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1
3황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황태자비가 될지, 안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 게임이 끝나기 전에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어쨌든 그 마음은 감추고 3황자는 말했다.
“리제가 이 전염병이 공화국 때문에 퍼진 거란 잠정적 근거를 찾았어.”
그는 엘리제가 조사한 결과를 말해주었다.
“어때?”
“그렇군.”
린덴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감탄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엮어 넣을 수는 있겠군.’
공화국군의 포로로 잡혀 있다가 병에 걸린 무어인의 시중을 받고 전염병에 걸렸다. 그리고 곧바로 포로 교환을 통해 제국군의 진영으로 보내졌다.
이 정도면 거의 확실했다.
적당히 언론사를 통해 꾸며 발표하면 국제적인 이슈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루이 니콜라스와 공화국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반도에서의 명분을 상당수 잃을 것이다.
‘또 엘리제, 그녀의 도움을 받는군. 대단해.’
린덴은 그녀 생각을 하자 또 가슴이 시큰 아파왔다.
그날의 다툼 이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보고 싶었다.
‘솔직히…… 조금 거북합니다.’
이런 아픈 말을 들었음에도 말이다. 아무리 아파도 보고 싶었다. 빌어먹을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쉽군. 조금만 더 명확한 근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공화국 놈들이 그 무어인들이 병에 안 걸렸었다 둘러댈 수도 있으니 말이야.”
엘리제가 찾아낸 근거도 훌륭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증거가 있으면 확실할 것이다.
그래서 3황자가 말했다.
“그건 내가 해결하겠어.”
“어떻게?”
“그 무어인들의 시신을 구해오면 되겠지. 구해와 부검을 하면 되잖아.”
“……!”
린덴은 흠칫 놀라 미하일을 바라봤다.
그렇다. 시체를 구해와 부검을 통해 질병에 걸려 있었단 사실을 확인해내면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공화국의 포로로 있었던 맥과 잭을 감시했던 공화국의 병사를 매수해 알아냈어. 당시 시중을 들었던 무어인들이 며칠 안 돼 모두 사망했다고. 루이 니콜라스가 시체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명령해 교외의 별장에 그대로 버려져 있다고 해. 별장도 같이 버려진 채 방치 상태고.”
“그러면?”
“검기사단으로 그곳을 들이닥쳐 무어인들의 주검을 구해오겠어.”
린덴은 가만히 동생을 바라봤다.
“위험할 텐데?”
아무리 방치된 곳이라 해도, 적의 근거지 인근이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괜찮아. 알잖아? 나 검제야.”
“……!”
짧지만 강한 의미가 담긴 말.
그렇다. 그는 검제(劍帝). 전장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가만히 형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개인적으로는 평화주의자라 ‘복수’는 좋아하지 않지만 말이야.”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뼈가 있는 말.
“그래도 사막의 전갈. 그놈은 얄밉네. 한 방 먹여줘야겠어.”
“…….”
“어쨌든 그거 말하러 왔어. 출정 전 총사인 형님한테 신고해야 하니까 말이야. 충성! 사령부 직속, 검기사단과 중장 미하일. 심페폴 인근의 교외로 작전 수행하러 떠나겠습니다. 이상 보고 끝.”
미하일은 장난스럽게 보고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러면 금방 다녀올게.”
“……미하일.”
“왜?”
린덴은 짧게 말했다.
“조심해라.”
“……!”
그 말에 미하일의 표정이 잠시 사라졌다.
“그거 나한테 한 말 맞아?”
“그래.”
“왜? 농담이면 별로 재미없는데.”
미하일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하일. 난 너를 싫어하진 않아.”
“하지만 우린 적이지. 결코, 같이 살아갈 수 없는. 누군가 죽어야 하는.”
그건 조금 슬픈 말이었다.
“…….”
“나도 형님을 싫어하지 않아. 아니, 좋아해. 형님이 어릴 적 얼마나 귀여웠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
어린 시절, 큰형님인 지펠과 둘째인 린덴, 그리고 자신. 마지막으로 누이까지. 이 4명이 황궁 장미 정원에서 뛰놀던 시절을 미하일은 잊을 수가 없다.
아릿한 기억이었다.
물론 린덴은 큰형님인 지펠이 자꾸 괴롭혀 싫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미하일에겐 참 그리운 추억이었다.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은 공화국을 앞두고 휴전 중이지만, 우린 분명한 적이야. 물론 만약 내가 이길 경우, 난 형님을 죽일 생각은 없지만, 반대로 형님이 이길 경우, 형님은 날 죽이겠지. 안 그래?”
“난 널 죽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안 죽일 거야?”
린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했다.
“네가 ‘내가 하려는 일’을 막지 않는다면.”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그건 날 무조건 죽이겠다는 말이군.”
미하일은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불필요한 시간만 소모할 뿐이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미하일. 황위를 포기할 생각은 없느냐? 네가 이 정쟁에서 물러난다면 너에게 로마노프령을 주겠다. 그저 이름뿐인 공왕(公王)이 아닌, 너의 독립왕국으로 주겠어. 너의 자손들은 서대륙 북단 로마노프령의 오롯한 왕이 될 것이다.”
“……!”
엄청난 제안이었다.
동쪽으로는 얼음으로 덮인 극지에 둘러싸이긴 했지만, 로마노프령은 오히려 브리티아 섬 본토보다 넓고 알짜배기인 영토였다. 웬만한 열강들보다 로마노프령 자체의 저력이 더 클 정도.
그런 곳을 독립국으로 주겠다니?
하지만 미하일은 반문했다.
“내가 황위를 포기하면? 형님도 하려는 일 포기할 거야?”
린덴은 탄식했다.
“네가 내 입장이라면…… 너는 포기할 수 있겠느냐? 그날, 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 목소리에는 뼈저린 고통이 담겨 있어, 미하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미하일도 안다. 린덴이 결코 그 염원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미하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둘 모두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모두가 옳았다. 아니, 모두가 잘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싸움을 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뭐지?”
“2년 전, 큰형님 지펠. 형님이 죽인 거야?”
“지펠을 죽인 것은 사막의 전갈과 공화국군이다.”
“그래서. 죽였어?”
린덴은 가만히 미하일을 바라보다 답했다.
“난 그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 원하지 않았군.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만 가볼게.”
“그래.”
그렇게 두 형제는 대화 후 헤어졌다. 길거리의 먼지보다도 가치 없는 대화였다.
***
미하일은 곧바로 검기사단을 움직였다.
추악한 계획에 동료를 잃은 기사단의 분노는 컸다. 마치 범이 토끼 무리를 덮치듯 몰아쳤다.
특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검제의 검은 공포 그 자체였다.
공화국군은, 그리고 검기사단의 기사들은 그가 왜 동방에서 오존(五尊), 검제(劍帝)란 존칭을 받았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공화국군의 얄팍하게 쳐진 방어선을 뚫고, 곧바로 별장에 도착한 그들은 문제의 무어인들의 시체를 수거했다.
물론 전염을 우려해 직접 손을 대지 않고, 겹겹이 안전장치로 싸서 운반했다.
그들의 가공한 급습에 혼이 빠진, 별장 근방의 공화국 수비대는 그들을 감히 쫓을 생각도 못했다.
어차피 말을 타고 쫓아가 봤자 잡을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이 무어인들에게서 전염병이 옮은 것이 분명합니다.”
특별히 로마노프령에서 초빙받아 제국 군진에 머물고 있던 부검의는 무어인들의 주검을 보고 단번에 결론을 내렸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미 부패가 시작된 지 한참 된 시신이지만, 전신 여기저기에 출혈 자국이 흥건했으니까. 특히 부검 결과 폐에는 피가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추악한!”
“아무리 전쟁이라도 이런 짓을 하다니!”
제국군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다.
현대로 갈수록 전쟁이 무자비해지긴 하지만, 아직은 전장에서 여성과 민간인에 대한 존중과 기사도가 남아 있는 시대였다.
“공화국군을 무찔러라!!”
“적들을 용서하지 말아라!!”
제국군 모두가 공화국군에 대한 적의로 불타올랐고, 이는 사기진작으로 이어졌다.
반대로 공화국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공화국의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
“니콜라스 각하가 그런 비인도적인 계책을 썼다고? 아니야. 믿을 수 없어. 모두 제국군, 공제(空帝)의 수작 아니야?”
“하지만…… 제국군에서 증거를 들이밀던데.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삼는 공화국이다.
공화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와 평등이란 진보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그 자유와 평등에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이 포함된다.
그런데 그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자신들의 군대가 아무리 적이라지만, 전염병을 퍼뜨리는 추악한 짓을 하다니!
크게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래로부터 내려온 진리처럼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공화국군은 분노에 찬 제국군의 총검 돌격을 당해내지 못했고, 여기저기서 패배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만족할 생각은 없지.’
린덴은 차갑게 생각했다.
루이 니콜라스, 그놈 때문에 엘리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전염병을 치료해야 했다.
다행히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그 시간 동안 그는 미칠 만큼 그녀를 걱정해야 했다.
그건 정말 끔찍한 고통이었다. 하루하루, 그녀가 잘못될까 봐 타는 듯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그는 자신에게 그런 끔찍한 고통을 안겨준 니콜라스를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전쟁은 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란 걸 보여주마.’
확실히 그는 사막의 전갈보다는 기기묘묘한 책략에서는 뒤처졌다.
하지만 사막의 전갈이 전쟁만 아는 위인이라면, 그는 황제의 권한을 위임받아 제국을 운영하는 거인(巨人)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전방위적으로 공화국군을 압박하면서, 동시에 정략적으로 사막의 전갈을 흔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언론.’
제국의 황태자인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언론은 수도 없었다.
브리티아 황실은 제국의 언론사들은 물론이고, 타국의 언론사에도 어느 정도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이런 비인도적인 핫이슈는 굳이 뒷공작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각국의 언론사에 객관적인 정보만 가져다줘도 신나서 기사를 써댔다.
[공화국의 사막의 전갈. 악마의 계책을 사용. 인간으로서의 선을 넘어.]
[앞에서는 정의를 수호하는 공화국. 뒤에서는 전염병을 제국군에 퍼뜨리는 만행을 저지르다.]
[자유와 평등은 과연 누구를 위한 기치인가? 과연 공화국군은 자유와 평등을 수호한다 말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유의 기사가 서대륙 전체에 퍼졌다. 특히 공화국의 언론은 벌집처럼 뒤집어졌다.
공화국의 수도, 파리스의 시민들은 신문 기사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렸다.
“아니, 이게 정말이야? 우리 공화국군이 이랬다고?”
“거짓말 아니야?”
아무리 루이의 아버지, 시몬 니콜라스가 30년간 철혈의 독재를 펼치고 있다지만, 프랑소엔은 기본적으로 ‘공화국’이다. 신분의 차별이 없고 만인이 평등한.
따라서 정치인부터 뜻있는 지식인, 자유를 추구하는 일반 시민들까지 니콜라스 가문의 독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는 수도 없이 많았고, 이들이 불처럼 일어났다.
더구나 이번 비인도적인 계책 말고도, 최근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사막의 전갈 아닌가?
“루이 니콜라스는 지금까지의 패전을 책임지고 물러나라!”
“국제 전쟁법을 위반한 루이 니콜라스는 당장 본국으로 돌아와 재판을 받아라!”
루이에 대한 반대 성명이 강하게 터졌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