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95화 (95/194)

00095  4-1 탈출  =========================================================================

1장 탈출 - 2

“나 이제 제국군 아니야. 그러니 형님이 뭐라고 할 권한 없어.”

“너 설마?”

“그래. 리제는 내가 구하러 가.”

“……!”

린덴이 낮게 말했다.

“안 돼. 용납지 않겠다.”

“용납은 무슨. 내가 그냥 간다는데.”

“네가 가면 죽는다.”

“그러는 형님은?”

“황위를 포기할 셈이냐?”

미하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니지.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거야.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리제를 구하러 가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죽으면 리제도 못 구하잖아?”

그러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리제를 들고 하늘로 솟아나면 되겠지. 땅으로 꺼지거나. 그러면 살 수 있겠지.”

“미쳤군.”

“지금 만만치 않게 미친 형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시간 아까우니 그만 이야기하자. 리제는 내가 구하러 가. 형님은 여기서 군대나 잘 지휘하라고.”

“안 돼.”

“아, 도대체 왜?”

“내 것을 네놈 따위에게 맡길 순 없으니까.”

“……!”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미하일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린덴이 말을 이었다.

“난 너와 달리 심페폴에 혼자 들어가도 죽지 않으니까.”

“뭐? 그게 무슨?”

린덴이 가만히 미하일에게 물었다.

“미하일.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 내 군령을 안 들을 것이냐?”

“당연하지.”

“그렇군. 알겠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창의 방향은 심페폴이 있는 남쪽이었다.

그런 형의 옆모습에 미하일은 일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뭐지?’

그리고 형이 다시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미하일은 그 불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린덴의 동공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초상 능력의 발현이었다!

“이런 제길!”

그가 어떤 초상 능력을 발현하려는지 깨달은 미하일은 화급히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한발 늦었다.

아무리 검제라도 미리 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 초상 능력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런!”

미하일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천장이 빙글빙글 돌며 의식이 흐릿해졌다.

린덴의 고유 능력인 ‘의식 추방’이었다.

“이이……! 이런 제길!”

미하일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저항했다. 광대한 기운이 전신에 몰아치며 초상 능력에 맞섰다.

하지만 린덴은 말했다.

“포기해. 이미 의식 추방에 걸린 이상 아무리 검제인 너라도 저항할 수는 없다.”

그의 눈이 다시 한 번 금빛으로 빛났다.

재차 의식 추방을 사용한 것이다.

“아……!”

미하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런 사기적인……!’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린덴의 초상 능력은 치명적 단점이 존재함에도 그 속성상 위력이 너무 사기적이었다.

미리 대비하면 버틸 수가 있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일단 걸려들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버텨야……!’

마지막 발악으로 미하일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도 자신만의 고유 초상 능력을 발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쉬어라.”

린덴이 그의 뒤로 오더니 뒷목을 손날로 후려쳤다. 지난번 자신을 기절시킨 것을 복수라도 하려는 듯이 똑같은 동작이었다.

“커억!”

결국 미하일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 추방에 걸렸으니 최소 며칠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아아…….”

맥가일 원수가 두 황자의 다툼에 좌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되어가는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린덴의 코에서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전하!”

“괜찮다.”

익숙한 태도로 피를 닦아낸 그는 쓰러진 미하일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영창에 넣어.”

“영창…… 말입니까?”

“그래, 이왕이면 습한 곳으로.”

참고로 습한 영창엔 벌레가 많이 나온다.

“죄목은…… 상관의 허락도 없이 사표를 내려 한 죄. 그리고 상관 명령불복종죄 정도면 되겠군.”

“…….”

무언가 개인적인 사심이 가득 들어간 듯한 즉석 판결이었다. 심지어 별로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정말, 정말…… 이렇게 가셔야겠습니까?”

맥가일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린덴에게 매달렸다.

“그래.”

“전하, 제발…… 가면 죽습니다.”

린덴이 의아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원수도 그렇고, 미하일 이놈도 그렇고 자꾸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왜 죽는단 말이지?”

“……!”

“모두 뭔가 잊어먹고 있는 것 같군.”

린덴은 미리 챙겨둔 짐을 등에 메었다. 무얼 집어넣었는지 산더미처럼 큰 배낭이었다.

“내가 왜 앙젤리에서 공제(空帝)란 이름을 얻었는지 말이야.”

“……!”

“걱정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공화국, 그놈들이야.”

맥가일의 눈이 커졌다.

린덴은 차갑게 말했다.

“특히, 만약 엘리제, 그녀가 터럭 하나라도 상해 있다면 루이 니콜라스와 공화국 놈들은 내가 왜 허무(虛無)의 공제라 불렸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

하루가 지났다.

공화국의 군의가 모조리 달라붙어 치료한 덕분에 루이 니콜라스는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는데.

“내…… 오른손을 잘라야 할 수도 있다고?”

루이 니콜라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석 군의가 송구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네, 각하. 죄송합니다.”

“아니? 총알 한 발이잖아! 손이 터져 나간 것도 아니고! 손목 끝에 맞았는데 왜 손을 잘라?! 제대로 치료한 것 맞아?!”

루이 니콜라스가 버럭 화를 내었다.

“총알이 하필 손목동맥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응급 수술 끝에 지혈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동맥을 살리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손목동맥은 손에 혈액을 공급해 주는 혈관입니다. 반대쪽에 동맥 하나가 남아 있으나, 그래도 손끝으로 피가 원활히 가지 않을 수도 있어 괴사가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공화국의 군의들은 출혈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손목동맥을 묶어버렸다.

현대 지구라면 동맥을 묶는 것이 아니라 미세 실로 찢어진 동맥을 봉합했겠지만, 이 시대에 그런 섬세한 수술이 가능한 외과의사는 오로지 엘리제 그녀밖에 없었다.

‘등불을 든 여인에게 도움을 요청할까도 했지만.’

안타까운 얼굴을 한 군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루이 니콜라스가 수술을 받는 도중에도 ‘엘리제, 엘리제!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이러며 이를 가는데 어떻게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만약 경과를 지켜본 후, 손에 괴사가 진행된다면 불가피하게 손목을 절단해야 할 듯합니다.”

“……!”

루이 니콜라스의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얼굴에 난 상처도 모자라 손목을 절단해야 한다고?

“꺼져.”

“……네?”

“꺼지라고 이 돌팔이들아! 네놈들이 제대로 치료를 안 해서 그런 거잖아!”

와장창!

그는 성한 팔로 주변의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의사와 간호원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각하! 진정하십시오!”

부관인 파비앙 중령이 화급히 말렸으나, 이미 루이 니콜라스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닥쳐! 술! 술을 가져와!”

“각하, 상처에 술은 좋지 않습니다. 얼굴의 상처도…….”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닥치라고!”

쨍그랑!

유리잔이 파비앙의 얼굴을 정확히 스쳐 벽면에 부닥쳐 박살 났다.

조금만 옆이었으면 파비앙의 얼굴은 유리잔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전갈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파비앙, 너마저 무시하는 거냐? 응? 그런 거야?!”

“…….”

파비앙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옆의 병사에게 말했다.

“포도주를 가져와라. 가장 순한 것으로.”

“네, 중령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먼저 군무로 나가보겠습니다. 몸에 안 좋으니, 부디 과음은 하지 마시길.”

그리고 공손히 경례 후 병실을 나섰다.

문을 닫은 파비앙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전쟁은 졌구나.’

이미 전황은 기울대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총사령관인 전갈마저 저런 상태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아군의 피해를 줄일 방법을 생각해야겠군.’

그때, 병실 안에서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들렸다.

“제길! 나를 이런 꼴로! 엘리제! 가만두지 않겠다!”

“……!”

그 한심한 꼴에 파비앙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총통 시몬 니콜라스의 독자인 루이 니콜라스는 어릴 때부터 큰 실패라곤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오로지 성공과 천재라는 칭송. 또한 공화국의 지배자인 총통의 아들이란 배경 속에서 그는 삐뚤어진 괴물로 자라났고, 그 결과가 저것이다. 추하기 그지없었다.

‘하아, 오늘은 레이디 클로랜스가 머무는 관사에서 머물러야겠군.’

니콜라스의 부관인 그는 따로 집무실이 있어 엘리제가 있는 관사에 갈 필요가 없었지만,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설마 저런 몸 상태로 루이가 허튼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술에 취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답답하구나.’

***

그날 늦은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파비앙은 엘리제를 찾아갔다.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레이디?”

“덕분에요. 항상 감사합니다.”

차분히 감사를 표하는 엘리제를 보며 파비앙은 눈에 감탄을 띠었다.

‘적진에 포로로 있는데, 참 의연하구나. 저렇게 어린데.’

물론 안다.

겉으론 차분하지만, 속으로는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을.

여린 소녀의 몸으로 홀로 적진에 포로로 잡혀 있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속마음이 어떻든, 소녀는 흔들리는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았다. 세계를 호령하는 브리티아 제국의 예비 퍼스트레이디다운 의연함과 기품이었다.

최근 추한 모습만 보이고 있는 자신의 상관과 참으로 비교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소녀의 대단함이 어디 의연함과 기품뿐이겠는가?

전쟁 초반 몽셀 왕국의 기습을 막을 작전을 제안한 것도, 제국군 야전병원의 사망률을 2%로 내린 것도, 코프스크 대회전을 승리로 이끈 것도, 전염병을 막은 것도 모두 이 소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화국군이 이리도 빨리 패배의 구렁텅이 빠진 것은 공제도 검제도 아닌, 모두 이 소녀 때문.

하지만 파비앙은 적의가 들지는 않았다.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다.

‘이제 17살이라 했던가? 내 동생보다도 어리잖아.’

그런데 저렇게 작고 여린데 누구보다도 강해 보인다. 그 사실이 참으로 신기했다.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중령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파비앙에게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그냥…….”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가, 각하! 진정하십시오!”

“닥쳐! 비켜!”

“지, 진정을……!”

파비앙과 엘리제는 놀라 서로 바라봤다.

“이…… 소리가 뭐죠?”

그녀가 감금된 방은 관사 꼭대기 4층이다.

그런데 얼마나 소란을 피우고 있는지 1층에서 들리는 듯한 고함이 4층까지 선명히 들렸다.

‘아아! 결국!’

파비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단번에 상황을 판단했다.

루이 니콜라스가 드디어 엘리제를 만나러 이곳에 온 것이다. 그것도 술에 취해서!

‘안 돼. 막아야 해.’

물론 포로에 대한 처우는 승자의 권한이었다.

최근 들어, 인권이니 뭐니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인권은 무슨. 결국, 전쟁에서 포로를 죽이고 살리고는 승자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이런 고귀한 소녀를 단순히 분풀이를 위해 농락하려 하다니?

이 소녀는 향후 제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될 신분이다.

아니, 그걸 떠나서 파비앙은 이 소녀가 루이 같은 이의 손에 농락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소녀다. 단순한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은 많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서는 그런 겉만 아름다운 여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광채가 있었다.

강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가며, 타인을 밝히는 이에게서 나는 광채가 말이다.

즉, 추악하게 망가진 루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레이디 클로랜스.”

“네?”

파비앙은 불안에 떨리는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절대 이 방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

“반드시입니다.”

그러고 파비앙은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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