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3
한편 엘리제는 본인이 기안한 순회진료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데임. 저희를 위해 이렇게나.”
“이 먼 곳까지 직접 와주시다니.”
한 병사가 감동해 말했다.
부상을 당했다고 모두 병원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선의 여러 사정상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이들에게 엘리제는 천사나 다름없었다.
‘저렇게 여린 몸으로 이 험한 곳까지 오다니. 우리를 위해.’
병사들은 감동한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저 작은 몸으로 이런 헌신이라니.
더구나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 아닌가? 그럼에도 흙먼지가 날리고, 피가 낭자한 전선에서 환자들을 돌보는데 거리낌이 없다.
병사들은 그녀, 등불을 든 여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칭송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제 본인은 그런 감탄을 듣고는.
‘아니야. 난 이런 칭찬을 들을 자격이 없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숭고한 뜻으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녀가 이 순회진료에 매진하는 이유.
그건 린덴이 짐작한 대로 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아, 이렇게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데.’
그녀도 알고 있다.
그를 무작정 외면하는 게 답은 아니란 것을.
하지만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무서워.’
지난 삶,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목숨보다도 더 깊이,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고통스러운 사랑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과거 천성이 악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철저히 외면당하지 않았으면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사랑을 겪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망가졌을까? 단두대에 처형당할 정도로?
물론 안다.
이번 삶은 지난 삶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두려웠다.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던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내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가 환자 치료에 열중했던 것은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점도 일부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결국, 그와 결혼하게 되더라도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단코 흔들리지 않겠다고.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솔직히 조금…… 거북합니다.’
그 말을 했을 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파하는 눈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떠오르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에게 생일 선물을 내밀던 일. 지난밤 등 뒤에서 자신을 부드럽게 안았던 일.
그리고 그저 서 있는 얼굴 등.
끝없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아무리 몰아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하아.”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자신이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뚱하니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웬 한숨이냐?”
“큰오라버니?!”
한 자루의 보검처럼 차갑고 아름다운 외모.
렌 드 클로랜스 남작이었다!
“여기는 웬일이세요?”
“웬일은. 여기가 우리 부대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지금 방문한 부대는 다름 아닌 총기사단과 그 휘하 연대였다. 렌이 부단장으로 있는.
“네가 대령이라니. 말세군.”
렌은 혀를 차며 그녀의 계급장을 살폈다.
대나무 3개. 로열 나이츠의 부단장인 렌과 동일한 계급이었다.
그 심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에 엘리제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게요.”
그녀도 자신의 계급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배려였지.’
그때는 잘 몰랐지만, 이건 그의 배려고 선물이었다.
군대는 여러 특성상 계급이 낮으면 일 처리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온 파격적 처치들은 계급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진행이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하아.”
또 그의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요즘 그녀의 머릿속에선 그가 떠나갈 때가 없었다.
그 사실이 참 답답하고 싫었다.
“뭘 그렇게 계속 한숨이야? 어린것이.”
렌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큰오라버니는 잘 지내셨어요? 한 번도 저 보러 안 오시고.”
“내가 널 왜 보러 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싸우는 것도 바쁜데.”
큰오빠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엘리제는 배시시 웃었다.
황태자 때문에 마음은 답답했지만, 큰오라버니를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하나뿐인 여동생인데, 좀 따뜻하게 말해주면 안 돼요? 그렇게 불친절하면 여자들 다 도망가요.”
“여자 따위 관심 없다.”
참고로 렌은 황태자와 더불어 론도의 천연기념물이었다.
연애는커녕 여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그러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가 큰오라버니 언제 결혼할지 걱정이 태산인데…….”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왜?”
“오라버니는 고민이 있을 때 어떻게 하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그럴 때가 있잖아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그럴 때 어떻게 하세요?”
답을 바라고 한 물음은 아니다.
그저 답답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막막한 마음으로 한 물음이었다.
그런데 큰 오라버니가 엉뚱한 답을 했다.
“총을 쏜다.”
“……네?”
“권총 꺼내봐. 지금.”
“네?”
엘리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고민을 물었는데, 웬 총?
하지만 렌은 단호하게 재촉했다.
“빨리. 설마 안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겠지?”
“그, 그건 아니에요.”
권총을 어디 두었더라? 원체 신경을 안 써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녀는 왕진 가방 안을 한참 뒤지고 나서야 7연발 리볼버를 찾아냈다.
그 소홀한 모습에 렌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뭐라고 했어? 전장에서 총은 생명이라고. 만약 지금 갑자기 적이 나타났으면 넌 그냥 죽은 목숨이야.”
“…….”
맞는 말이어서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물론 속으로 입술은 살짝 내밀었다.
‘오라버니는 고민 상담은 안 해주고, 웬 총이야?’
그런데 렌은 더욱 가관인 요구를 했다.
“쏴봐.”
“네?”
“저기 나무 끝에 튀어나온 부분 있지? 맞춰봐.”
“……농담이죠?”
갑자기 웬 총질을 하라고?
그러나 렌은 농담하는 것이 아니었다.
“빨리. 아니면 벌써 총 쏘는 법 잊어버린 것 아니겠지? 그렇게 가르쳤는데.”
결국,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고 총을 겨누었다.
‘이게 뭐하는 건지.’
타앙!
높은 굉음과 함께 그녀에게 강한 반동이 전해졌다. 엘리제는 렌에게 배운 대로 그 반동을 견디고 표적을 바라봤다.
명중!
총알은 표적을 정확히 꿰뚫었다.
렌이 입술을 비틀었다.
“더 쏴봐.”
“또요?”
“그래. 저기 저쪽에 튀어나와 있는 것들 표적으로 하면 되겠다.”
엘리제는 그 말에 따랐다.
타앙! 타앙!
갑작스레 조용한 전장에 총소리가 울리고, 총기사단의 병사들이 놀란 얼굴로 소녀를 바라봤다.
“예비 황태자비께서 총을?”
그냥 쏘는 것도 아니었다.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명중이었다.
엘리제는 모든 것을 잊고 표적만 바라봤다. 높은 고음이 울리며 총의 반동이 전해질 때마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고도의 긴장과 묘한 시원함이었다. 마치 잡념을 총에 실어 쏘아 보내는 듯했다.
‘이래서 총을 쏴보라 한 건가?’
그렇게 7발의 탄을 다 쏜 후, 엘리제는 총을 손에서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나쁘진 않군.”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명중률이 극악한 권총으로 백발백중이라니. 이 정도면 권총의 명사수라 할 만했다.
엘리제는 오빠에게 칭찬받은 동생의 기분이 되어 으쓱했다.
“오라버니도 알겠지만, 원래 제가 손재주가 있다고요.”
렌은 피식 웃었다.
“총을 쏠 때 명중시키려면 어떻게 해야지?”
“손이 흔들리지 않아야죠.”
“아니, 그전에 눈은?”
“표적을 주시해야 해요. 총을 쏘기 전부터, 방아쇠를 당긴 후까지도.”
사격의 요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표적을 응시하는 것이다.
방아쇠를 당기는 중, 표적에서 눈을 돌리면 절대 맞지 않는다.
“그래, 정확하다.”
그러며 렌은 동생을 바라봤다.
“난 고민도 그렇게 해결한다.”
“……!”
“살다 보면 막막한 고민이 많지. 잘 해결 안 되는 일도 많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고. 그럴 때마다 난 그 일들에 정면으로 마주했다.”
“…….”
“외면하고 도망가기만 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으니까.”
엘리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외면하고 도망가는 것.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군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오라버니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도망가지 말고 직시하라고? 나는 어떻게 해야지?
“하아.”
렌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동생을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가보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잘 해결하고.”
“네, 꼭 몸조심하세요.”
“너야말로. 총은 꼭 몸에 가지고 다니고. 이번처럼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두면 혼날 줄 알아라.”
혀를 차며 하는 말에 그녀는 입술을 내밀었다.
“사령부 인근 야전병원에 있을 때는 안 가지고 있어도 되죠?”
“아니, 그때도 항상 가지고 있어.”
“왜요? 어차피 거기까지 공화국군이 쳐들어올 일은 없잖아요.”
렌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
“아무리 우리가 이기고 있다지만, 전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느 순간, 어디서 적이 출현할지 모르는 게 전쟁이야. 그러니 항상 가지고 있어.”
그러며 그는 덧붙였다.
“물론 나도 네가 그 권총을 사용할 일은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네가 그 권총을 사용한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는 뜻이니까.”
***
한편 그때, 공화국군의 근거지, 반도의 수도 심페폴.
사령부로 사용하는 시청사에 칼날 같은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꼭 이 작전을 사용해야겠습니까, 각하?”
파비앙이 무겁게 물었다.
그 반대 의사가 담긴 발언에 한쪽 얼굴에 기다란 수술 자국이 나 있는 루이 니콜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
“아니면? 파비앙, 네놈에게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냐? 빌어먹을 제국 놈들을 엿 먹일 수 있는 방법 말이야!”
버럭 화를 낸 그는 얼굴의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이번 작전이 끝나기만 하면.’
루이는 자신에게 이런 상처를 안겨준 엘리제를 떠올렸다. 이 작전만 끝난다면,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손에 떨어지리라.
한편 파비앙은 입을 다물었다.
‘전술 자체는 좋아.’
이번에 루이 니콜라스가 고안한 전술은 훌륭했다. 아마 이번에야말로 제국군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적을 기만할 방법이었다.
‘하아.’
파비앙은 한숨을 내쉬었으나, 늘 그렇듯 그에겐 권한이 없었다. 그저 루이의 명을 수행할 뿐.
“빨리 미끼를 불러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곧 나타난 이는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장교였다.
“충성! 피에르 중위입니다! 각하를 뵙습니다!”
피에르 중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단순히 총사령관을 대면한다는 긴장감은 아니었다.
이번 작전에 그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래, 피에르. 잘 왔어.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나?”
“그렇습니다, 각하!”
피에르 중위는 딱딱하게 굳어 답했다.
“그래, 나도 이런 명령을 내리게 되어 마음이 좋지 않군. 하지만 이해하고 있겠지? 자유와 평등을 이루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단 것을.”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는 총사령관의 말에 피에르 중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죽어줄 수 있겠지, 중위?”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