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2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7
“사령부 점령했습니다!”
“적의 방어선은 모두 무너졌습니다!”
“주요 진지 모두 점령했습니다!!”
공화국의 병사들이 속속 보고 하였다. 사령부가 점령됐으니, 프라바는 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지금 루이 니콜라스의 최고 관심사는 사령부의 점령이 아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등불을 든 여인은?”
“네?”
“등불을 든 여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놓치면 안 된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공화국 장교가 떠듬떠듬 답했다.
“충성! 알겠습니다!”
곧 그녀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사령부 인근의 야전 병원.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 근처에 있군.’
루이 니콜라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드디어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 몇 번이고 치욕을 안겨주었던 그녀를!
‘전갈 사냥꾼이라고?’
그는 최근 들어 그녀가 듣고 있는 별명을 떠올렸다. 그에게 끔찍한 치욕을 주는 별명.
이제 이 치욕을 갚아줄 때가 왔다.
“내가 직접 가겠다.”
그는 비틀린 목소리로 말했다.
***
사막의 전갈을 만나기 전, 엘리제는 제복을 가다듬었다. 이곳의 책임자로 적 사령관을 만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엘리제는 거울을 봤다.
붉은 제복 가슴 편에 그녀의 신분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국군 의무사령관.
클로랜스 대령.
이 직위를 내려준 그가 떠올랐다.
‘그는 괜찮겠지? 함정은 이쪽이었으니.’
아무리 전갈이어도 공화국군의 여력상 양쪽에 모두 함정을 파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안전할 것이다.
‘왜 나를 흔들어서.’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웃으니 예쁘지 않으냐. 가끔 내 앞에서도 그렇게 웃도록 하여라.’
‘생일 축하한다. 제대로 못 챙겨서 미안하다.’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왜 너는 네 생각만 하는 거야?! 이 이기적인!’
그의 말들이 떠올랐다.
‘왜 나를 흔들어서…….’
이런 순간까지 생각나게 하는 걸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제 못 볼 수도 있겠지?’
이제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전쟁에서 포로의 처우는 전적으로 포획자에게 달려 있으니까.
공손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다 종전 후 포로 교환을 통해 본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지금껏 전해 들은 사막의 전갈의 무자비한 성격상 그런 꿈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전술가적인 면모와 별개로 그의 추악한 성품은 유명했다. 이전 삶, 론도 사교계에 있던 자신의 귀에도 몇 번이고 생생히 전달될 정도로.
‘바보 같아.’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껏 그에게서 도망 다녔다. 지금도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은 그가 무서웠으니까. 이전 삶, 자신을 파국에 이르게 한 그에게 다시 빠지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제 앞으로 못 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그가 보고 싶었다.
또륵.
가슴이 울렁거리며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다급히 그 눈물을 닦았다.
‘약해지지 말자, 엘리제.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잖아.’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창밖을 통해 서쪽을 바라봤다. 브리티아 섬이 있는 방향이다.
‘아버지, 오라버니, 어머니. 이렇게 되어서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가족들에게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귀국하면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을 속으로 미리 말했다.
‘사랑해요. 정말로.’
그렇게 마음속 인사를 한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이제 결전의 때였다.
엘리제는 방을 나서, 2층으로 내려갔다. 2층의 위치한 병원 회의실에는 제이, 그레이엄을 비롯한 의료진들이 모여 있었다.
“어떻게 하죠, 데임?”
제이가 벌벌 떨며 물었다. 그녀뿐이 아니었다. 의료진들 모두가 자신들에게 어떤 운명이 닥칠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저, 저. 죽고 싶지 않아요. 흐윽. 흑.”
어린 제이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엘리제는 본인도 불안하고 떨리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속마음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남을 안정시키기 위한 미소다.
“걱정하지 마요, 제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 그럴까요?”
“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엘리제는 다른 의료진들을 돌아봤다.
“지금까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
“선생님들 덕분에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어요. 만약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전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작별인사. 마지막 감사 인사였다.
이제 이들과는 이번이 마지막이리라.
그녀는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으나 참았다.
“선생님들께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선생님들은 전투와 상관없는, 인도주의적인 치료를 위해 온 의료진이니까요.”
제이가 훌쩍이며 물었다.
“데, 데임은요? 데임은 어떻게 하시게요?”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적들이 엘리제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사실을.
엘리제, 작은 소녀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레이엄을, 자신을 항상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는 까칠한 선생을 바라봤다.
“선생님, 지금까지 항상 감사했습니다. 처음에 테레사병원에서 정체를 숨겼던 것은 다시 한 번 죄송하고요.”
“……데임.”
그레이엄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작은 소녀는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명했다.
“의무사령관, 대령 클로랜스. 그리고 제국의 예비 황태자비로서 여러분께 명합니다.”
“……!”
“지금 이 시각 부로 이곳 회의실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아래에서 어떤 소란과 비명이 들리더라도.”
모두의 눈이 커졌다. 지금?
“데임?”
“반론과 질문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회의실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
그러고 엘리제는 등을 돌려 회의실에서 나왔다.
뒤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불렀으나, 외면했다.
이제 사막의 전갈을 맞을 차례다.
‘잘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다.
벌써 이렇게 다리가 떨리는데. 그를 직접 만나면 얼마나 두려울까.
하지만 해내야 한다. 어차피 잡혀갈 거면 저들과 환자들의 안전이라도 얻어야겠다.
그녀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중간에서 멈추어 섰다.
계단 난간 너머로 병원의 중앙 복도와 입구가 보였다.
‘이제 곧.’
그녀는 사막의 전갈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익! 콰당!
병원의 정문이 거칠게 열리며 푸른 제복의 공화국군이 들이닥쳤다!
숫자는 대략 10여 명. 그중 가운데 서 있는 남자와 그녀의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였다!
얼굴이 퉁퉁 붓고, 기다란 흉이 나 이전과 전혀 다른 인상이었지만 그가 분명했다.
두근두근.
엘리제의 가슴이 두려움과 긴장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그 떨림을 멈추게 하려고 허리 뒤에 숨긴 차가운 리볼버를 움켜쥐었다.
“호오?”
한편, 사막의 전갈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병원 건물의 끝과 끝이어서 거리가 상당했지만, 워낙 조용한 공동이었던 탓에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게 누구야?”
비릿한 미소.
“제국의 영웅, 엘리제 아닌가?”
사막의 전갈은 과장되게 손을 펼치더니 인사를 올렸다. 장난스럽게. 조롱하듯.
“보고 싶었소. 나를 몇 번이고 엿 먹인 제국의 여인이여.”
“……!”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꿈속에서도 엘리제, 그대를 만나게 되더군. 이제 드디어 그 여한을 이루었군.”
그 적의가 가득한 인사에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엘리제가 아닙니다.”
“뭐?”
“저는 니콜라스, 당신에게 제 이름을 부르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저의 직책은 제국군 삼군사령부 휘하 의무사령부의 장. 클로랜스 대령이라 부르십시오.”
“…….”
루이 니콜라스는 그녀의 딱딱한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 아니, 클로랜스 대령?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나 보군, 쿡쿡.”
“…….”
“좋아. 좋아. 역시 이렇게 나와야지. 날 몇 번이고 엿 먹인 여인인데 말이야. 벌벌 떨며 장롱에 숨어 있기라도 했으면 크게 실망할 뻔했는데, 역시 기대대로야.”
그는 뭐가 그렇게 유쾌한지 허리를 숙여가기까지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실제로 그는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어찌 안 기쁘겠는가?
크림에 와서 계속해서 패해다가 처음으로 제국군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고, 더구나 이 ‘전갈 사냥꾼’이라 불리는 여인도 손에 넣게 되었는데.
“뭐, 자신의 처지는 심페폴에 끌려오면 알게 되겠지. 하나만 미리 알고 있으라고. 제국의 예비 퍼스트레이디라고, 공화국에서도 퍼스트레이디 대접을 해줄 거라 기대하면 안 된단 사실을.”
루이는 빙글 웃었다.
“그나저나. 클로랜스 대령, 그대는 여전히 아름답군.”
“……!”
그는 제복을 입은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 엘리제는 독사가 몸을 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년 제국의 탄신연회 때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었던 그대도 아름다웠지만, 지금 제복을 입은 그대는 뭐랄까. 강렬한 매력을 풍기는군. 남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 말이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민망한 말을 내뱉었다.
심페폴로 돌아가 저 아름다운 소녀를 농락할 생각을 하니 흥분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자신에게 몇 번이고 패배를 안긴 저 소녀가 눈물 흘리는 모습은 얼마나 짜릿할까? 상상만 해도 흥분되었다.
‘포로 교환? 웃기지 마. 저 소녀는 내 전리품이다. 영원히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한걸음,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10여 명 공화국 병사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미 다 끝난 전투고, 연약한 여인을 잡는 일이라 그들의 태도는 느슨하기 그지없었다.
“그거 아나? 내가 대령, 그대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
“이렇게 보게 되어 정말 기뻐.”
그런데 엘리제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의 소름 끼치는 말들에 몸서리치지도, 뭐라고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루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 기이한 반응에 루이가 의아함을 품을 무렵.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20m.
조금은 먼, 하지만 가장 적절한 거리에 이르렀을 때.
“나, 제국군의 의무사령관 클로랜스 대령이 공화국의 니콜라스 원수에게 협상을 제안합니다.”
“……협상?”
루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대령, 협상이란 단어의 뜻을 잘 모르나 보군. 협상은 서로 동등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야. 아니면, 서로 걸 조건이라도 있거나.”
“걸 조건은 있습니다.”
“호오?”
전갈은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역시 등불을 든 여인. 마지막 순간까지 날 즐겁게 해주는군. 그래, 들어보기나 하지.”
어차피 다 잡은 물고기. 루이는 너그럽게 말했다.
“제가 원하는 내용은 이곳 병원의 의료진과 환자들의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특히 병원의 의료진들은 포로로 잡지 말고, 곧바로 제국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걸 조건은?”
어려운 사항은 아니지만, 굳이 들어줄 필요도 없는 부탁이다.
“제가 걸 조건은.”
그 순간 엘리제는 가만히 루이의 얼굴, 정확히는 미간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진동하는 심장을 억누르며!
그 심상치 않은 눈빛에 루이가 흠칫하는 순간,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철컥!
“……!”
그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공화국군 병사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질 때.
엘리제가 가만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차가운 리볼버가 들려 있었다.
“루이 니콜라스, 당신의 목숨입니다.”
“……!”
기다란 병원 복도 사이에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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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07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