상 제국군 내부에서 퍼지지 않게 되었다.
‘다행이야.’
사실 이것만으로도 대성공이었다. 최소 수만이 넘는 병력이 몰살당할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만족하지 않았다.
‘앞으로 할 일은 이미 발생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이야.’
현재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750명.
앞으로 잠복기가 지나 발병할 인원까지 고려하면 최소 1,000명 이상이 위험했다. 그들을 살려야 했다.
그렇게 엘리제는 다른 자원 의사들과 함께 환자를 치료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현대 지구에서도 출혈열은 무서운 병이다. 하물며 이 시대에는 출혈성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기술이 많이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한 일이었다.
체액이 튀면 의사들도 전염될 위험성이 있었으니까. 보호구를 입었다고 해도, 전염을 백 프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엘리제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자원 의사는 자신들이 전염될 것을 각오하고, 최선을 다해 환자를 진료했다.
물론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묵묵히 환자를 위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들이 의사(醫師)이기 때문에.
그래, 의사이니까.
환자의 생명을 살릴 권리와 책임이 있는 의사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