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6
프라바 인근의 야전 병원은 항상 그렇듯, 부상병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엘리제와 의료진들이 건물 안에서 환자를 치료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엘리제를 보조하고 있던 제이가 창밖을 보고 놀라 말했다.
“어, 눈이 내려요. 데임.”
“그러네요.”
제이의 말에 엘리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눈이라니. 다른 나라들은 이제 슬슬 봄기운이 올 때인데.’
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하늘이 슬퍼하는 탓일까? 봄이 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직도 한겨울처럼 추웠다.
이러다 정말로 봄 없이 덥고 습한 여름이 곧바로 올지도 모르겠다.
‘병사들이 고생하겠네.’
그녀는 사령부를 떠나 작전을 나간 병사들을 떠올렸다. 한창 진군 중에 눈이 오니, 애로가 많을 것 같았다.
‘그는…… 괜찮겠지?’
그녀는 또 자신도 모르게 그를 생각했다.
원체 중요한 작전이기에 황태자인 그도 직접 친정하였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괜찮겠지?
그러다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또. 또 생각했어.’
요즘 그녀는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그가 비집고 들어왔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봤다.
병원 근처에 쌓인 새하얀 눈은 밝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곧 이곳에서 일어날 일은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한편 그때, 린덴도 눈을 맞고 있었다.
“눈이 오는군요.”
“그렇군.”
“길이 어려워지기 전에 조금 더 속력을 내야겠습니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프라바도 눈이 오려나? 엘리제는 괜찮겠지? 따뜻하게 입어야 할 텐데.’
정신없이 환자를 볼 때 그녀는 아무렇게나 입고 진료를 한다. 부상자들이 끝없이 밀려드는데, 옷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였다.
린덴은 그런 그녀가 얇게 옷을 입었다가 눈을 맞으며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몸은 왜 그렇게 약한지. 다음의 청에 나가 있는 영사에게 명해 보약이라도 구해야겠어.’
이왕이면 청의 황제가 먹는 최고급의 걸로 구해야겠다. 그녀에게 아무거나 먹일 수는 없으니까.
‘려(麗)의 홍삼도 좋다고 하던데. 그것도 구해야겠군. 그런데 려에는 영사가 없는데 어떻게 구하지? 뭐,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
어차피 구하는 거야 아랫것들이 할 일이니까.
‘이번 전투만 끝나면 본국에 연락해 당장 구하라 해야겠어.’
그렇게 그는 그녀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전투.’
그는 생각을 돌렸다.
‘정말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뭔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계속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근거도 없이 불안한 기분.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정찰대를 먼저 보냈으니, 곧 돌아오겠지.’
그는 계속 불안한 기분이 들어 정찰대를 작전 지역으로 먼저 보냈다. 뭔가 이상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필의 말을 번갈아가며 죽으라 달릴 그들은 곧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전하! 각하!”
과연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군영 멀리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정찰대의 기병이었다! 기병은 죽을힘을 다해 작전 구역까지 달려왔는지, 전신이 땀에, 핼쑥한 얼굴이었다.
“……!”
린덴은 기병을 본 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기병의 표정이 굉장히 다급했던 것이다.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린덴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찰 결과는?”
“큰일 났습니다!”
“……!”
“지금 목적 지역과 적 진군 예정지를 정찰했는데...!!”
그러고 정찰대의 보고를 들은 린덴과 맥가일 원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완전히 당했다!
없었다. 적이 향할 것이라 예상했던 목적지에도, 그리고 예상 진군로에도.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적 장교가 자살까지 하며 지키려던 작전 기밀은 다름 아닌 사막의 전갈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제길! 멍청한!’
린덴은 불안한 감을 무시한 자신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수하 장교를 자살시키면서까지 적을 속인 전갈의 비정함을 욕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큰 피해를 입기 전, 적의 진정한 목적을 파악해야 했다.
‘3군단이 목적이 아니었어. 그러면 진짜 목적은?’
곧바로 답이 떠올랐다.
‘사령부인 프라바!’
그들이 떠남으로써 비어버린 프라바가 분명했다.
바로 엘리제가 지금 있는!
‘안 돼, 엘리제!’
지금 프라바에 있는 병력은 2,000명에 불과했다. 적들의 전면공격을 받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지금 당장 프라바로 회군한다. 빨리!”
“네, 전하!”
린덴은 회중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늦지 않았어. 아니, 늦지 않았어야 해.’
그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 정보를 늦지 않게 얻었다는 점이다. 그가 무리해서 정찰대를 독촉한 탓이었다.
만약 정찰대를 빨리 보내지 않았다면, 아예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다행히 멀리 나오진 않았어. 전속력으로 돌아가면 어쩌면 늦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엘리제……! 꼭 무사해야 한다! 꼭!’
아득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그녀가 만약 잘못된다면, 그는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제발!’
***
무언가 잘못됐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밤이 되기 전, 늦은 오후였다.
콰앙!
“……?!”
땅이 울리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
야전병원의 모두가 흠칫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대포 소리 같은데? 왜 대포 소리가?”
한 남자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령부의 수비병들이 훈련을 하나?”
“그러겠죠? 혹시 들은 것 있으신가요, 데임?”
엘리제도 알고 있는 바가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콰앙!
다시 한 번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터졌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가까웠다.
“꺄악!”
제이가 깜짝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놀란 표정을 했다.
그리고!
타당! 타앙!
“크악! 공화국군이다! 경보를 울려!”
“아악!”
갑작스러운 총소리와 비명!
엘리제의 안색이 하얘졌다. 갑자기 공화국군이라니? 이곳 프라바에?
그녀는 다급히 병원 3층의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밖을 내다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눈에 닿는 모든 곳이 푸른 제복의 공화국군이었다.
특히 가슴에 판금 갑옷을 입은 흉갑기병대, 큐래시어(Cuirassier)가 제국군 군영에 돌격해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제국 병사를 도륙하고 있었다.
“크아악!”
“죽어라, 제국 놈들!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그리고 전면에서 그들을 지휘하는 한 남자.
‘사막의 전갈!’
부상을 당했는지, 한쪽 얼굴에 흉측한 상처가 나 있었지만, 그가 분명했다.
그는 악마 같은 눈으로 병사들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속았구나!’
그녀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정확한 정황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알 수가 없지만, 적에게 역습을 가하려 떠난 린덴과 사령부는 저 사막의 전갈의 기만술에 속은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적이 코앞까지 닥치다니. 그녀의 손이 두려움에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침착하려 애썼다.
‘정신 차려, 엘리제. 너는 이 병원, 의무부대의 장이야. 전투가 벌어졌으니, 내가 이들을 챙겨야 해.’
제국군이 저들을 물리쳤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일단 숫자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못해도 2만은 되어 보이는 병력이다.
특히 제국의 총기사단과 비견되는, 공화국의 최정예, 흉갑기병대만 5,000명이 넘어 보였다.
‘어떻게 하지? 침착히 생각해. 내가 이들을 살려야 해.’
그녀는 자신 밑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제이, 그레이엄 남작, 그리고 수많은 의사와 간호원들.
모두 자신을 돕기 위해 머나먼 브리티아에서 이곳까지 자원 온 이들이다. 최소 이들은 모두 무사히 살려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데 그때였다.
벌컥!
그녀가 있는 방의 문이 와락 열렸다. 엘리제는 적인지 알고 깜짝 놀라 허리춤의 권총을 부여잡았다.
“데임!”
하지만 다행히 공화국군이 아니었다.
붉은 제복을 입고 있는 제국군 장교였다.
“공화국군입니다. 도망가야 합니다!”
총이라도 맞았는지 그 장교는 어깨 한편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급한 얼굴.
엘리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황이 많이 안 좋나요?”
“네, 흉갑기병대의 돌격에 방어선 대부분이 무너졌습니다. 이곳 프라바는 이미 끝났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버틸 테니 데임이라도 빨리 도망가십시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지?’
장교가 다시 재촉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도망가십시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도망은 못 가요. 저는 이 병원의 책임자예요.”
“데임!”
이름 모를 장교는 버럭 소리를 높였다.
“물론 아랫사람과 환자를 생각하는 데임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데임의 그 숭고한 뜻에 여러 차례 감명받았고요!”
“……!”
“하지만 데임께서는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이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실, 그 누구보다도 지고한 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죽는 것보다, 데임이 무사히 탈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빨리 도망가십시오!”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도 안다. 자신은 단순한 귀족가의 영애가 아니다.
작게는 재상가의 딸이며, 크게는 황태자비가 될 여인이다.
또한 현(現) 제국군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인사이며, 병사들에게 가장 많은 존경과 은애를 받는 여인이다.
그러니 이곳 프라바의 누구보다도 적에게 잡혀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반드시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어차피 도망갈 수 없어.’
이건 쓸데없는 고집이 아니었다.
그녀는 냉정히 판단했다.
‘내가 저 흉갑기병대를 따돌리고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해.’
승마를 배웠지만, 권총 사격만큼 능숙해지진 못했다. 그저 남들만큼 달릴 수 있는 정도다.
반면 저들, 흉갑기병대는 기마술의 최고 달인들이었다. 그리고 기마 사격에도 능숙했다.
저들을 뒤에 두고 도망쳐 봤자, 1㎞도 못 가고 잡힐 것이다.
‘어차피 잡힐 거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해.’
그녀가 해야 할 일.
그건 바로 병원의 사람들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병사가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
“데임!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
“적 사령관, 루이 니콜라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 야전병원으로 오고 있습니다! 데임을 잡으러!”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나를 잡으러 오고 있다고? 그 사막의 전갈이?
‘끝이구나.’
그가 직접 온다면 정말 벗어날 방법은 없다고 봐야 했다.
자신은 분명 포로로 공화국에 끌려갈 것이다. 어쩌면 그의 계책을 여러 번 방해한 괘씸죄로 고초를 당할지도.
‘루이 니콜라스.’
그림 같은 외모에 독사 같은 속마음이 담긴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녀는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두려웠다. 그에게 잡혀가기 싫었다.
하지만 루이 니콜라스가 자신에게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 순간.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두려웠지만 벌벌 떨며 책상 밑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그녀에겐 이 순간 책임져야 할 이들이 있었으니까.
자신이 설사 포로로 끌려가더라도, 최소한 제이와 그레이엄을 비롯한 의료진들은 구해야 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가락에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닿았다.
7연발 리볼버(Revolver).
큰오라버니가 그녀에게 준 선물이었다.
드디어 이 선물을 사용할 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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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06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