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94화 (94/194)

00094  4-1 탈출  =========================================================================

4막 - She and He, He and She

1장 탈출 - 1

“레이디께서는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실 분이 아닙니까? 아무리 지금은 전쟁 중이라지만, 브리티아의 황실을 무시할 수는 없죠.”

“그래도…….”

그렇다 쳐도 대우가 과했다.

마치 호텔 같은 방의 시설. 그녀에게 제공된 옷도 화려하진 않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고가의 일상복이다. 제공되는 식사도 부족함이 없고.

적진만 아니면 휴가를 온 듯한 대우였다.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샤를이란 친구를 아십니까?”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이름이다.

“……잘 모르겠는데요.”

“역시 기억 못하는군요. 하긴 레이디께서 치료하신 이가 한둘이 아닐 테니.”

“……?”

파비앙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 부하입니다. 지난번 제국군에 포로로 잡혔을 때 레이디께서 살려준 이이기도 하죠.”

“……!”

“그 친구가 돌아온 후, 등불을 든 여인에 대한 칭송을 그렇게나 하더군요. 말 그대로 천사라고. 레이디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언젠가는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이런 말들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랬나? 누구인지 도통 기억이 안 났다.

“이 자리를 빌려 샤를을 비롯해 포로로 잡힌 우리 공화국 병사들의 생명을 살려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 아니에요.”

엘리제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뜻을 가지고, 포로로 잡힌 공화국군을 치료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환자가 있으니 치료한 것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의학을 배운 현대 지구의 의사들은 환자를 적아를 가리지 말고 치료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의 정신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편히 쉬십시오.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제외하면, 안에서는 자유롭게 있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파비앙은 타국의 예비 황태자비에게 하듯 공손히 인사 후 방을 나갔다.

그런데 그가 방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엘리제가 그를 불렀다.

“저…… 경(Sir)!”

“파비안 중령이라 부르면 됩니다.“

“주, 중령님.”

“왜 그러십니까, 레이디?”

“저…… 니콜라스 원수께서는…… 어떠신가요?”

물어보는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감이었다.

“수술 후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거동하실 수 있을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더 걸릴 듯합니다.”

“아…….”

그녀가 지금 파비앙의 배려로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루이 니콜라스가 침상에 누워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에게 당한 총상 때문에.

‘절대 용서하지 않으마! 심페폴에 도착하기만 하면!’

루이는 그녀를 거칠게 끌고 가며 그렇게 악을 썼다.

그래서 엘리제는 심페폴에 도착하면 어떤 고초를 당할지 몰라 속으로 벌벌 떨었다.

하지만 하늘이 그녀를 도우신 건지, 아니면 그에게 벌을 내린 건지, 심페폴에 도착하자마자 전갈은 쓰러져 버렸다.

원인은 과다출혈!

그녀에게 당한 총상이 하필이면 손목동맥을 찢어버린 탓이었다.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급하게 지혈을 시도했지만, 완전할 수가 없었고, 심페폴로 오는 내내 피가 조금씩 흘렀던 것이다.

‘나를 풀어주었으면 완벽히 지혈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엘리제는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뭐, 그녀를 괴롭힐 생각만 한 건 그였으니, 인과응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심페폴에 돌아오자마자 응급 지혈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다.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엘리제는 불안함에 치마를 움켜쥐었다.

상대가 일반적인 이면 이렇게까지 불안해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적국의 포로라도, 고위 귀족의 딸, 그것도 황태자비로 예정된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테니까.

하지만 상대는 루이 니콜라스였다.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특히 이전 삶, 사교계에서 그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

바다 건너 브리티아 섬까지 소문이 들릴 정도로 그에 대한 악명은 높았다.

더구나 그는 자신에 대해 악감정도 깊지 않은가?

“하아.”

그녀는 그가 병석에서 일어난 후가 걱정되었다.

한편, 파비앙은 한숨을 내쉬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파비앙도 루이 니콜라스가 일어난 후가 걱정되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 소녀를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까.

그는 이 순백한 소녀가 루이에게 고초를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단 내가 막아보기야 하겠지만.’

루이의 성격을 알기에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누가 이 소녀를 구하러 오기라도 했으면.’

하지만 누가 온단 말인가?

아무리 밀리고 있다지만, 이곳엔 공화국의 주력이 모여 있다. 그 누구도 여기까지 뚫고 들어올 수는 없다.

역대 최강의 초상 능력자라는 공제나, 서대륙 최강검이라는 검제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니, 공제나, 검제라도 무리겠지. 그리고 그들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이 적지에 올 리도 없고.’

그들은 제국군을 이끄는 통수권자다. 동시에 제국의 다음 대를 이끌 황제 후보이기도 하고.

파비앙은 엘리제가 아무리 제국에서 존경받는 예비 황태자비라 해도, 그들이 목숨을 걸고 이 적진에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

히이잉!

한 필의 백마가 제국군 사령부가 위치한 프라바에 도착했다.

백마에 탄 이를 알아본 병사들이 경례했다.

“충성!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말에서 내리는 이는 다름 아닌 3황자 검제 미하일.

전날 벌어진 프라바 공방전 때 서쪽 전선에 나가 있다가 지금 복귀한 것이다.

“총사령관은?”

짧게 묻는 그의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화사한 얼굴 속에 타오르는 감정은 선명한 분노! 그 섬뜩한 기세에 질문을 받은 병사는 흠칫 놀라 답했다.

“아, 안에 계십니다.”

“그래.”

그는 거친 걸음으로 사령부 건물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리제가 잡혀갔다고? 그 루이 니콜라스에게?’

파란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들끓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형님은 도대체 뭘 한 거야? 이래놓고 약혼자라고? 자기 여자 하나 변변히 지키지 못하면서?!’

안다. 황태자 린덴이 일부러 그녀를 지키지 않았을 리는 없다는 것을. 불가피한 상황이었겠지.

그럼에도 용서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큼은 지켰어야 했다. 설사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해도 말이다.

어쩔 수 없었단 말은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작은 소녀가 루이 니콜라스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이니까!

‘빌어먹을. 리제.’

처음 혈탑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을 밀이라 부르며 눈물짓던 모습.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알버트를 수술하던 모습, 또 전염병이 돌 때 자신을 치료해 주던 모습.

미하일에겐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모습들이었다. 이미 그녀는 그의 가슴속에 너무나 깊이 들어와 있었으니까.

‘이렇게나 소중한데. 형님이라 믿고 맡겼었는데! 그런데 잃어버려?’

곧 린덴의 방 앞에 도착한 그는 잠시 비천검을 잡았다.

감정이 들끓어 조절되지가 않았다.

이대로 린덴을 만나면 보자마자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것 같았다.

“후우, 후우.”

그런데 그렇게 그가 감정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먼저 온 손님이 있는지, 방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대화라기보단 일방적인 고함.

“안 됩니다, 전하!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

방 밖에서 미하일은 멈칫했다.

고함의 주인은 그도 익히 아는 이였다.

맥가일 원수. 평민으로 군사령관의 위치까지 오른 전설적인 위인.

항상 공손한 그가 황태자에게 소리를 질러? 무슨 일이기에?

“절대 안 됩니다! 군 통수권을 포기하겠다니요?!”

“난 이미 결정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군 지휘권을 저와 미하일 전하에게 넘기고 심페폴로 홀로 들어가시겠다고요?”

“내가 없어도 원수, 자네와 미하일이 있으면 제국군을 움직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이기고 있는 전쟁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없어도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계획만 마무리되면 이 전쟁은 무조건 승리한다.”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맥가일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심페폴에 홀로 들어가면 아무리 공제라 불리시는 전하라도 죽습니다!”

이게 무슨 헛소리들이야?

방 밖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는 미하일은 기가 막힌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엘리제,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것보다는.”

“전하!”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아나, 원수?”

린덴이 비틀린 목소리를 내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야. 응? 심장이 멈춰 있는 것 같다고.”

황태자에게 맥가일은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전하. 이 늙은이가 이렇게 두 손을 빌며 부탁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심페폴을 함락하면 황태자비께서는 자연스레 저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심페폴 함락? 그게 언제인데? 우리의 그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최소 한 달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지금도 내 심장은 찢어질 것 같은데?”

미하일은 밖에서 대화를 듣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벌컥 문을 열어버렸다.

저 바보 같은 대화를 더는 못 들어주겠다.

“……?!”

“미하일 전하?!”

갑작스레 나타난 그에게 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미하일이 더했다. 황태자 린덴의 믿지 못할 옷차림을 본 탓이었다.

“아니, 형님? 그 옷은?”

어디서 많이 본듯한 푸른 제복.

황태자이자 제국군의 총사령관인 린덴이 공화국군의 제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입을 쩍 벌리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 동생에게 린덴이 뭘 보냐는 듯 말했다.

“뭐?”

“……그거 설마 변장이라고 한 것은 아니겠지? 그거 입고 나 공화국군이요, 하고 심페폴에 잠입하려고?”

“네놈이랑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꺼라.”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그리고 형님 얼굴이 얼마나 유명한데! 아무도 안 속을 거야!”

하지만 린덴은 듣는 척도 안 하고 자신이 할 말만 하였다.

“어쨌든 잘 왔다. 명령할 게 있었는데.”

“뭐? 무슨 명령?”

린덴은 자신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그에게 건네었다. 무슨 부엌 식칼 다루듯 대수롭지 않게 건네었지만, 검에는 황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총사령관의 군 통수권을 상징하는 검이었던 것이다!

“이걸 왜?”

“이제 네 거다.”

“뭐?”

“난 이제 심페폴에 갈 것이니, 이제 네가 군을 이끌어야지.”

“……!”

미하일은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참고로 이건 총사령관으로서 내리는 군령이다. 반론은 허용하지 않아.”

미하일은 검을 받지 않고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어이, 형님. 잠시 진정하라고. 맨날 얼음장 같더니 오늘따라 안 어울리게 왜 그래? 나도 많이 흥분하긴 했지만, 형님이 이러시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하지만 린덴은 짧게 말했다.

“받으라고. 군령이다.”

“아아, 잠시만. 하아.”

미하일은 이성을 잃은 형님에게 한숨을 내쉬고 맥가일 원수를 바라봤다.

맥가일 원수는 제발 좀 말려 달라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아, 형님. 그건 알지? 심페폴에 공화국군이 몇 명이 있는지.”

“…….”

“10만이야. 10만.”

“그래서?”

“뒷일을 생각해야지. 가서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하지만 린덴은 차갑게 말했다. 낮고 차갑지만 그득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다.

“10만이든, 100만이든 뭐? 뒷일? 지금 그녀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게 중요한가?”

“……!”

미하일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이 이런 분이셨나?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쨌든 받아라. 내가 심페폴에 가 있는 동안 네가 군을 이끌어야 하니.”

“싫어.”

“내 말 못 들었나? 군령이다.”

“군령? 내 평생 이런 황당한 군령은 처음이네. 아니, 뭐. 황당한 것을 떠나서.”

미하일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 린덴에게 집어던졌다.

“나 이제 군령 안 따라도 되는데?”

“……?!”

“사표 낼 거거든.”

맥가일은 미하일이 던진 봉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봉투에는 ‘사표’라고 적혀 있었다.

이 황자들이 정말! 맥가일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9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Ps. 원래는 내일은 주말이어서 쉬려고 했으나... 출판사님이 이번 주말도 연재하라고 하셔서... 연재합니다...;;; 다음 주말부터 주 5회 연재로 바뀔 예정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